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스트라빈스키(영: Igor Stravinsky, 도: Strawinsky, 러: Strawinskij, Feodorowitsch, 1882.7.17-1971.4.6)
스트라빈스키(영: Stravinsky, 독: Strawinsky, 러: Strawinskij, Igor Feodorowitsch)는 1882년 7월 17일 상트 페테스부르크(옛날의 레닌그라드) 부근에 위치한 오라니엔바움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페테스부르크 궁정 오페라단의 베이스 가수이었으며,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의 길로 들어서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나이 9살 때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도 스네트코프 (Snetkow)라는 여선생에게 배웠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에게 제대로 된 피아노 교육을 시킨 사람은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 1830-1894)의 제자인 카쉬페로바(Kaschperowa)부인이었다. 이 카쉬페로바부인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재능을 가장 정확히 알아보고 그를 끝까지 지도하였으며, 특히 그녀의 교수법 중에서 페달을 사용하지 않는 연주 기법은 스트라빈스키의 피아노 음악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모든 피아노 곡의 악보를 보면 어느 곳에도 페달의 사용이 표시되지 않고 있으며, 페달이 사용되지 않은 상태의 피아노 음색을 통하여 그는 자신만의 새롭고 독특한 음악어법을 창출해 내었다. 스트라빈스키는 그 외에도 아키멘코(Fjodor St. Akimenko, 1876-1945)에게 화성학을, 칼라파티(Wassilij P. Kalafaty, 1869-1942)에게 대위법을 배웠다.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의 피아노 학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악보 보는 법을 매우 빠르게 배웠고 곧 즉흥연주 하는 것에 대하여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피아노를 칠 때 주로 즉흥연주를 하였고, 이것은 오랫동안 나의 가장 좋아하는 것이 되었다. (...) 이러한 즉흥연주의 지속적인 작업은 나에게 있어서 피아노 연주의 테크닉을 향상시켜 주었으며, 나의 음악적인 사상을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작곡하는 과정에서 단지 상상 속의 소리만으로 작업에 임하기보다는 직접 소리나는 악기를 가지고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이미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를 통하여 자신의 독특한 기법을 익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02년 스트라빈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j Andrejewitsch Rimskij-Korsakow, 1844-1908)를 만나게 되는데,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죽을 때까지 돈독하게 지속되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운 약 4년간의 시간은 스트라빈스키에 있어서 매우 값진 시간이었으며, 특히 이전에 특별히 작곡을 배운 적이 없는 그로서는 작곡기법을 정확하고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기간이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작곡을 가르치며 지속성과 자기성찰을 발전시키고, 창작이전에 우선 작곡자로서의 책임과 예술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워 주려고 하였다. 스트라빈스키는 하버드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그의 예술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이란 배워서 얻던가 또는 스스로 발견한 특별한 방법에 따라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들은 우리가 행하는 작업의 정당성을 입증하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예술관을 정립한 것 같다.
러시아의 음악학자인 드러스킨(Michail Druskin)이 추측하기에 이 시기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었으며, 스트라빈스키는 합리적인 사고의 인상으로부터와 더 나아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일상생활로 부터에서도 스스로 누누이 언급했던 자신의 음악에서의 질서의 개념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 이외에도 다른 러시아의 음악가들, 예를 들면 무쏘르그스키(Modest Petrowitsch Mussorgskij, 1839-1881)나 차이코프스키(Peter Iljitsch Tschaikowsky, 1840-1893) 등, 에게서도 역시 작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프랑스의 예술과의 만남도 그의 음악적 발전에서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많은 문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러시아에서는 프랑스의 예술이 큰 주류를 이루었다. 스트라빈스키는 하나의 문학집단이던 프랑스의 발몽그룹을 알게 되었다. 발몽그룹 이외에도 그는 프랑스의 현대예술, 특히 문학과 음악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의 예술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트라빈스키가 당시의 프랑스의 현대음악, 특히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드러스킨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 스트라빈스키는 드뷔시의 음악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회고록에서 비록 그가 드뷔시의 인간성이나 음악적인 재능의 위대함은 인정하지만 자신의 음악에서의 드뷔시의 영향은 부정하고 있다.
1909년 2월 6일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작곡자겸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하였다. 성 페테스부르크에서 개최된 이 연주회에서는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하고 자신이 직접 연주한 4개의 피아노 연습곡(Vier Klavier-Etüden op. 7)과 두 곡의 관현악을 위한 스케르쪼인 '환상적 스케르쪼(Scherzo fantasique op. 3)'와 '불꽃놀이(Feu d'Artifice op. 4)'가 연주되었다. 특히 '환상적 스케르쪼'와 '불꽃놀이'에 커다란 감명을 받은 발레연출가 디아길레프(Serge Diaghilew, 1872-1929)는 그 이후 스트라빈스키에게 발레음악을 위촉하여 1910년에 '불새(L'oiseau de feu)'를 1911년은 '페트루슈카(Petruschka)' 그리고 1913년에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을 파리에서 선 보였다. 1914년 그의 첫 번째 오페라인 '나이팅게일(Le Rossignol)'을 파리에서 발표한 후 1920년까지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동안 지휘자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프랑스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1934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다. 1935년에 그는 회고록을 집필했고, 그의 부인과 어머니가 잇달아 세상을 떠난 1939년에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연을 하였다. 1940년에 스트라빈스키는 베라 드 보셋(Vera de Bosset)과 재혼을 했다. 1945년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난봉꾼의 행각"(The Rake's Progress)의 작곡에 착수한다. 1953년에 그는 "7중주"를 작곡하며 12음 기법에 의한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주로 자신의 작품들을 지휘하거나 녹음작업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1971년 4월 6일 뉴욕에서 운명하였지만 그의 유언에 따라 4월 15일 이탈리아의 베니스에 있는 상 미첼 섬의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참고문헌:
차호성:『C조의 교향곡』을 통해 본 스트라빈스키의 교향곡 연구
차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