륄리(Jean-Baptiste Lully, 본래의 이태리 이름: Giovanni Battista Lulli, 1632.11.28. 플로렌스 - 1687.22.3. 빠리)
이태리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 1646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몽팡시에의 백작부인(Melle de Montpensier) 집에서 이태리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바이올린과 기타아 연주 교육을 받았는데,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프랑스 궁정 행사에 참여했고, 「왕의 24 바이올린」 악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14세의 어린 왕(루이 14세)과 함께 춤을 주기도 했다(1653.2.23,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 1653년 『왕의 기악 작곡가』 칭호를 받았다. 그는 많은 궁정 발레(Ballet de cour)를 작곡했다. 1956년에는 -16명으로 시작하여 21명으로까지 확대된 된- 자신의 오레스트라(petits violons)를 설립했는데, 이 악단은 24명으로 구성된 『왕의 바이올린』 악대를 능가하는 명성을 누렸다. 1661년 륄리는 「궁정음악의 총감독 겸 작곡가』(Surintendant de la musique et compositeur de la musique de la chambre)라 임명되었다. 1962년에는 극작가 코르네이유(Pierre Corneille)와 몰리에르와 힘을 합해 새로운 코메디 발레를 만들었다.
1671년 륄리는 작가 패랭(Pierre Perrin)으로부터 오페라 아카데미(극장) 설립허가권을 샀고, 1672년에는 루이 14세로부터 새로운 허가권을 허락 받았는데, 그 후로 프랑스에서 새로운 오페라 아카데미의 설립하는 것은 모두 륄리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 해에 그는 아카데미를 실제로 설립했다. 오페라 아카데미 설립 허가권에는 오페라 교육도 함께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었다. 이에 따라 륄리는 오케스트라와 성악 교육도 실시했다. 그는 또한 연출과 안무에서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또한 륄리는 인쇄 허가권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많은 작품과 18세기 프랑스에서 공연된 오페라의 악보들이 잘 보존되어 전해질 수 있게 했다.
1673년 그는 최초의 음악비극(Tragédie en musique 또는 Tragédie lyrique)인 『카드뮈와 헤르미오느』(Cadmus et Hermione, 대본: Ph. Quinault)를 작곡했다. 음악비극의 테마를 선정하는 데에는 왕도 깊이 관여하였다. 대본을 주로 맡은 퀴노는 19세기까지 계승된 전형적 프랑스 비극을 만들었다. 그의 대본은 륄리의 소망에 따라 음악을 많이 고려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1681년 그는 왕의 비서(Secrétaire du Roi)로 임명되어 생애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왕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쳤고, 왕을 등에 업고 많은 사람들을 권력으로 제압했다. 륄리는 왕의 쾌유를 기원하는 테데움을 연주하면서 자신의 지휘막대기에 발등이 찔려, 상처에 염증이 번져 죽었다.
륄리의 초기 발레에서는 이태리식 노래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662년 이후부터는 프랑스의 노래(air)만을 사용했다. 그는 극적 구조를 엄격하게 따르는 새로운 형식의 궁정 발레를 창조하였다. 또한 코메디 발레에서는 전통적 프랑스 희극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궁정발레와 코메디 발레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무용수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후기의 코메디 발레에서는 거의 오페라와 오페라 코미크에 도달했다. 서정비극은 문학과 무대미술 등 관련분야를 중시하는 종합예술적 작품이었다. 첫머리에 나오는 프롤로그는 왕을 칭송하는 말로 가득 찬 노래였다. 디베르티쓰망(Divertissement)은 독립적인 부분이 아닌, 극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오스티나토 형식은 애호되었는데, 특히 비중이 높은 음악으로 나타났다. 레치타티보 음악은 가능한 한 언어의 억양을 그대로 살리며, 아리아 또는 이중창 등의 음악양식과 밀접한 관계 속에 만들어져서, 후속적인 음악으로 넘어가는 일에 단절감이 없었다. 가사의 의미를 살리고 심리적 영향력을 노리는 음악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언어를 중시하는 당시의 프랑스 문학의 영향 아래 음악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따라서 언어의 리듬을 살린 성악곡은 불규칙한 박자를 갖는 일이 많았다.
오페라에서의 합창의 역할은 비중이 컸다. 3-5성부로 구성된 기악곡은 그 이전의 오페라들과는 다른 극적인 면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태리 태생으로 프랑스의 “민족적” 오페라를 대표했던 륄리의 오페라는 약 100년간 “프랑스 오페라”를 의미했다. 이 프랑스 오페라는 라모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라모 시절에 이 프랑스적 오페라는 이태리 오페라의 도전을 받았다. 상당히 번거로운 모양의 라모의 오페라에 비해서 륄리의 음악은, 특히 무용곡 종류들은 단순한 편에 속했다. 륄리의 오페라는 1779년까지 빠리의 궁정 아카데미에서 공연되었다. 1740년 이후의 공연은 기존의 것을 개작한 것들이 많았다. 그의 오페라는 프랑스의 지방 뿐만 아니라, 독일, 네델란드, 이태리, 영국에서도 공연되었다. 당대에 영향을 끼친 륄리의 음악 중에는 오페라 모음곡들이 있다. 이 곡들은 1682년 이후 암스텔담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음악을 파로디하여 수많은 샹송과 교회노래가 나타났다.
작품목록
발레:
다른 작곡가와의 공동 작품:
『밤』(La nuit. 대본: Benserade, 1653). 『시간』(Le temps, 대본:Benserade, 1654). 『기쁨』(Les plaisirs, 대본:Benserade, 1655). 『환영』(Les bienvenus, 대본:Benserade, 1655). 『시간의 갈랑테리』(La galanterie du temps, 1656). 『병든 연인』(L’Amour malade, 1657).
다른 작곡가들이 추가적 음악을 더한 작품:
『알시디안느』(Alcidiane, 대본:Benserade, 1658). 『크세르세』(Xerxes, Fr. Cavalli의 오페라에 발레를 붙인 것, 1660). 『툴루즈의 발레』(Ballet de Toulouse, 1660?). 『안절부절』(L’impatience, 대본:Benserade, 1661). 『사시사철』(Les saisons, 대본:Benserade, 1661). 『사랑의 헤라큘레스』(Hercule amoureux, Cavalli의 오페라에 발레를 붙인 것, 1662). 『예술』(Les arts, 대본:Benserade, 1663). 『마을의 결혼』(Les noces de village, 대본:Benserade, 1663). 『외디푸스』(Oedipe, 코르네이유의 비극에 붙인 발레, 1664). 『비너스의 탄생』(La naissance de Vénus, 대본:Benserade, 1665). 『경호대』(Les gardes, 1665). 『뮤즈』(Les muses, 대본:Benserade, 1666). 『카니발 또는 베르사이유의 가면극(Le carnaval ou Mascarade de Versailles, 대본:Benserade, 1668). 『플로르』(Flore, 대본:Benserade, 1669). 『발레 중의 발레』(Ballet des ballets, 파스티치오, 1671). 『카니발』(Le carnaval, 파스티치오, 1675). 『사랑의 승리』(Le triomphe de l’amour, 대본:Benserade 그리고 Quinault, 1681). 『평화의 전당』(Le temple de la paix, 대본:Quinault, 1685).
코메디 발레, 파스토랄레, 기타
『강제결혼』(Le mariage forcé, 대본:몰리에르, 1664).『요술섬의 쾌락』(Les plaisirs de l’lîe enchant, 대본: 몰리에르, 1664). 『엘리드의 공주』(La princesse d’Elide, 대본: 몰리에르, 1664). 『사랑이라는 약』(L’amour médicin, 대본:몰리에르, 1665). 『전원희극』(La pastorale comique, 대본:몰리에르, 1667). 『시칠리아 사람 또는 사랑의 고통』(Le Sicilien ou L’amour peintre, 데본:몰리에르, 1667). 『베르사이유궁전의 디베르티쓰망 또는 제오르쥐 당댕(Grand divertissement royal de Versailles . George Dandin , 대본:몰리에르, 1668). 『베르사이유의 동굴』(La grotte de Versailles, 대본:Quinault, 1668). 『푸르소냐크 씨』(Monsieur de Pourceaugnac, 대본: 몰리에르, 1669). 『대단한 연인들』(Les amants magnifiques, 대본:몰리에르, 1670). 『서민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 대본:몰리에르, 1670). 『프시케』(Psyché, 비극발레, 대본: 몰리에르, Corneille, Quinault, 1671). 『평화의 낙원』(Idylle sur la paix, 대본:Racine, 1685).
오페라:
『카드뮈와 에르미온느』(Cadmus et Hermione, 대본:Quinault, 1673). 『알세스트』(Alceste , 대본:Quinault, 1674). 『테세우스』(Thsée, 대본:Quinault, 1675). 『아튀스』(Atys, 대본:Quinault, 1676). 『이시스』(Isis, 대본: Quinault, 1677). 『프시케』(Psyché, 대본: Corneille, Quinault, Fontenelle, 1678). 『벨레로폰』(Bell?ophon, 대본: Corneille, Fontenelle, 1679). {프로세르피느』(Proserpine, 대본:Quinault, 1680). 『페르세우스』(Perssée, 대본:Quinault, 1682). 『파에통』(Phaëton, 대본:Quinault, 1683). 『아마디스』(Amadis, 대본:Quinault, 1684). 『롤랑』(Roland , 대본:Quinault, 1685). 『아르미드』(Armide, 대본:Quinault, 1686). 『아시스와 갈라테』(Acis et Galatée, 대본:de Campistron, 1686).
기악곡: 브랑르(Bransles, 1664). 『트럼페트, 팀발, 오보에를 위한 에어』(Airs de trompettes, timbales et hautbois) 등.
교회음악: 『테 데움』(Te Deum ,1677), 작은 모테트 10개, 큰 모테트 14개.
륄리 작품 전집:
OEuvres complètes, 전10권, 편찬: H. PRUNIÈRES, Paris 1930-39(미완성), 영인본: 뉴욕, 1966.
Collected Works, 편찬: C. SCHMIDT 등. New York,
작품목록:
Schneider, Herbert: Chronologisch-thematisches Verzeichnis sämtlicher Werke von J.-B. Lully, Tutzing 1981.
2005.2.7.
홍정수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륄리, 장-밥티스트(Lully, Jean-Baptiste, 1632-1687)
- 1632년 이탈리아 플로렌스(Firenze)의 방앗간 집 아들로 출생.
- 1646년 귀즈(Guise)의 기사 로랭(Rosaire de Lorrain)에 의해 프랑스로 이주해, 튈르리 궁전(Palais des Tuileries)에서 그의 조카이자 태양왕 루이 14세의 사촌인 오를레앙(Anne Marie-Louise d’Orleans) 공주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는 시종이 됨.
- 그곳에서 코르디에(J. Cordier)에게 바이올린을, 르노(J. Renault)에게 춤을 배우고, 이 궁전의 예술적 모임을 통해 유명한 가수였던 랑베르(M. Lambert)를 만나게 됨.
- 1652년 프롱드의 난(La Fronde)에 연루된 오를레앙 공주가 귀양을 가게 되자 시종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20세의 나이로 파리에 입성하여 궁정무용수로 루이 14세와 친분을 가짐.
- 1653년 방스라드(I. Benserade)와 캉브포르(J. de Cambefort) 합작의 ≪밤의 발레≫(Ballet royal de la nuit)에서 루이 14세와 함께 춤을 춤.
- 같은 해 ‘왕의 기악음악 작곡가’(Compositeur de la musique instrumentale du Roi)로 임명되어 궁정발레 음악 작곡과 공연에 직접 참여함.
- 1656년 자신의 오케스트라인 ‘16개의 바이올린’(16 petits violons) 악대의 지휘를 맡고 이 연주그룹을 위한 활 쓰는 방법, 장식음 등에 대한 규칙을 만들어냄.
- 1658-1681년 방스라드와 20곡 이상의 궁정발레(ballet de cour)를 작곡하고, 이탈리아어 가사의 성악곡도 작곡함.
- 1661년 프랑스로 귀화하고, 1662년 왕의 음악감독인 랑베르의 딸 마들렌느(Madeleine)와 결혼함.
- 1666년 궁정발레 공연을 위하여 ‘16개의 바이올린’과 ‘왕의 24 바이올린’(24 violons du Roi)을 통합 지휘함.
- 1664-1670년 몰리에르(J.-B. Molière)와 코메디발레(comédie-ballet)를 공동 작업함.
- 1669년 시인이며 극작가인 페랭(P. Perrin)이 주장한 프랑스 고유의 오페라의 필요성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면서, 페랭에게 프랑스 전역에 오페라 공연을 위한 아카데미(académie d’opéra) 설립의 특권이 주어짐.
- 1672년 페랭으로부터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독점적인 궁정의 특권을 차지한 뒤 본격적인 오페라 작곡을 시작.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오페라 공연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가함. ‘왕립 음악아카데미’(오페라 극장) 설립을 계약하고 극작가로 퀴노(P. Quinault)를 택함.
- 1673-1683년 ≪카드뮈와 에르미온≫(Cadmus et Hermione, 1673)과 ≪알세스트≫(Alceste, 1674)를 비롯한 13편의 오페라, 서정비극(tragédie lyrique)을 작곡함.
- 1683년부터 루이14세의 궁정교회를 위한 교회음악을 다수 작곡함.
- 1687년 왕의 건강 회복을 위하여 륄리의 지휘로 ≪테 테움≫(Te Deum, 1677)이 150명 이상의 연주자에 의해 공연됨.
- 1687년 3월 ≪테 데움≫ 공연시 지휘봉으로 바닥을 치며 박자를 맞추던 습관으로 다쳤던 발끝의 괴저(壞疽)로 인해 사망.
륄리의 극장음악은 장르별로 1653-1663년의 궁정발레(ballets de cour), 1663-1672년의 전원극(pastorales), 희극발레(comédies-ballets), 비극발레(tragédie-ballet), 1672-1687년의 대규모 무대작품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마지막 시기에는 전원극 ≪사랑의 신과 바쿠스의 축제≫(Les fêtes de l’Amour et de Bacchus, 1672), 서정비극이라 불리는 오페라 13편, 2개의 발레곡 ≪사랑의 승리≫(Le triomphe de l’amour, 1681), ≪평화의 신전≫(Le temple de la paix, 1685), 그리고 영웅적 전원극 ≪아시스와 갈라테≫(Acis et Galatée, 1686)가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륄리는 ≪아쉴르와 폴릭센느≫(Achille et Polyxène, 1687)의 서곡과 1막만을 완성한 채 임종하였다.
프랑스 궁정에서의 첫 시기동안 륄리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양식의 차이점을 구별하는 것을 배웠다. 1661년까지 그의 모든 궁정발레 음악은 이탈리아 양식이었다. 1657년에 그가 전곡을 작곡한 ≪미친 사랑≫(L’amour malade, 1657)은 프랑스 발레에 삽입한 이탈리아풍의 오페라 부파(opera buffa)였다. 1661년경에 이탈리아와 프랑스 양식을 완전히 구분하여 코믹한 장면이나 탄식의 장면을 위해서는 이탈리아 양식을 사용하였다. 그는 코믹한 작곡풍에 매우 능숙하였으며 정치적인 풍자를 코믹한 장면에 함축시키는데 특별한 재능을 발휘했다. 이러한 이유로 륄리의 오페라가 성직자들이나 소르본느 교수들로부터 적대적인 감정을 사기도 했다.
륄리는 궁중발레에 쿠랑트(courante)와 가야르드(gaillarde) 대신 새로운 춤인 부레(bourée)와 미뉴에트(minuet)를 도입하였다. 점차적으로 그는 궁정발레를 단순한 춤이나 독립적인 장면들의 모음 형태로부터 프롤로그와 합창 피날레가 있는 극적인 볼거리로 전환시켰다.
1663-1672년까지 작곡된 희극발레에서 륄리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아리아는 짧은 악구에 주로 단단장 리듬(短短長 --, anapestic rhythm)으로, 음절적 가사가 붙여졌다. 륄리와 몰리에르는 희극발레에 파스토랄 장면을 도입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훌륭한 연인들≫(Les amants magnifiques, 1670)에는 노래로 일관된 프롤로그, 목관악기의 간주곡(ritournelle), 극적인 등장에 웅장한 관현악 사용 등 륄리의 후기 오페라에 나타나는 특징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궁정발레와 희극발레를 조합한 형태의 ≪훌륭한 연인들≫에서 루이 14세는 아폴로 역의 안무를 맡았다. 희극발레에서 가사는 노래되거나 말로 낭송되었다. 1670년에 작곡된 륄리와 몰리에르의 마지막 합작품 ≪평민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 1670)은 극보다 춤과 음악에 비중을 두었는데 이에 회의를 느낀 몰리에르는 륄리와 결별하게 된다. 이러한 희극발레의 경향은 음악, 춤, 시 등이 어우러져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를 예견케 한다. 몰리에르, 퀴노, 코르네유(P. Corneille)가 공동으로 희곡 작업을 한 ≪프시케≫(Psyché, 1678)는 1671년 처음 공연되었을 때 비극발레(tragédie-ballet)라 불렸다. 1678년 륄리와 코르네유는 이 작품에 레치타티보를 첨가하고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서정비극(tragédie lyrique)이란 오페라 형태로 변모시켰다.
1672년 륄리는 페랭으로부터 ‘왕립 음악아카데미’의 전권을 위임받게 되고 아카데미와 모든 오페라 공연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는 파리 오페라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체에서 공연되는 오페라에 모두 관여하게 되며, 아카데미 회원의 외부공연 수를 제한하여 코메디-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의 몰리에르와 더욱 적대적 관계가 되었다.
서정비극은 륄리의 초기작품들보다 대규모적이고 음악이 연속적이다. 그 주제는 그리스 신화나 라틴, 스페인 계통의 기사도적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륄리 오페라의 대부분 명예와 도덕적 의무 혹은 명예와 사랑 사이의 상충관계를 다룬다. 주요 줄거리는 두 연인과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라이벌에 관한 것이며 여기에 통상적으로 신이 개입한다. 덜 중요한 등장인물의 부차적인 줄거리도 유사한 음모를 함축하고 있다. 륄리의 모든 서정비극은 프롤로그와 5막으로 구성되며 이것이 프랑스 오페라의 표준이 되었다. 륄리의 전형적인 오페라는 서곡으로 시작하고, 뒤에 나올 극과 거의 관련이 없는 노래로 불리는 프롤로그가 이어진다. 그 후에 서곡이 다시 반복된다.
서정비극을 작곡하면서 륄리는 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음악이 가사의 정확한 낭송법에 맞추어져야 한다고 하였으며, 극은 단순한 레치타티보를 통하여 발전해 나가야 하고 레치타티보는 장식을 더하지 않고 리듬을 변화시키지 않은 기보된 그대로 노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다수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결합한 형식에서 륄리는 관현악 전주를 사용하였으며, 아리아에는 관현악 반주를, 레치타티보에는 계속저음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 후 ≪아마디스≫(Amadis, 1684)와 ≪롤랑≫(Roland, 1685) 같은 작품에서 륄리는 관현악 반주가 붙은 레치타티보를 더 자주 사용하였다. 륄리 시기의 프랑스 오페라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만큼 관현악 반주가 붙은 레치타티보와 아리아 사이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 륄리가 좋아하는 작은 앙상블 형태는 2중창이었다. 그는 격려와 기원의 장면에 짧은 합창을 써 넣음으로써 이야기 줄거리에 합창을 포함시켰다. 합창은 막간의 여흥이나 기분전환으로도 사용되었다.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은 대규모 작품에서 춤이나 성악 독창, 앙상블 등으로 구성되며 전체 줄거리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디베르티스망은 ≪롤랑≫의 결혼식 장면과 같은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륄리의 기본 오케스트라는 바이올린, 크기가 다른 3개의 비올라, 베이스 바이올린으로 구성된 5성부의 현악기와 계속저음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때때로 오보에와 바순에 의해 중복편성 되었다. 2개의 오보에와 바순의 3중주는 현악기와 대비시키기 위하여 혹은 전원적인 장면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알세스트≫의 장례식 장면은 5성부의 현 오케스트라와 계속저음으로 시작한다. 합창 시작과 함께 2개의 리코더가 합류한다. 간주를 위해서는 부드럽고 가련한 분위기를 내기 위하여 리코더와 계속저음만이 연주된다. 트럼펫, 드럼과 같은 다른 악기들은 특수효과를 위해서만 사용된다. 이러한 합창과 오케스트라 구성은 막강한 것으로 전쟁의 격동, 바다의 포효, 지옥의 혼돈 등을 묘사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규모였다.
륄리는 궁정발레에서 사용한 서곡 형식을 서정비극에서도 사용했다. 이 프랑스 서곡은 두 부분으로 나뉘고 각 부분은 반복된다. 첫 부분은 수직화성적인 형태로 붓점 리듬이 특징적이며 느리게 진행하고, 두 번째 부분은 푸가나 푸가와 비슷한 폴리포니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빠르게 진행한다. 종결부분에 느린 첫 부분의 붓점 리듬이 다시 재현된다. 프랑스 서곡은 대부분 진지하고, 장엄하고, 축제적인 분위기이다.
륄리의 서정비극은 18세기 프랑스 오페라의 전형을 확립시켰다. 후배 작곡가들은 륄리의 기본 구성에 발레와 합창을 포함하는 디베르티스망을 확장하는 것 외에 약간의 다른 수정을 가했을 뿐이다. 서정비극에서 발레에 대한 비중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캉프라(A. Campra)에 의한 오페라발레(opera-ballet) 창작이 가속화되었다. 오페라발레에는 전체적인 줄거리가 있긴 하지만 각 막은 독립적이고 전체 줄거리와 약하게 연관될 뿐이다. 모든 막은 각각 하나의 디베르티스망을 포함한다. 캉프라의 첫 오페라발레 ≪아름다운 유럽≫(L’Europe galante, 1697)에 나오는 네 개의 막 도입부는 유럽의 나라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터키의 특색을 보여준다.
륄리의 교회음악은 상대적으로 양이 적으나 그의 전성기였던 1660-1687년 동안 계속 작곡되었고 인기가 높았다. 특히 그의 ≪미제레레≫(Miserere, 1664), ≪테 데움≫(Te Deum, 1677), ≪데 프로푼디스≫(De profundis, 1683)는 루이 14세로부터 높이 찬양받았다. 그의 교회음악 장르에는 ‘대(大) 모테트’(grand motet)와 ‘소(小) 모테트’(petit motet)가 있다. 대 모테트는 5성부를 갖는 두 개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륄리는 극적인 효과와 이탈리아 합창음악과 성격이 다른 호모포니적인 합창 짜임새를 사용하였다. 때때로 트럼펫이나 통북으로 극적 효과를 불러오는 기악 도입부(symphonie)를 사용한 것도 당시의 교회음악에서는 새로운 혁신이라 할 수 있다.
륄리 작품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거의 모든 장르에 그의 영향이 미쳤다. 샤르팡티에(M.-A. Charpentier)가 륄리와 대적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테 데움≫은 륄리의 모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의 서정비극 구조를 자신의 ≪메데아≫(Médée)에 적용하였다. 그 외의 재능 있는 후세 작곡가들 콜라스(P. Collasse), 마레(M. Marais) 뿐만 아니라 18C 작곡가 라모(J.-P. Rameau)와 글룩(Ch. W. Gluck)에게까지도 륄리 서정비극의 영향력은 가시지 않았다. 심지어 서정비극과 적대시되었던 오페라 발레도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였고 캉프라의 작품에서 특히 륄리의 흔적이 나타난다. 륄리의 오페라풍 작품은 대중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었고 파리를 비롯한 마르세유, 리옹, 루앙, 릴르, 디종, 슈트라스부르크 지방의 극장에서도 자주 무대에 올랐다.
륄리의 작품은 브뤼셀, 헤이그, 함부르크, 슈투트가르트, 로마에서도 공연되었다. 암스테르담의 출판사들이 1682-1715년에 걸쳐 그의 서곡과 기악작품들을 출판하였고, 이것이 북부 유럽에 프랑스 모음곡의 창작과 부흥을 가져옴으로써 바흐와 헨델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가 프랑스 모음곡을 작곡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서 륄리와 함께 공부했던 무파트(G. Muffat)는 륄리의 오케스트라 연주관행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였고, 콘라디(J. G. Conradi)는 1690년대 프랑스 오페라 양식을 함부르크에 소개했다. 콘라디와 쿠서(J. S. Kusser)는 륄리와 6년 동안 함께 공부했으며 자신들의 관현악 모음곡에 프랑스 서곡을 사용하였다. 영국의 퍼셀(H. Purcell)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며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에서도 그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륄리의 놀라운 영향력은 17세기와 18세기 그의 아리아가 누린 인기와 프랑스 문화에 대한 신망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전 계몽주의 유럽을 선도하는 대표적 인물인 륄리는 자신만의 양식을 창조하였다. 그가 공들인 언어에 대한 작업은 언어에 이례적인 생명을 부여하였고, 그것은 그 작품에서 나오는 힘, 명료성, 균형, 일관성, 절묘한 감성과 함께 오늘날의 청중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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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
[권송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