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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오즈 [Berlioz, Louis H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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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 12. 11 라 코트 생탕드레 - 1869. 3. 8 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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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아들로 처음에 의학 공부를 하였다. 그의 전세대인 글룩 그리고 후세대인 바그너나 쇤베르크처럼 그도 특별한 음악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며,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고 자라지 않았다. 취미 정도의 음악생활을 하던 그가 의학을 공부하러 19세의 나이로 빠리에 왔을 때, 그는 더 이상 의학에 관심이 없었고 오페라에 전적인 관심을 쏟았다. 빠리 음악원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으나 구태의연한 교수들과 음악적으로 자주 마찰이 있었다. 특히 음악원장이었던 작곡가 케루비니(1760-1842)와 의견 대립을 종종 보였다. 하지만 그의 자발적인 학습태도는 당시의 음악학교에서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던 베토벤의 작품들(후기 현악 사중주)까지 연구하게 했으며, 특히 음향을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악기법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의 악기법 책은 뒤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증보하여 지금까지 이 분야의 고전으로 쓰인다. 또 그는 문학적으로 많은 공부를 했으며, 이를 통해 음악학교를 통해 배우는 작곡법칙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문학적인 소질은 당대의 선배인 독일의 E.T.A. 호프만(1776-1822)에 견주어 진다(그도 호프만을 존경했던 것으로 보임). 그는 상당히 많은 글들을 썼으며, <회상>(1870), <오케스트라 저녁들>(1853)에는 당시의 음악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들어 있다. 

20대 중반까지 베를리오즈는 작곡가로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1827년 빠리에서 햄릿을 공연하던 영국 여배우 스미드슨을 짝사랑해 그녀의 거의 모든 공연을 관람하고 연애편지를 썼으나 답을 받지 못할 정도로 무명의 음악가였다. 유학의 혜택이 주어지는 로마의 작곡상을 받으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실패한 후, 마침내 1830년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으로 로마 대상을 받았다. 이어 자신의 애정 경험을 극적으로 엮은 <환상 교향곡>(1830)이 성공하면서 점차 뛰어난 오케스트라 언어를 구사하는 젊은 작곡가로 부상하였다. 로마 대상의 조건에 따라 3년간 이태리에 머물러야 하지만 그는 향수병을 견디지 못하고 18개월만에 빠리로 돌아오고 만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음악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유럽 여러 곳의 음악회를 주관하고 지휘하였다. 이와 더불어 리스트, 바그너, 슈만 등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들과 사귀게 되었고, 또 영향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많은 반대파를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문필가적 기질이 강한 그의 자유롭고 강한 비평활동 때문이었다. 또 당시의 청중이 그의 음악 수준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의 양식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너무 과격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케스트라의 언어적 표현력을 극대화시키면서 프랑스의 음악적 낭만주의를 사실상 주도했다. 특히 러시아의 청중들은 그의 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당시의 한 연주회에 1만 2천명의 청중이 몰리기도 함). 무쏘르그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작곡가들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베를리오즈의 과격한 악기법을 풍자한 그림>

실험정신이 강하고, 환상적이면서도 풍부한 베를리오즈의 작곡 아이디어는 개혁적인 악기사용과 표현력을 자극하는 표제적인 내용의 음악적 사용에 잘 나타난다. 대표적 예가 되는 <환상교향곡>은 음악외적인 것을 통해 강화된 음악적 상상력이 고전주의 교향곡의 틀을 뛰어 넘어 사실적 묘사와 함께 음악적 연관성을 갖는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음악외적 줄거리를 교향곡의 진행과 연결시켰고, 음악적 모티브들을 알맞게 특징화했다. 또 고전주의 시대의 테마-모티브 작업을 보다 극대화시켜 특정의 모티브가 일정한 아이디어를 표현하도록 성격화했다: "연인이 예술가에게 선율이 되고, 이것이 동시에 고정상념(ide'e fixe)이 되어 도처에 나타나 들리게 된다." -이러한 기법은 후에 바그너에게서 지도동기(라이트모티브, Leitmotiv)의 형태로 보다 세밀하게 조직된다.- 그의 다른 표제 교향곡들: <파우스트의 여덟 장면>(1828-29), <이태리의 해롤드>(파가니니를 위한 비올라 독주 부분을 넣음, 1834), <로미오와 쥴리엣>(독창과 합창, 1839), <죽음과 승리의 대 교향곡>(개선문 준공 축하 음악, 큰 오케스트라와 합창편성, 1840). 연주된 그의 오페라들은 세 개이다: <벤베누토 첼리니>(1834-37, 초연 1838 빠리),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1860-62, 초연 바덴바덴 1862), <트로야 사람들>(1856-58, 초연 바덴바덴 1859 -부분-, 빠리 1863 -II-, 칼수루에 1890 -I-). 그의 오페라들에서도 그의 실험적이고 대규모적인 악기법이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트로야 사람들>은 워낙 거대하고 까다로워서 축소되지 않고 그대로 연주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의 레퀴엠이나 테 데움, 오라토리오(<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1854) 역시 광대한 음향처리가 드러난다. 

베를리오즈의 작곡적 사고는 문학과 음악의 상호적인 "바꿔 표현하기"(Umschreibung) 또는 "번역"(Übersetzung)으로 집약된다. 그래서 일방적인 표제음악이 아니라 음악과 문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풀어나가는 작품구성이 관찰된다. 예를 들어 그는 한 음악작품에 대해 여러 가지 문학적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가 하면 또 여러 가지 문학적 연관성으로 작품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 외적인 프로그램은 음악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음악적인 바탕을 표제음악적으로 덧입히거나 그렇게 하도록 방임할 뿐이다. 즉,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왔든지 간에 그는 음악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그에게 음악외적인 프로그램은 음악의 중심적인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 생략될 수도 있다. 그는 환상 교향곡 서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심포니가 모든 극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음악적으로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기를 작곡자는 바란다." 베버(1786-1826)의 <춤으로의 권유>(op. 65)를 오케스트라로 편곡한(1841) 것에도 그의 음향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음악구성이 잘 드러난다. 거기에는 "춤 좀 추실까요?"라는 음악외적인 상상도 가능하지만, 이것은 이미 원곡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중심적인 것은 춤을 강화시키는 음향을 매개로 해 음악자체가 훨씬 "아름답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슬릭의 의미에서 "음악은 울리며 움직이는 형식"이라는 점이 손상되지 않으면서 '춤'이라는 감정적 분위기를 '음악적으로'고상하게 만든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춤에 대해서 음악이 아닌 다른 매체로서는 불가능한 그런 전달 효과를 나타낸다. 이렇게 그에게서 우리는 고전주의의 기악 전통을 이으면서 인간의 본질로서의 감정을 음악의 표현대상으로 살려내는 19세기 중반의 소위 "낭만주의" 음악관을 잘 읽을 수 있다. 

[주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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