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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선 [Dongsun(Tongson) Tsc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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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선(蔡東鮮, 독일어식 표기: Tongson 또는 Dongsun Tschae, 1901. 6. 11 벌교 - 1953. 2. 2.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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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했는데, 부친은 전라남도 보성군[벌교읍]의 부호였던 채중현[蔡重鉉]이었다. 1915-1919년 제일고보(경기고교)에 다니면서 홍난파에게 직접 바이올린을 1년 정도 배웠다. 1919년 3ㆍ1운동에 참가한 일로 인해 학교를 그만 두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4년간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바이올린도 배웠다. 1925-1926년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Stern’sches Konservatorium der Musik)에서 하르처(R. Hartzer)에게 전공으로 바이올린을, 클라테(W. Klatte)에게는 부전공으로 작곡을 사사했다. 1926년 귀국 후에는 연주, 창작활동, 그리고 교육(연희전문학교 등)을 병행했다. 1929-1939년 네 차례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다. 1930년대에는 ‘채동선 현악4중주단’을 결성했다. 억압적 일제 말기인 1940년대 초부터는 모든 대외적 활동을 중단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악과 민요를 채보했다. 해방과 함께 다시 작곡과 사회활동을 펼쳤다. ‘고려음악협회’(1945)와 ‘고려합창단’(1948)을 창설했다. 1953년 부산에서 사망했다.


채동선은 생애의 대부분을 일제 치하에서 보낸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작곡가였다. 그의 인생역정과 생활신조, 창작활동과 음악운동가로서의 사회활동 등은 그를 현대적 민족음악 수립의 선구자 대열에 세우는데 충분했다. 그러나 현실은 오랫동안 그렇지 못했다. 채동선이 한국인들에게 널리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된 이유는 주로 그의 가곡 때문인데, 그 대부분의 작품이 납북된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어서 오랫동안 빛을 볼 수 없었다. 1964년에 개작된 노랫말로 비로소 첫 작품집이 출간되고, 1980년에 역시 많은 노랫말의 개작에 의해 두 번째 작품집이 나옴으로써 그의 음악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고, 채동선의 가곡들이 완전한 모습으로 불리게 되는 것은 정지용 시에 대한 해금 조치가 내려진 1988년부터였다. 1993년에 발간된 채동선 작품집을 통해 마침내 정지용의 시가 모두 복원되었다.

채동선의 작곡 활동은 따라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929-1939년으로, 가곡이 작품이 많은 시기.

-제2기는 1940년대 국악과 민요의 채보에 몰두한 시기.

-제3기는 1945년 이후 애국노래와 칸타타, 그리고 민요 편곡이 많은 시기. 채동선의 시기별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곡목 앞에 ⌵ 표시가 있는 곡은 현재 출판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그리고 * 표시는 필사본조차 공개되지 않았거나 분실된 경우를 의미하며, 노래와 가곡에서는 괄호 안에 작사자가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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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도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가곡 가운데 ≪다른 하늘≫(정지용)은 독창곡과 혼성4부 합창곡이 있고, ≪우리 태극기≫는 혼성4부합창곡과 관현악 편곡이 있다. 그리고 정지용의 시를 노랫말로 하는 가곡 가운데 5곡은 한 동안 다른 시로 불려진 바 있다. 즉, ≪고향≫은 ≪그리워≫(이은상) 또는 ≪망향≫(박화목)으로, ≪또 하나 다른 태양≫은 ≪또 다른 나의 세계≫(모윤숙)로, ≪바다≫는 ≪갈매기≫(이은상)로, ≪풍랑몽≫은 ≪동해≫(이은상)로, ≪낙화암≫은 ≪내 조국≫(이은상)으로 통용된 것이었다.

채동선의 창작곡은 주로 가곡과 애국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실내악 작품들은 아직도 필사본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순수 관현악곡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국악 채보와 민요 편곡들은 한 동안 맥이 끊겼던 우리나라 음악을 복원한다는 것 이상의 의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출판된 채동선의 가곡은 12곡으로서 피아노 반주를 수반하는 독창곡들이었다. 모두 제1기에 속하는 이 작품들의 경향은 기본적으로 서양의 낭만주의적 어법을 따른 것이었으나, 그 핵심은 민족적 정서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가곡 ≪고향≫을 비롯한 대부분이 이 범주에 속했다. 이 가곡은 당대의 다른 작곡가의 가곡과 구분되며, 또한 상대적으로 대중성을 지향한 본인의 후기 애국적 노래들과도 뚜렷이 구별되었다. 즉, 전체적 길이가 상당할 뿐만 아니라, 다수가 일관작곡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선율이 부분적으로 재현되는 경우에도 대개 매우 유연하게 취급되어 있어 반복으로 보기에 애매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크게 솟구쳤다가 점차로 떨어져 내려오는 선율의 움직임, 낭송적 진행, 멜리스마, 페르마타 등은 가사의 표현뿐만 아니라, 노랫말이 갖는 음절 배열의 불규칙성을 유연하게 만드는 독특한 역할도 하고 있다. 그러나 전형적인 고전 시대의 가곡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조성・화성, 그리고 특히 반주부를 통해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주고 리듬에 의한 친근성도 갖추어져 있다. 박자도 한국 전통음악의 전형적인 6/8 박자가 12곡 중 7곡에서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김미옥.“채동선의 삶과 음악.” 『음악과 민족』28, 부산: 민족음악학회, 2004, pp.42-65.

“정지용 시에 곡붙인 채동선 악보 전시.” 「동아일보」, 1988. 3. 5.

“정지용 시에 곡붙인 채동선 가곡 원본전.” 「중앙일보」, 1988. 3. 5.

홍난파. “채동선의 제금독주회를 앞두고.” 「동아일보」, 1929. 11. 29.


[김미옥]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채동선(蔡東鮮, 1901-1953)


- 1901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부친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의 부호였던 채중현[蔡重鉉]). 좋은 가정환경 덕에 당시로서는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음. 1915년 순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기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를 진학하여 1919년까지 수학함. 고교시절 홍난파에게 직접바이올린을 1년 정도 배움.

- 3ㆍ1운동에 참가한 일로 인해 학교를 그만 둔 후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4년 동안 개인적으로 바이올린을 배움.

- 1925-1926년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Stern’sches Konservatorium der Musik)에서 하르처(R. Hartzer)에게 바이올린을, 클라테(W. Klatte)에게는 부전공으로 작곡을 사사. 슈테른 음악원의 당시 연감(Jahresbericht)을 보면 그의 바이올린 선생은 반 라르(van Laar)로 되어 있다. (슈테른 음악원은 바이올리스트 슈테른’Julius Stern’에 의해 1852년에 설립된 학교로서 후에 제국 수도 음악원’Konservatorium der Reichshauptstadt’, 시립 음악원’Stadtisches Konservatorium’ 등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66년 음악대학’Hochschule fur Musik’으로, 현재는 종합예술대학’Universitat der Kunste’가 되었다.)

- 1926년 귀국 후에는 연주, 창작활동, 그리고 교육(연희전문학교 등)을 병행함.

- 1929-1939년에 걸쳐 네 차례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함.

- 1930년 동생 채선엽(蔡善葉, 당시 이화여전 학생, 후에 같은 학교 성악 교수)과 동기생이었던 이소란(李小蘭)과 결혼했다.

-1930년대 즈음 ‘채동선 현악4중주단’을 결성하여 이영세(李永世), 나운영(羅運榮), 윤낙순(尹樂淳) 과 함께 연주활동을 하였다.

- 일제 말기인 1940년대 초부터는 모든 대외적 활동을 중단하였는데, 이는 일제와 타협하지 않기위한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대학 강의를 중단한 후 화훼 농사를 하며 생활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악과 민요를 채보했다(대다수가 아직 정리ㆍ출판되지 않은 상태이다).

- 해방과 함께 다시 작곡활동을 펼침. 애국적인 곡들을 작곡하고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위한 한국민요 편곡에 주력했다. 음악인들을 결집하여 <고려음악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으로 일했고(1945), <고려합창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1948). 또한 <한국문필가협회> 부회장(1947), <고려작곡가협회> 회장(1947), 서울특별시 문화위원(1947), 문교부 예술위원(1949), 국립극장 운영위원(1950), 국악원이사(1950), 예술원 위원(1952) 등으로 일했다. 경기여고, 서울대 상과대학, 숙명여대에서 독일어와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 1953년 부산 피난지에서 막노동의 힘든 생활 가운데 복막염을 얻어 죽음.

- 1979년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채동선의 음악은 그의 활동에 따라 세 시기로 나뉜다. 또한 이 시기들은 각각 특정한 장르로 대표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제1기는 1929-1939년으로, 독일에서 돌아와 바이올린 주자와 작곡가로 활동하는 시기로서 주로 가곡을 작곡했다. 제2기는 1940년대의 은둔시기로서, 국악과 민요의 채보에 몰두하던 시기이다. 그리고 제3기는 해방과 더불어 합창(애국노래와 민요 편곡들)과 칸타타들을 주로 내놓는 시기이다. 이 노래들은 피아노뿐만 아니라 취주악 또는 관현악 반주가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다수의 곡에 정확한 작곡연도가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시기별로 그가 몰두했던 장르들을 고려해 볼 때, 작곡시기 추정이 가능하다.


채동선은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는 아니다. 독일 유학 후 그는 한국에 돌아와 몇 개의 기악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은 출판된 일이 없이 아직도 필사본 상태로 남아 있는데, 독특한 내용의 것은 아니다. 이 곡들은 전고전주의 음악이나 가벼운 모차르트를 연상하게 한다. 삼화음의 음들을 따라가는 방식의 선율 진행, 비음계음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손쉬운 진행을 보이는 성부들, 고전음악의 전형적 꾸밈음들을 사용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1937년의 작품인 『현악4중주 제1번』(G 단조),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은 『현악4중주 제2번』(G장조)을 썼는데, 이는 습작이라는 일면도 있지만, 당시 한국의 연주 수준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이 현악사중주는 당시 한국에서 거의 작곡되지 않았던 새로운 장르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Concert fur Streichorchester in Klassischer Form』(Op. 9)도 음악적으로 현악사중주 곡들과 거의 비슷한 성격의 곡이다.


채동선이 작곡가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은 그의 가곡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의 가곡들이 납북된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어서 오랫동안 원 가사로 불릴 수 없었다. 일제시대에 작곡한 것으로 출판이 확인된 것은『채동선 독창곡 작품 제5번』(1937)에 실린 《향수》, 《구천》이 있고, 『채동선 독창곡 작품 제7번』(1937) 에 실린 《다른 하늘》(정지용), 《또 하나 다른 태양》(정지용) 등이다. 작품번호 1번부터 4번은 확인된 바는 없으나, 그것들 역시 가곡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 후 채동선의 가곡들은 1964년 첫 가곡집이 출간되었는데, 정지용이 쓴 가사는 개작되었다. 1980년 개작된 노랫말의 상태로 두 번째 가곡집이 나왔다. 그의 가곡들이 완전한 모습으로 불리게 되는 것은 정지용 시에 대한 해금 조치가 내려진 1988년부터이다. 1993년에 발간된 채동선 작품집을 통해 마침내 정지용의 시가 모두 복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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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고향』(정지용 시)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가곡이다(이 곡은 시인 정지용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지는 1980년대 말까지 이은상 작사 《그리워》, 박화목 작사 《망향》으로 바뀌어 불렸다). 이 곡은 당시의 작곡가들, 예를 들어 홍난파나 현재명과 같은 불과 한두 페이지 짜리의 가곡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 길이도 그러하지만 부정형한 가사를 선택한 것과 그것을 음악으로 만드는 방법이 그 때까지의 것과는 달랐다. 그의 가곡들은 거의 일관작곡된 방식의 것이었다. 그리고 장절가곡에서처럼 흔히 나타나는 반복적 선율도 흔히 볼 수 없다. 『고향』에서는 첫 부분의 선율이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에서 반복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반복 없이 줄기차게 단조의 음계를 타고 “돌아다니는” 성격을 보여준다. 즉 선율이 음계에 주어진 성격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주가 끝나고 1옥타브로 도약(미-미)하고, 짧은 첫 간주가 끝나고 1옥타브로 도약하는 것(솔-솔)이 곡의 상승적인 작용을 하게 한다. 크게 솟구쳤다가 점차로 떨어져 내려오는 선율의 움직임은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실망을 말하는 가사와 잘 맞는다. 음절수가 일정하지 않은 가사는 대체로 두 마디 단위로 정리되지만, 한번 예외적으로 3마디 단위가 된다(“머언 하늘만 떠도는 구름”). 따라서 그의 음악은 매우 파격적인 성격의 것은 아니다. 단지 불규칙한 음절수를 두 마디 단위에 맞추면서 규칙적인 음절수를 가진 가사를 사용한 음악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두 마디 안에서의 음절 배열의 불규칙성이 리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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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음악에는 두 가지 리듬이 공존한다. 하나는 마디구분에 따른 올림박적인 리듬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에 따른 리듬이다. 언어의 리듬은 3,2,3의 기본틀이 약간씩 변형되며 구성된다. 이런 가사배열은 이 작품 이후로도 본인이나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도 거의 보기 어려운 구성이다. 행이 바뀌는 부분들이 숨쉬기에는 너무 짧은 경우들이 많은데, 이는 페라마타로 처리되며 그 어려움을 피한다.

채동선의 다른 가곡들은 『고향』처럼 성공적인 경우는 드물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가 기악가라서 성악적인 고려를 덜한 것 때문으로 여겨진다. 즉 숨쉬는 데 대한 고려가 약한 편이다. 하지만 그의 가곡은 전반적으로 당대의 다른 작곡가들의 것에 비해 가사의 선택이나, 곡의 규모에서 앞선 내용을 보여준다.

그가 한국민요의 채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 말경이며, 그 작업이 해방 이후까지 지속된다. 그의 채보는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 음악의 장단을 먼저 파악하여 그 바탕 위에 채보하여 당시와 해방 후에 있었던 -장단을 고려하지 않는 다른 작곡가들의- 채보보다 본래의 한국음악과 더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별유천지(別有天地)』, 『추월강산(秋月江山)』, 『흥타령』, 『둥가타령』, 『진국명산(鎭國名山)』, 『승평만세지곡(昇平萬歲之曲)』 (與民樂), 『농부가(農夫歌)』 『기생점고(妓生點考』, 『오리정(五里亭)에서』, 『일절통곡(一切痛哭)』, 『적성가(赤城歌)』, 『신당 춘향(新堂 春香)을 부름』과 같은 민요, 판소리, 궁중음악들은 결코 채보가 용이하지 않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러한 채보는 단순히 전통음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곡들을 상당 부분 합창곡으로 또는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였다. 그가 채보한 음악 중에는 판소리 『춘향가』의 여러 부분들이 들어 있다. 그는 이 곡들을 임방울과 이화중선의 음반을 토대로 채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이름이 채보용 악보에 적혀 있기 때문이다. 채동선이 채보한 초고들에는 위에 적힌 곡들 이외의 것들도 있다. 이러한 예로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하는 『일필휘지』 노래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채보하는 도중에 그는 선율 밑에 화음을 붙여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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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황으로 볼 때에 그는 『춘향가』 전곡을 채보하여 거기에 화성을 붙이려는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한국 전통음악에 그가 붙인 화성들은 전통적 서양음악의 방식이다. 따라서 그는 아직 한국 선율에 맞는 한국식의 화성을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당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비교하면 어느 누구보다도 한국 전통음악을 가까이했고, 또 익숙했다고 할 수 있다.


채동선의 애국적 칸타타들은 오히려 더 쉬운 노래와 같은 틀을 바탕으로 하여 거기에 약간의 변주적 요소들을 첨가시켜 음악을 꾸려간다. 채동선의 『한강』중 첫 번째 곡 「한강수」의 전주 부분은 7음음계를 명확하게 사용하지만 오음음계 밖의 음들은 약박에서만 스치듯 지나간다. 즉 중심에는 오음음계가 있다. 시작하는 4도 도약이 한국 민요에서 자주 보는 성격의 것이지만 못갖춘마디 음악이다. 화성이, 특히 종지 부분의 명확하게 반영된 선율 특징을 갖고 있다. 듣기에 따라 전통음악적 성격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느낌을 준다.

『한강』중 두 번째 음악인 「불멸의 노래」는 서양식 7음음계 음악이다. 가사는 민족적이다. 채동선이 스스로 쓴 가사는 이 땅을 창조한 “임”을 중심으로 얘기된다(첫 번째 곡 한강수, “이 땅 위에 임께서 이 백성을 내시고”). 그리고 이 두번째 곡 전체 가사는 연애담처럼 서술되지만 빼앗긴 한강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우리는 한갓 임께 무릎 꿇어 참회의 노래를 올리노라”고 말한다.

『한강』 중 세 번째 곡 Waltz and Barcarolle는 『호프만의 이야기』(오펜바흐 작곡) 중의 잘 알려진 《뱃노래》와 부분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어 두 번째 박을 계속적으로 쉬는 부분이 그러하다. 왈츠 풍의 음악에 장단 구음 “궁덕덕”(예: 59-70의 남성성부)을 붙인 것은 작곡가가 이 음악을 단지 서양풍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리듬도 곁들여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한강』중 Barcarolle는 곡목이 서양어로 되어 있으나 완연히 전통음악적이다. 판소리 장인들이 부르는 장식 많은 노래에 가깝다. 기본 장단 위에 상당히 자유로운 리듬이 구사된다. 오음음계도 벗어난다. 시김새적 장식요소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채동선는 서양식 음악과 한국의 전통음악을 접합시켜 칸타타라는 다악장의 음악을 구성하였다. 그가 구사한 만큼의 전통음악의 작곡적 구사는 그의 세대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칸타타 『조국』은 행진곡 풍의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전통음악과는 무관한 곡이다. 이것 역시 가벼운 변주를 통해 약간씩 모습을 바꾸며 음악을 꾸민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려는 작곡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자필본으로만 남아있는 애국적 칸타타 『독립축전곡(獨立祝典曲)』 역시 비슷한 종류의 대편성의 음악이다. 한편으로 그는 우리민요를 대편성의 관현악과 혼성합창곡으로 만들었다. 『진도 아리랑』, 『도라지타령』, 『뱃노래』가 그것들인데, 모두 조국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대규모의 음악이었다.


채동선의 음악은 불과 세 살 위의 홍난파 것과 비교하면 더 발전된 모습이다. 하지만 홍난파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우선적으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따라서 그도 많은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의 작곡가들 중에는 가장 기대할만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이른 죽음은 그를 한국음악사의 아쉬운 부분으로 남게 하였다.


참고문헌


김미옥. “채동선의 삶과 음악.” 『음악과 민족』28, 부산: 민족음악학회, 2004, pp.42-65.

“정지용 시에 곡붙인 채동선 악보 전시.” 「동아일보」, 1988. 3. 5.

“정지용 시에 곡붙인 채동선 가곡 원본전.” 「중앙일보」, 1988. 3. 5.

홍난파. “채동선의 제금독주회를 앞두고.” 「동아일보」, 1929. 11. 29.

홍정수. “일관작곡가곡의 한국어”, 음악과 민족 제37호, 2009, 97-134.

홍정수. “한국음악의 관점(3): 민족성”, 음악과 민족 제33호, 2007, 9-69.

Stern’sches Konservatorium der Musik Gustav Hollaender(Direktor: Alexander von Fielitz): Jahresbericht uber das 76.Schuljahr 1925-1926.


등록일자: 2010.7.23

[홍정수/김미옥]


채동선의 작품목록과 출판된 악보


(1)작품들


가곡

『향수』 Op. 5/1, 정지용 시.

『압천』 Op. 5/2, 정지용 시.

『고향』 Op. 6/1, 정지용 시.

『산엣색씨, 들녘사내』 Op. 6/2, 정지용 시.

『다른 하늘』 Op. 7/1, 정지용 시. 독창용과 혼성 4부합창용이 있다.

『하나 다른 태양』Op. 7/2, 정지용 시, 한 때 「또 다른 나의 세계」(시: 모윤숙」로 통용됨.

『바다』 Op. 8/1, 정지용 시, 한 때 「갈매기」(시: 이은상)로 통용됨.

『풍랑몽』 Op. 10/1, 정지용 시, 한 때 「동해」(시: 이은상)로 통용됨.

『내 마음은』, 김동명 시. 『그 창가에』, 모윤숙 시.

『낙화암』 Op. 10/2. 정지용 시, 한 때 「내 조국」(시: 이은상)으로 통용됨.

『새벽별 잊고』 Op. 10/3, 김상용 시.

『모란』 Op. 10/4, 김영랑 시.

『진주』, 한용운 시.(4부합창)


애국적 노래


『한글 노래』 (이극로 시)

『한건님』

『입성가(入城歌)』

『三一節의 노래』.

『우리 태극기』(혼성 4부합창)

『태극기 노래』(앞의 것과 같은 음악이지만 관현악으로 편곡)

『선열추모가(先烈追慕歌)』

『개천절(開天節)』

『독립축전곡(獨立祝典曲)』

『무궁화노래』(혼성 4부합창)


기악곡


1. 현악 4중주 제1번. G단조, Op. 3 자필본. 악보의 끝에 23 Mai 1937이라는 기록이 있음.

2. 현악 4중주 제2번 G장조(미완성)

3. 바이올린 독주곡 <카프리스(Caprice)> (바이올린 환상곡 라단조) (1939)

4. 현악 조곡

5. Concert fur Streichorchester in Klassischer Form, Op. 9 (1940년 추정).


칸타타


『조국(祖國)』, 해방 직후에 쓰여진 것.

『한강』, 해방 직후에 쓰여진 것.


한국민요 편곡


『진국명산(鎭國名山)』, 피아노 반주, 1949.

『둥가타령』, “남한산성 올라가”로 시작하는 노래, 혼성 4부합창으로 편곡하고 피아노 반주를 붙임. 1948.

『흥타령』, 혼성 4부합창으로 편곡하고 피아노 반주를 붙임, 1948.

『새야새야 파랑새야』(독창).

『새야새야 파랑새야』(혼성 4부합창).

『서울 아리랑』(혼성 4부합창)

『진도아리랑』(혼성 4부합창)

『도라지타령』(혼성 4부합창)

『진도 아리랑』, (혼성 4부합창 관현악 반주).

『도라지타령』, (혼성 4부합창 관현악 반주).

『뱃노래』, (혼성 4부합창, 관현악 반주).

6. 『육자백이』

7. 『천봉만악(千峰萬岳)』 피아노 반주.

8. 『진국명산』 피아노 반주.

9. 『산령산(山靈山)』

10. 『중령산(中靈山)』

11. 『군악령산(軍樂靈山)』

『군악(軍樂)』


⊙ 국악채보

『별유천지(別有天地)』

『추월강산(秋月江山)』

『홍타령』 『기생점고(妓生點考)』

『승평만세지곡(昇平萬歲之曲)』 (여민락)

『농부가(農夫歌)』

『오리정(五里亭)』

『일절통곡(一切痛哭)』

『적성가(赤城歌)』

『신당 춘향(新堂 春香)을 부름』


(2)출판된 악보


『채동선 독창곡 작품 제5번』 ‘향수’, ‘구천’, 공묵제, 소화 12년(1937)

『채동선 독창곡 작품 제7번』 ‘다른 하늘’(정지용), ‘또 하나 다른 태양’(정지용), 공묵제, 소화 12년(1937)

『三一節의 노래』, 혼성합창과 피아노 반주를 위한 곡 (자필본의 복사), 채동선(작사), 연대 미상.

『선열추모가(先烈追慕歌)』, 혼성 4부합창, 조지훈(작사), 韓國義士團(발행), 1947.

『개천절(開天節)』, 혼성 4부합창, 채동선(작사), 興樂院(발행), 1947.

『한글노래』, 자필본, 성악 1성부와 피아노 반주 붙음, 이극노(李克魯) 작사로 되어 있고. 가사는 아직 기입하지 못한 상태.

『독립축전곡(獨立祝典曲)』, 채동선(작시) 大管絃樂 伴奏 付 混聲合唱曲, 蔡東鮮 採譜編曲, (자필본 총보), 하나의 겉장의 묶인 이 악보는 “吹奏樂伴奏”용과 관현악 용의 두가지 편성이 있다.

『현악 4중주 제1번』. G단조, Op. 3 자필본. 악보의 끝에 23 Mai[5월] 1937이라는 기록이 있음.

『Concert fur Streichorchester in Klassischer Form』, Op. 9 (1940년 추정), (자필본 복사).

『진도 아리랑』, 大管絃樂 伴奏 付 混聲合唱曲, 蔡東鮮 採譜編曲, (자필본 총보)

『도라지타령』, 大管絃樂 伴奏 付 混聲合唱曲, 蔡東鮮 採譜編曲, (자필본 총보)

『뱃노래』, 大管絃樂 伴奏 付 混聲合唱曲, 蔡東鮮 採譜編曲, (자필본 총보)

『조국(祖國)』, 연대 미상의 자필본 총보, 이 곡은 「대한만세」, 「민족의 기원」, 「광복행진곡」, 「개선합창곡」으로 짜여짐. 최동선이 만든 것이라기 보다는 후에 어떤 연주단체에서 지휘자 용 정도로 만든 것으로 보임. 이 곡은 이미 발표된 다음의 혼성4부 합창곡들을 바탕으로 관현악 반주를 붙여 만든 것이다. 「조선만세」 (서곡) Op. 11/1, 「조선진혼곡」 Op.11/2, 「개선합창곡」 Op. 11/3, 「건국행진곡」 Op. 11/4, 「선열추모가」(조지훈 시).


『채동선 가곡집』(편찬대표: 박태현), 세광 출판사, 1964.

『정지용 시 채동선 작곡 독창곡집』, (정지용 악보 전시회의 팜플렛), 객석, 1988.

『그리워』 채동선 작품집 , 수문당, 1980.

『한강』 채동선 합창곡집 칸타타 (편: 채동선 기념사업회), 세광출판사, 1983.

칸타타 『한강』은 한강수, 불멸의 노래, Waltz and Barcarolle의 3곡으로 되어 있으면 이 악보는 피아노 반주만 제공되고 있음. 이 책에는 칸타타 피아노 반주 붙은 칸타타 『조국』도 실려 있다.

『고향』채동선 작품집 제2집 , 수문당, 1993. 이 작품집에는 채동선의 작은 성악곡 대부분이 원래의 가사 그대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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