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대(聖歌隊)
1. 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음악 순서를 담당하는 합창대. 한국 교회에서 성가대라는 명칭은 1945년 이후에 점차로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그 이전에는 찬송대(讚頌隊), 찬미대(讚美隊), 찬양대(讚揚隊)라는 명칭을 혼용했었는데, 그 중 '찬양대'라는 명칭을 가장 많이 사용했었다. 오늘날도 찬양대라는 명칭은 아주 사라지지 않았다. 현재의 한국개신교는 아주 소규모(100여명 정도)의 교회일지라도 성가대를 갖추지 않은 교회가 거의 없다. 각 교회는 주일예배의 회수에 해당하는 만큼의 성가대들을 갖고 있는 것이 보통이며, 저녁예배나 수요예배를 위한 성가대를 갖는 경우도 있으나 흔하지는 않다.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의 4부합창의 구성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성 성가대, 부부 성가대와 같은 특별한 성가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심적 위치의 성가대는 아니다. 성가대가 자주 부르는 곡들은 손쉬운, 영미의 성가곡 종류들이다. 큰 규모의 교회에서는 상당히 수준 높은 성가곡을 부르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작은 교회는 더 쉬운 음악이나 찬송가책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성가대를 음악적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지휘자이고, 그를 반주자(오르간, 피아노)가 협력한다. 성가대의 음악지도자를 <음악목사> 또는 <성가사>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교회도 최근에는 늘어나고 있다. 한국교회 성가대가 연습하는 양은 평균적으로는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이고, 특별한 절기에는 더 많은 연습시간을 할애한다. 성가대에는 성가대장이 있어서 음악외적인 면에서 성가대를 보호,육성하며, 당회와 의사교환을 하는 창구 역할도 한다.
2. 한국 최초로 성가대가 생긴 것은 1913년 또는 1914년이다. 평양 장대현 교회는 1913년 당회에서 당시 숭실전문학교 생물 교수였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마우리(Eli M. Mowry, 한국명: 牟義理)를 초빙하여 성가대를 설립케 하였다. 그는 장대현 교회 성가대가 1913이나 14년쯤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 성가대는 모두 15 또는 16명의 남성만으로 구성되었는데, 당시에는 회중이 앉는 자리조차 남녀를 구분하였고, 그 사이로 휘장을 쳐서 서로 볼 수 없도록 된 환경이라서 혼성 성가대는 생각할 수 없었다. 1918년 경의 장대현 교회 성가대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마우리(지휘자), 박윤근(반주자), 한영길, 차재일, 박인황, 배흥권, 이인선, 고덕영, 임익찬, 임현길, 김병오, 박형근, 박정근, 김만형, 정경필, 이윤섭, 고영수, 박요한, 박경호, 권용덕, 박관해, 길진경. 이들은 12세에서 30세 되는 청소년이었다. 이 중 박윤근(오르간), 이인선(테너), 박경호(피아노)는 후에 음악가가 되었다. 장대현 교회는 그 다음해 여름부터 여름마다 평양 근교 교회들을 위해 교회음악 강습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통해 성가대가 점차 다른 교회로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다른 교회에서는 남성의 수가 부족하여 곧장 혼성 성가대로 시작하였다. 한편 서울에서는 새문안 교회 "찬미대"(讚美隊)가 1914년에 있었던 것을 제직회록을 보아 알 수 있으나, 평양 장대현 교회의 경우처럼 확실한 기록이나 증언이 남아 있지 않아 그것이 어떠한 성격의 성가대였는지 잘 알 수 없다. 여타의 다른 교회들은 모두 그 이후에 성가대를 조직했다. 성가대가 있기 전에는 독창을 하거나 중창을 하는 "특별순서"(특송)로 대신했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가대는 많은 양악가들을 배출하는 학교의 역할을 했다. 한국의 초기 양악가들이 거의 모두 교회출신인 것은 성가대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도 양악이 많이 보급되면서 성가대의 학교적 성격은 이후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오히려 전문 음악교육을 받은 음악 인력에게 부분적으로나마 일자리를 주는 수용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홍정수]
참고문헌: 길진경(吉鎭京): 영계 길선주 (靈溪 吉善宙), 종로서적 1980, 220-222쪽. 새문안 교회 문헌 사료집 제1집: 새문안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987, 339쪽. 홍정수: 한국 교회성가대의 초기 역사, 교회와 신학 1994. 5. 10. 제26집, 532-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