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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넥||크셰넥 [Křenek, Er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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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크세넥(Ernst Křenek, 1900년 8월 23일-1991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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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8월 23일 빈에서 군정의 경리감으로 있던 부친 에른스트 크세넥(Ernst Křenek)과 군인 집안의 출신인 모친 에마누엘라 크세넥(Emanuela Křenek)사이에서 태어난 크세넥은 이십대부터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창조력을 나타냈다. 이러한 예술적 창조력의 기반은 6살부터 시작한 피아노 레슨과 왕립학교(Kaiserschule)에서 받은 1911년부터 1915년까지의 음악수업에서 시작된다. 이때 이미 그는 대위법과 화성학 수업을 받았으며, 1911년에는 처음으로 작곡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음악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예민했던 젊은 크세넥은 1916년 빈 음악 아카데미(Wiener Musikakademie)에서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의 문하생으로 6년간에 걸친 음악 학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슈레커의 문하생으로 학업을 하는 가운데 1919년에는 빈 대학교에서 두 학기에 걸쳐 철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1920년 크세넥은 스승 슈레커를 따라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그의 음악생활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다. 베를린 체류기간 동안에그는 음악 창작면에서 처음으로 오페라 무대에 주의를 돌렸다.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긴 1923년부터 파울 베커(Paul Bekker)의 조교로서 카셀의 오페라 하우스와 비스바덴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일하기 전까지 크세넥의 창작 경향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던 신고전주의로의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경험은 오페라에 대한 크세넥의 흥미를 창작의 중심으로 전환하는데 아주 유용하였다. 1928년 크세넥은 그의 고향인 빈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베르크(Alban Berg)와 베베른(Anton von Webern)과의 접촉 그리고 1929년 규칙적으로 참가한 칼 크라우스(Karl Kraus)의 강의를 통하여 그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빈에서의 생활을 다시 시작한 이 시기는 작곡가로서의 크세넥에게 있어서는 상심의 시기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자신의 고향인 빈에서는 이루지 못하였고 주로 독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독일에서의 크세넥의 작곡가로서의 성공도 그러나 1933년 나치 정권의 등장과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크세넥의 작품들은 연주 금지목록에 올랐다. 이러한 작곡가로서 겪는 어려운 상황은 1934년 빈 국립오페라의 1933년 작곡된 크세넥의 무대작품 『칼 5세 Karl V.』op. 73의 초연을 위한 연습이 오스트리아 파시즘의 공격에 의하여 중단됨으로 더 심화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1930년부터 1937년까지 크세넥은 창작작업보다는 그의 문학적 재능을 실제화 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저술활동은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대상을 범위로 하였다. 또한 빌리 라이히(Willi Reich)와 함께 풍자적인 음악잡지<23 Dreiundzwanzig>를 편집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크세넥의 문학적 재능은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 자신의 많은 희곡과 가곡들의 가사를 통해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1938년 크세넥은 미국으로의 이민을 단행하였고 1945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미국에서 자유 작곡가로서의 수입에 의존할 수 없었던 크세넥은 교육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교육자로서의 삶은 또한 그의 창작 경향에 옛음악(그레고리안 성가부터 몬테베르디까지의 성악음악 작품에 몰두하였고 음악이론의 종교 역사적 논문을 연구하였다. 나아가 요하네스 오케겜에 대한 논문을 출판하였다)에 대한 내용의 수용을 야기시킨 계기가 되었다. 1968년 유럽으로 다시 여행을 한 크세넥은 그곳에서 활발한 지휘자로서의 활동과 강연회를 하였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많은 강연회와 연주 활동 그리고 창작생활을 해온 크세넥은 1991년 12월 22일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에서 운명하였고 빈의 명예묘지에 안장되었다.   

   크세넥은 242개에 달하는 작품을 다양한 음악어법과 장르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작곡하였다. 그의 음악적, 창작적 다양성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과 변신술에 능한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Proteus)로서 비견되어지기도 한다. 크세넥의 이러한 창작 경향의 다양성은 다음과 같은 시기구분에 의해 정리되어질 수 있다:

*자유로운 무조적 창작시기: 베르크를 포함하는 빈 악파의 전형적인 후기 낭만음악에서 시작하여 자유로운 무조적 창작시기로의 변화는 『제1번 현악사중주』 op. 6(1921)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젊은 크세넥을 세인의 주목을 받게 하였던 말러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무조적 작품인 『제2번 교향곡』 op. 12 (1922)와 정치적 성격을 띈 단막 오페라 『폭군의 성채 Die Zwingburg』 op. 14 (1922)을 들 수 있다.

*신고전주의적 창작시기: 자유로운 무조적 창작시기 이후에 크세넥은 자신의 창작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그의 새로운 방향 전환은 음악은 유용하고 재미있으며 실제적으로 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지 하에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크세넥은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와 프랑스 6인조 작품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 이 시기의 작품 『제 2번 콘체르토 그롯소』op. 25(1924), 『플륫, 바이올린, 쳄발로 그리고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티노』op. 27(1924), 『7개의 관현악 소품들』op. 31(1924) 그리고 『관악기와 타악기를 위한 신포니아』op. 34 (1925)에서는 신고전주의적 경향에 대한 접근, 즉 새로운 바로크적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초기낭만적 창작시기: 이 시기는 크세넥 자신의 텍스트에 의한 성공적 오페라 『죠니는 연주한다』op. 45(1925/26)로 시작된다. 이 작품에서 크세넥은 푸치니의 가창풍의 선율로 돌아섰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크세넥의 낭만주의로의 복귀와 함께 새로움에 대한 수용을 볼 수 있다: 그의 고전적이고 슈베르트적 서정주의의 부활에 기초한 초기 낭만적인 기법외에도 1920년대 유럽 음악에서 그 유행이 최고조에 달하였고 온음계적 화성의 낡아빠진 법칙을 대신하며 많은 신선함을 제공한 재즈의 첨가를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연가곡인『오스트리아 알프스로부터의 여행문Reisebuch aus den österreichischen Alpen』op. 62(1929)을 들 수 있다. 조성적 어법의 재수용을 통하여 슈베르트 가곡 유형에 대한 확연한 회고를 보여주고 있는 이 연가곡을 통하여 크세넥은 20세기의 예술가곡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크세넥은 작품의 기본 아이디어로 여행을 선택하여 여행을 통한 느낌과 풍경 등을 음악적 동기로 삼았고, 여행의 다양한 단계를 서정적 주제의 발전 과정을 통하여 묘사하기 위하여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그 견본으로 삼았다. 이 작품에서 전적으로 드러난 슈베르트 음악 세계의 반영은 베를린 시절의 에르트만과의 교류를 통한 결과인 것이다.

*12음기법에 의한 창작시기: 십년 동안 진행되어진 크세넥의 이러한 다양한 창작의 발전은 12음 기법에 의한 창작시기로 들어서게 된다. 1930년부터 그의 작품에 있어서 커다란 격변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격변은 크세넥이 1928년 다시 찾은 그의 고향 빈에서 쇤베르크의 제자인 알반 베르크와 안톤 베베른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알게됨으로 이루어졌고, 또한 크세넥이 규칙적으로 참가한 칼 크라우스(Karl Kraus)의 강연회에서 접한 12음기법에 대한 점점 더 늘어나는 관심을 통하여 자극되어졌다. 그의 조성적 음악어법은 그때부터 느린 경과 속에서 점점 더 깨어져 나갔고, 1931년의 작품들(op. 67-72)은 진정한 12음 기법에 의한 창작시기로 들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작품에 속한다. 12음 기법의 수용은 크세넥의 1950년대 중반이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총렬적 작곡시도로 이어진다. 12음 기법에 의한 창작 시기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사적 회상오페라(Bekenntnisoper)?인 『칼 5세』op. 73(1933), 『제 6번 현악사중주』op. 78(1936), 혼성합창을 위한 아카펠라 작품인 『예언자 제레미아의 애가 Lamentatio Jeremiae Prophetae』op. 93(1941/42)와 건반 악기를 위한 작품 등을 들 수 있다.

*총렬음악의 시도: 많은 작곡가들이 총렬주의 경향에서 물러난 시기인 1958년에 자신의 전면적인 총렬음악의 시도를 보고하였다. 총렬적 작곡의 시도를 하기 시작한 1956년은 크세넥은 전자음악에 대한 몰두와 중세 대위법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었던 해이다. 이를 통하여 크세넥의 창작 경향의 다양성은 시간적 흐름 속에서뿐만 아니라 동시성을 띄며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창작 경향의 구분에는 1956년 이후 총렬적 작곡의 시도와 함께 이루어진 새로운 음악적 경향인 전자 음악에 대한 몰두, 옛음악에 대한 재수용 그리고 우연적 경향을 포함하는 작곡의 다양한 연주방법의 실험이 포함되어져야함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다양성이 동시에 병행되어졌음으로 도식적으로 나눌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에른스트 크세넥의 작품은 유럽 음악 발전에 대한 최소한 한 세기의 특수한 음악어법의 반영으로 간주할 수 있고 모든 분야에 걸친 음악 역사적 장르의 반영과 변화의 대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크세넥을 음악사의 한 세대에 포함시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지나간 과거의 시점(20세기 초반 현대 음악을 주도하였던)에 고정된 거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시대를 함께 하는 동시대적 작곡가로서 20세기 음악 역사 흐름의 증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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