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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노 [Gounod, Char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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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노(Gounod, Charles. 1818 빠리-1893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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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곡가.


빠리 음악원에서 알레비(J. F. Halévy)와 파에르(Ferdinando Paër)에게 배웠다. 칸타타 {페르낭}(Fernand)으로 로마대상을 받아 1839-1842년 로마에서 살았다. 그는 로마에서 교회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팔레스트리나와 바흐에 관한 공부했다. 그는 빠리로 돌아와서 교회성가대 지휘자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며 교회음악가로 활동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멘델스존과 그의 누이 패니 헨젤과 사귀었는데, 이 사실도 그에게 음악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47-48년 빠리의 갈멜 수도원에 거하면서 신부가 되는 준비를 했다. 그는 서품을 받은 일이 없었지만 편지에 "수사 구노"(l'abbé  Gounod)라고 서명하곤 했다. 1852년 그는 빠리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의 딸이었던 안네 짐머만(Anne Zimmermann)과 결혼했다. 같은 해에 그는 합창단(Orphéon de l a ville de Paris)의 지휘자가 되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교회음악에 정진하여 {체칠리아 미사}(1855)를 썼는데, 이것이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곡은 {성 체칠리아를 기리기 위한 미사} 또는 {장엄미사}로도 불리는데, 구노는 이것을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말했다. 이 곡은 16세기적 대위법을 당대의 반음계적 화성학과 어색함이 없이 결합시킨 작품으로 간주된다. 옛 대위법적 작곡방식으로 시작하는 [키리에]는 단순한 선율로 이어지면서 점차 꽉 찬 화성으로 진행한다. 이어지는 [글로리아]는 -보통 화려한 음향을 갖는 관습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소프라노 독창으로 불리다가 끝에 환희에 찬 합창으로 끝맺는다.  가라앉는 분위기를 가진 [미제레레]가 끝나면 오케스트라 음향으로 단어의 뜻이 묘사되는 [크레도]가 따른다. 그 뒤에는 이 곡에서 가장 유명한 [상투스]가 따른다. 테너 독창과 이어지는 합창으로 구성된 이 곡은 선율의 아름다움과 25개의 트롬본이 같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 의해 막강한 소리를 울린다. 여기에 비교되게 [베네딕투스]와  [아뉴스 데이]는 이 곡 전체를 조용하게 끝맺음한다. 이 곡은 낭만주의적 프랑스 교회음악의 대표적 작품에 속한다.   
구노는 슈만과 베를리오즈의 영향으로 오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오페라에 관심을 가지면서 륄리, 글룩, 모차르트, 베토벤, 롯시니에 관해 공부했다. 당시 빠리의 오페라 계를 휘어잡는 사람들은 롯시니, 도니젯티, 마이어베어 등 주로 외국인들이었다. 그는 1851년 오페라 작곡을 시작한 이후 처음에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단지 세 번째 오페라 {원치 않게 의사가 된 사람}(Le Médecin malgré  lui 1858)이 약간의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 다음에 발표한 오페라 {파우스트}(1859)는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남는다. 이 작품은 <드라므 리리크>(Drame lyrique) 방식으로 쓰여졌는데, 이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적 상태를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하여 극적인 상태를 고양시키는 종류의 오페라를 말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제목과는 다르게 마르게리테라는 여자 주인공이 중심인물이다(그래서 독일에서는 이 작품을 {마르게리테}라고 한다). 성악가들이 좋아하는 선율적 아름다움을 지닌 아리아들과 색채감 있는 편성 때문에 자주 공연되는 레퍼토리로 남는다. 베를리오즈적인 "고정상념" 기법을 사용한 이 오페라는 세 인물(파우스트, 마르게리테, 메피스토펠레스)의 성격과 괴테의 원작이 지니는 깊이를 잘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예를 들어 바그너와 리스트에 의해- 받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선율과 오케스트라의 효과적 음향에 의지한 대중적 접근은 이 작품을 대중적으로 성공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에 작곡한 오페라 {미레유}(Mireille, 1864)와 {로미오와 쥴리엣}(Roméo et Juliette, 1867)은 프랑스에서 오래 동안 오페라 레퍼토리로 살아 있었다. 특히 {로니오와 줄리엣}은 오페라 뿐만 아니라 후에(1888) 발레로도 만들어져 유명하여졌으며, 프랑스에서는 이 작품이 {파우스트}의 인기를 능가하였다.
1870-1871년의 전쟁 중에 그는 런던으로 가서 여가수 웰든(Mrs. Weldon)이 세운 성악학교에서 일하면서 합창단을 조직하여 음악회를 열었다. 빠리 음악원이 작곡가 오베르(D. Fr. E. Auber)가 죽자 그의 후계자로 오기를 청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1974년 그는 프랑스에 돌아왔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는 거의 예외 없이 교회음악만을 썼다.
그의 가장 대중적인 음악은 바하의 知?1권 C장조 프렐류드에 붙인 선율이다. 그는 소프라노, 바이올린, 풍금을 위한 이 곡에 {바하의 1번 프렐류드 위에 얹은 명상곡}(Méditation sur le 1er Pr lude de Bach, 1859)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사로는 [아베 마리아]가 붙여졌다. 마치 한 사람이 작곡한 듯 무리 없?작곡된 이 곡은 세계적으로 널리 연주되어 영화를 누린 만큼 "순수하지 못한 음악"(musique impure)이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구노는 12개의 오페라, 15개의 미사, 5개의 오라토리오(레퀴엠 포함) , 2개의 심포니, 196개의 멜로디(프랑스식 가곡) 등을 남겼다.
구노는 아직도 연주되는 두 개의 심포니(D장조/Eb장조)를 썼는데, 이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고전적인 심포니을 계승하는 것으로, 이태리 음악 중심의 프랑스 음악계에 새로운 기악 전통을 세운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통은 그 이후 프랑스적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그가 기악에 기울인 관심은 한계가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빠리에서 작곡가로서 이름을 알리려면 오페라를 쓰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는 당시 유행하던 그랑(Grand) 오페라 풍의, 외형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자제하고 내면적이고 선율적인 면을 상승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그랑 오페라에 길들여진 빠리의 청중들은 그의 {파우스트}를 보고 처움엔 낯설어했으나, 점차 익숙해지면서 구노에게 커다란 성공을 안겨주었다. 후기에 쓴 그의 작품들은 초기의 것보다 더 단순하여졌고, 감상적인 선율과 비슷한 기법의 남용으로 인해 진부한 인상을 준다. 19세기의 "프랑스적" 음악으로 평가되는 그의 음악은 마스네, 드뷔시, 라벨 등 후에 오는 프랑스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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