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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톡,벨라 [Béla Bartó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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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바르톡(Béla Bartók 1881년 3월 25일-1945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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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바르톡은 1881년 3월 25일 헝가리 남쪽에 위치한 나지스첸티미클로스(Nagyszentmiklós, 지금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출생하였다. 피아노 선생이었던 어머니에게서 처음으로 바르톡은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바르톡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가족과 함께 프레스부르크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라스쯔로 에르켈(Laszlo Erkel)에게서 작곡기초를 배웠다. 그는 이러한 음악 교육적 환경 속에서 8살의 나이로 첫 번째 작곡을 시도하였고, 10살에는 피아니스트로서 첫 번째 공개 연주를 하였다. 1899년부터 1904년까지 부다페스트의 음악학교에서 한스 쾨슬러(Hans Koeßler)에게 작곡을, 스테판 토만(Stefan Thóman)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부다페스트에서의 그의 학업이 거의 끝나는 시기이었던 1903년 이래로 바르톡은 피아니스트로서 베를린과 멘체스터 등의 유럽무대에 진출하였다. 1907년부터 1934년까지 모교에서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편으로는 자유 창작 작곡가로서 그리고 민속학 연구학자로서 부다페스트에 주거지를 두고 활동하였다. 창작활동을 뒤로 밀려나게만든 그의 민속음악에 대한 연구는 1905년 이후부터 아주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바르톡은 친구인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와 함께 '농부음악(Bauernmusik)'을 수집하기 위해 헝가리의 시골지역을 여행하였다. 민속음악 채집을 위한 여행은 루마니아 북부지방(Siebenbürgen), 서남아시아 그리고 이집트로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그의 연구활동과 함께 그의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민속음악에 대한 연구는 차차 자신의 작품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바르톡의 작곡가로서의 커다란 성공은 그의 유일한 오페라인 『푸른 수염 공작의 성 Herzog Blaubarts Burg』이 1918년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면서 이루어졌다. 1923년에는 부다(Buda)와 페스트(Pest)의 합병 50주년을 위한 연주회에서 바르톡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무용 모음곡 Tanzsuite』 은 코다이의 『헝가리 시편 Psalmus hungaricus』과 함께 초연되었다. 1933년 이래 정치적 혼란의 결과로서 독일의 민족 사회주의는 팽창하였고, 그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그 시대의 예술가들과 같이 바르톡도 아주 어려운 정신적 압박을 받았다. 나찌정책은 그에게 모든 예술적 기반(스위스와 영국에도 적용된)을 빼앗아갔으며 결국 그는 1940년 미국으로의 이주를 자발적으로 결정하였다. 미국에서 그는 연주생활, 대학에서의 교육자로서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또한 작품위촉을 받았다. 1943년 1월 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마지막 무대를 가졌고, 그의 인생의 말년은 생활고와 계속 악화되는 지병(악성 백혈병)에 의해 검?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침내 바르톡은 1945년 9월 26일 뉴욕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속음악 연구가와 피아니스트로서의 음악적 업적과 더불어 그의 작곡가로서의 위치는 최老?20년대의 후반부터 현대를 이끄는 작곡가들 가운데 한명으로 인정을 받았을 정도로 20세기 음악사에서 중요하다.

 아놀드 쇤베르크(A. Schönberg) 그리고 이골 스트라빈스키(I. Strawinsky)와 함께 20세기 음악어법의 발견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발휘한 작곡가로 인정받는 바르톡은 헝가리에서 독일 음악의 정신 속에서 자라났다. 독일 음악의 유산 속에서 시작한 그의 작곡경향은 그의 젊은 시절의 작품들로서 그는 프란츠 리스트(Frnaz Liszt)와 미햐일 모조니(Mihály Mosonyi, 1815-1870)의 음악적 유산에 접근하였다. 그후 바르톡은 리햐르트 스트라우스(R. Strauss)의 교향시에 의해 결정적인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1905년 파리에서 드뷔시(C. Debussy)의 음악을 접함으로서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만난다. 특히 바르톡은 드뷔시의 음악에서의 동양과 서양의 음악적 요소(5음음계, 전음음계, 반음계)에 의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같은 해에 그는 음악 속에서 헝가리적인 특별함을 창작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헝가리 민요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러한 사고와 스트라우스의 영향하에서 바르톡은 1903년 교향시 『코주스 Kossuth』를 작곡하였고 1904년 리스트에 여전히 머물러있는『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랩소디 Rhapsodie für Klavier und Orchester』op. 1(1905년 파리에서 개최된 루빈스타인 콩쿠르 출품작)을 작곡하였다. 순수하게 음악적 관점에서 시작한 헝가리 농부음악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의 장조와 단조 구조의 주도권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의 가능성을 그에게 제공하였다. 1907년 바르톡은 드뷔시의 음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고, 그 연구의 결과로서 드뷔시 음악의 선율에서 헝가리의 민속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5음음계의 사용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유추하였다. 민속음악의 연구와 작곡가로서의 유럽음악에 대한 그의 연구 그리고 창작생활의 병행은 1912년을 시점으로 민속음악 연구로의 한길로 접어들었다. 1921년까지 다루어진 바르톡의 짧은 전기를 통하여 살펴본 그의 음악세계에서는 민속음악과 전통 서구음악의 영향이 그의 작품 속에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영향은 바르톡의 독창적이고 새로운 작곡기법으로 자리바꿈하고 그의 작곡기법은 20세기 음악의 작곡기법으로서 그 중요성을 갖는다.

 바르톡의 모든 작품은 그의 인생경로를 네 개의 시기로 나누는 것과 같이 네 개의 창작-어법의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코주스 Kossuth』(1903)까지의 후기낭만주의적 경향의 초기, 『놀라운 만다린 Wunderbare Mandarin』 (1919)까지의 상징주의적-초기 표현주의적 시기, 『현악기, 타악기 그리고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Musik für Saiteninstrumente, Schlagzeug und Celesta』 (1936)까지의 표현주의적-구성주의적 시기 그리고 『제3번 피아노 협주곡』(1945)까지의 구성주의적-신고전주의적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차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20년 동안에 바르톡의 작곡어법은 펼쳐졌고 확립되었다: 5음음계적-선법적 선율, 선적 대위법, 12음에 의한 회전하는 반음계, 무조적 소음의 색채, 헝가리적-폴리메트릭에 의한 리듬충돌, 잠재적인 신고전주의적 교량형식을 바르톡의 고유 작곡어법으로 들 수 있다.

 또한 위의 시기구분에 의한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시기는 원시적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민속주의(Vitalismus), 표현주의 그리고 구성주의 사이에서 변증법적으로 펼쳐진 시기로 묶어 볼 수도 있다. 이 시기는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로 바르바로 Allegro barbaro für Klavier』(1911)를 그 시작으로 『목각 인형 왕자 Der Holzgeschnitzte Prinz』(1916), 『놀라운 만다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1921/22), 『제1번 피아노 협주곡』(1927) 그리고 현악사중주 제3번(1927)과 제4번(1928)을 포함한다. 이 시기에 바르톡은 리듬과 색채에 있어서는 변화하지 않은 자신의 어법에 머물러 있었지만 세포핵 선율(Zellkernmelodik)과 범 반음계법(Panchromatik)은 쇤베르크 학파의 선율조직과 연결하였다.

 바르톡 인생의 마지막 십년에 해당하는 그의 마지막 창작시기는 이미 1930년 작품인 『세속적 칸타타 Cantata profana』로 예견되었고 세 개의 바젤 위촉작품인 『현악기, 타악기 그리고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1937) 그리고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디베르티멘토』(1939)로 인해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들로 인하여 바르톡은 바흐의 대위법에 영향을 받은 마지막 시기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바르톡은 제5번 현악사중주를 그 시작으로 자신의 마지막 창작시기에 강하게 나타난 바흐(대위법), 베토벤(발전형식, Entwicklungsform) 그리고 드뷔시(화음, Akkordik)의 합성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바르톡은 바흐, 베토벤 그리고 드뷔시를 "3인의 고전주의(drei Klassiker)"라고 명명하였고 나아가 그들의 음악을 "하나의 합성으로 귀결하고 그것을 현대를 위하여 생명력있게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1939년 Serge Moreux와의 대담에서). 

 장르사적 측면에서 바르톡의 6개의 현악사중주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6개의 현악사중주는 음향언어적(klangsprachlich)으로 전통으로부터 뗌愍岵막?분리되어진다: (1) 작곡기법(특히 1927년 작곡된 제3번 현악사중주에서 본보기적으로 정제된)을 통하여 구조적 연관성이 형성되어 진다. 그러한 연관성의 긴장은 (2) 수많은 대조적 요소(리듬, 다이내믹, 속도, 관현악법에서)와 (3) 비전통적인 연주 기법("바르톡-피치카토", 글리산도)를 통하여 강하게 상승되어 진다.

        제1번 현악사중주 op. 7 (1908)              제4번 현악사중주 (1928)

        제2번 현악사중주 op. 17 (1915-17)          제5번 현악사중주 (1934)

        제3번 현악사중주 (1927)                   제6번 현악사중주 (1939)

 솔리스트와 관현악을 위한 바르톡의 작품들은 여전히 리스트의 그늘에 있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랩소디』op. 1(1904)과 관계를 맺고 있다. 처음의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1926, 1930/31)에서는 4개의 요소들이 이미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낭만적 비르투오조적 협주곡으로부터 분명하게 구분되어지는 스타일의 결과를 초래한다:

 (1) 다조성적, 당김음적 리듬과 박자의 변화가 풍부한 악곡은 동유럽적 그리고 아시아적 민속음악에서의 발견에 의해서 표현되었다. 리듬적으로-모터에 의해 움직이는 듯한 요소들은 (2) 바로크의 약동하는 협주곡-동작(Concerto-Motorik)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영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크적 본보기들은 게다가 리토르넬로적 악곡구조(제2번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제3악장)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방과 카논기법에 대한 호감 속에서 계속 작용하였다. (3) 협주곡을 위해 지금까지 낯선 관현악법적 착상들은 바르톡의 개인성을 추가적으로 입증한다 (예를 들어 제2번 피아노 협주곡의 제1악장: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4) 솔로부분의 취급은 협주곡이라는 장르에서 바르톡의 위치를 위해 결정적이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종종 타악기와 비슷하게 사용한다. 피아노와 (피아노에 가까이 세워진) 풍부한 타악기(예를 들어 제1번 피아노 협주곡의 제2악장) 사이의 대화하는 구조는 연주자에게 바로크의 전형적인 순수한 음향적-리듬적 집중을 요구한다.

『현악기, 타악기 그리고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1936)은 독특하게 배치되어진 오케스트라의 대칭적 배치를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그 작품은 바로크 콘체르토 그롯소 실체의 변화로서 파악된다.

협주곡들: "Rhapsodie" für Klavier und Orchester (1904)

        "Scherzo" für Klavier und Orchester (1904)

        1. Violinkonzert (1907/08)

        1. Klavierkonzert (1926)

        2. Klavierkonzert (1930/31)

        "Musik für Saiteninstrumente, Schlagyeug und Celesta" (1936)

        2. Violinkonzert (1937/38)

        3. Klavierkonzert (1945)

        Violakonzert op. posth. (1945, Fragment, vervollständig von T. Serly)

다양한 시기 구분을 가능케 하는 바르톡의 음악어법의 다양성에 의한 작품은 음악적 민속 유산의 아주 수준 높은 질의 자율적 예술작품으로의 창작적 혼합으로서 레오 야나첵(Leo? Janá?ek)의 작품들과 함께 모든 유럽적으로 그리고 특히 민속 음악적으로 규정되어지는 예술음악의 정상에 서있다. 바르톡의 수많은 피아노 교습을 위한 작품들 또한 그의 작품에서의 의미있는 업적으로 나타난다. 바르톡의 민속 음악 연구가로서의 학문적 업적은 국제적 위치를 보유한다.

민속노래 연구가로서 바르톡: 

     1905; 졸탄 코다이와 함께 헝가리의 민속노래 수집을 위한 첫 번째 여행. 계속적으로 그 여행은 슬로바키아 그리고 루마니아의 농부들의 노래(Bauernlieder)의 수집으로 그 영역을 넓혔다.

     1906; 슬로바키아 노래의 첫 번째 수집.

     1908; 루마니아 노래의 첫 번째 기록.

     1912; 러시아로의 연구 여행 계획.

     1913; 북아프리카에서의 민속 음악 연구. 루마니아에서의 민요 연구에 대한 첫 번째 출판은 학문적 평가를 받음.

     1934-1940; 헝가리 학술연구 협회의 커다란 민요 수집의 준비.

     1937; 앙카라에서 민요 연구에 대한 강의.

     1940;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명예박사.

     1941; 콜롬비아 대학에서 민요 자료의 평가/활용.

     1943;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

신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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