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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
홍정수:노래에 맞추어 지어진 찬송가 가사
5,067회
노래에 맞추어 지어진 찬송가 가사 



(장신논단 제9집 1993. 12.13. 446-568쪽)

홍정수 







한국교회의 초기에는 필요한 찬송가의 가사를 만들어 부르는 일이 많았다.당시에는 서양찬송가들이 번역되는 과정에 있었고, 번역된 것조차 1920년대까지는 매끄러운 것이 별로 없었다.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이 당장에 찬송가들을 자력으로 만들어서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이 반영되어 1910년대의 교계신문에는 많은 가사들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가사들이 신문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는 이러한 가사들이 없어진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들이 그 이전보다 덜 인정받는 것을 뜻한다. 가사 만들기는 계속되었다. 오늘날도 이렇게 만들어진 가사들은 부흥사들의 "부흥성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반면에 교회음악의 공적 토론에서는 이러한 가사 만들기에 대한 논의가 없는데, 이는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은 것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가사 붙여진 찬송가들은 교회음악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 교회의 특유의 현상이 아니라,다른 나라에서나 교회 밖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단지 이러한 현상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주목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없는 것처럼 지나치기 쉽다. 비록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나, 보려고 하면 이 현상은 보인다.여기에서는 우리나라의 민요,찬송가,창가와 유행가 등에 교회적인 가사를 붙여 사용한 것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1901년 5월 9일자 그리스도 신문에는 "대한 배사공의 노래"가 실려있다. 짧은 소개의 글과 함께 실린 6절 가사로 된 이 노래는 한국 사람의 노래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가사만 교회적으로 새로 붙인 것을 알게 한다: 


"이 찬미는 대한 뱃사공 노래 곡됴를 위하야 지은 거신데 이 뜻은 이 셰샹은 바다되고 교회는 배 되고 예수는 사공되여 셰샹에셔 떠나 텬당으로 가는 비유로 지은 거신데 셔국[西國] 교우의 찬미에도 이 뜻으로 지은 찬미가 잇고 ?또한 찬미라 하는 것은 깃븐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숑하는 가신고로 대한곡됴로 지은 거시오" 


위의 인용문에서는 서양찬송가에도 있는 내용과 비슷한 것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를 밝히고 "대한곡조"를 선택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대한곡조로 하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더 용이하게 본 것이 분명하다. 곡조없이 실린 이 노래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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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국의 뱃노래에 새로운 가사를 붙인 사람은 당시의 그리스도 신문 편집 책임을 맡았던 게일(James Scott Gale, 한국명:奇一, 한국거주:1888-1928)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 이 신문에 찬송가 해설이 실린 경우 게일 목사의 이름으로 실린 것이 있고,평소에 한국음악으로 한국의 교회음악을 만들어 보려했던 흔치 않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한국 기행문에는 뱃노래를 듣고 받은 인상을 적고 있어서 그 때 들은 노래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돌아올 때에 나는 뱃사공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를 요청했다. 그들은 정말로 한국식 음악으로 나의 청을 들어주었다. 한 사람이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뽑으면, 노젓는 데에 맞춰 부르는 우렁찬 합창이 뒤따랐다." 



12년 뒤에 똑같은 노래라고 판단되는 곡에 또다시 새로운 가사가 붙여져 나타난다.(예수교회보 7.15) 




소아회 챵가[小兒會 唱歌] 

(배 떠나는 곡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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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노래는 새로운 필요에 의해 새로운 가사가 붙여진 것이다. 위의 가사가 실린 예수교 회보의 편집책임자 역시 게일이었다. 또한 "도에 젓먹어서 힘써라 소아들"과 같은 표현은 한국인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새로운 가사 역시 게일이 만들지 않았나 하는 짐작이 간다. 가사의 특징이 앞의 노래와 흡사하기 때문에 같은 곡이라고 짐작할 뿐, 이 때까지는 악보가 나타나지 않았다.이 곡이 나타난 것은 위의 가사가 발표된지 4년 후(1917)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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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창파의 작은 배"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있지만 그 가사가 처음과 두번째 가사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최초의 가사나 두번째 가사를 이 곡에 쉽게 맞출 수 있다. 여기에는 새로 작사한 사람이 김갑순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인 김갑순이 쓴 노래에 대한 설명에는 사람이름이 서양식으로 되어 있다: 


"메리가 안트에게 가서 안트야 저 바다위에 우리와 같은 작은 아이가 떠나온다. 구원하러 가자 안트 깜짝 놀라 뭐냐 어디어디 하면서 바다가에 배 한 척에 메리의 아버지 메리 안트 이렇게 세 사람이 타고 망망한 대해에 태산같은 물결을 좌우로 헤치면서 나아갈 때에 메리의 아버지는 노를 젓고 떠나갔는데 그 노래는 이와 같습니다."(이 인용문은 필자에 의해 현대식 표기로 고쳐진 것) 


이 노래를 둘러싼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노래가사가 전체로 소개된 이후로도 계속된다. 이 노래와 이야기는 어린이 꽃주일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용도에 맞게 가사가 바꾸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악보가 누구에 의해 악보로 채보되었는지 또 어느 때부터 악보로 전해오는 지도 알 수 없다. 붙여진 화성으로 보아 음악교육을 그렇게 많이 받은 사람의 솜씨는 아니다. 그 때 당시 기독신보에 찬송가를 작곡하여 발표한 사람으로 최동준이 있었는데, 그가 붙이는 화성은 상당히 다른 방식의 것이며, 친필이라고 생각되는 악보의 모습도 다르다. 


선율은 원래의 뱃노래의 모습을 상당히 지키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지금까지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노래와 비슷한 노래를 우리 민요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다른 가사로 지금까지 악보가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뱃노래는 신문에 세번이나 나타나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졌을 듯한 인상을 준다. 이렇게 여러번 교계신문에 나타나는 노래가 없다. 그러나 첫번째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린이용으로 나타난 것을 보아서 어린이 찬송가가 충분하지 않던 시대의 임시적 어린이 찬송가 대용이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즉, 성인들을 위한 찬송가로는 사용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또다른 민요로서 찬송가 가사가 붙여진 것은 박연폭포인데, 비록 리듬기록이 맞지 않은 곳이 많으나 그 선율은 오늘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박화복(朴華福)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이 노래는 활달한 노래에 어울리지 않게 겟세마네 사건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기독신보 1919.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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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 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길선주(吉善宙, 1869.3.15 -1935) 목사는 청북 수심가 곡조에 맞춘 추풍석음가(秋風惜陰歌)의 가사를 남기고 있으나 악보가 같이 실리지 않아서 어떠한 곡인지 알 수 없다(예수교 회보 191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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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곡조로 또 다른 찬송가를 만드는 일은 가장 손쉽고 흔한 일이었다. 찬송가에 또 다른 가사를 붙이는 일은 찬송가가 어느 정도 전파된 이후에 나타나는데 1906년 이후의 교계 신문에는 매우 많은 가사들이 나타난다. 많은 경우 지은이의 이름이 떳떳이 밝혀져 있고 어떤 찬송가에 맞추라는 기록이 된 것도 많다. 예를 들어 <성신께서 믿는 자와 같이 계심>이라는 가사가 1906년 6월7일자 그리스도 신문에 실려있는데 "곡조는 찬미 105장과 같음", "김해읍 회당 리주봉모씨"라고 곡조, 장소, 저자 이름이 적혀 있다. 


또한 공주의 리병쥬(대한 그리스도인 회보 1912.11.30,예수교 회보 1912. 11.26),순천의 리용직(예수교회보1912.12.30),목포 정현모(예수교회보 1913.3.18), 일본 경도시 동지사대 신학부 리창성(예수교회보 1913.4.15), 평양 관동 김흥찬(예수교회보 1913.7.1),제주 최대현(예수교회보 1913.7.15), 백천 오인명(기독신보 1916.4.5) 등이 찬송가에 새로운 가사를 붙였다. 또한 어떤 곡에 붙였는지도 모를 가사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 특히 한석원 이라는 이름이 이채롭다(대한 그리스도인 회보 1912.12. 30, 1913.11.3).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 펜인슐나", 또는 "한 펜인슐라 석원"으로 쓰고 있다. 


1913년 4월 15일자 예수교회보에는 평양신학당 학생들이 5개의 "등과"[반]별로 식목절(4월3일)에 나무를 심고 각 등과 대표가 "지은 소리"를 하나씩 발표한 것을 볼 수 있다. "지은 소리"는 이미 있는 곡에 가사를 새로 붙인 것이다. 5등 학생대표자 김영훈은 "무궁화가 곡조"에 맞추어 지었고, 4등 학생대표자 김선두는 "나 예수를 첨 믿는 날 곡조"에 맞추었고, 3등 학생대표자 김종상은 "아주 동방 작은 반도 곡조"에 맞추었고, 2등 학생대표자 한상호는 "거두리로다 곡조"에 맞추었고, 1등 학생대표자 김병수는 역시 "거두리로다 곡조"에,교사 리눌서(李訥瑞, 본명:William D.Reynolds, 한국거주:1892-1937)는 "귀한 씨를 심으려고 곡조"에 맞추어 새로운 가사를 만들었다. 가사는 모두 식목일과 찬송가적 내용을 서로 관련시킨 것이다. 사용한 곡들은 네 곡이 찬송가이고 두 곡이 당시에 새로 만들어진 창가종류의 노래로 생각된다. 후자에 속하는 "무궁화가"와 "아주 동방 작은 반도"는 애국적 내용의 노래로 생각되는데, 어떻게 된 곡인지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었다. 창가들 역시 찬송가 곡조를 사용한 것도 있으나, 이 경우에는 찬송가 곡조가 아니고 전혀 다른 곡조였으리라 짐작된다. 왜냐하면 찬송가에 익숙한 신학교 학생들이 원곡이 찬송가였다면 찬송가 명칭을 썼을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정행사와 관련되어 새로운 가사가 단체적으로 창작될 수 있었다는 것은 새로운 가사를 이미 있는 곡에 맞추어 만든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 밖에도 어린이용 노래극에서 많은 찬송가들이 가사가 바뀌어 불리웠을 것으로 보인다. 신문에 실리지 않은 가사들도 상당히 많이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남아서 불리우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드러내놓고 새로운 가사를 발표하던 1910년대의 모습은 필요에 의해, 의욕에 의해 새로운 가사를 주저없이 만들었던 관행을 보여준다.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찬송가 가사들이 교계 신문에 실리는 일이 현격히 줄어든다.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서양의 찬송가들이 많이 번역된 것과 함께 새로운 가사에 대한 필요가 그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번역찬송가의 증가는 아는 음악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가사를 만들던 관습을 쇠퇴하게 했다. 당시의 음악가들이 여기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새로운 가사들이 이미 있는 가사를 대신하여 찬송가에 실린 일은 극히 드물었다. 많은 찬송가 가사가 원래 다른 가사를 가진 곡을 사용했음에도 그러했다(예:"천부여 의지 없어서"는 Auld lang syne을, "시온성과 같은 교회"는 독일국가를 사용한다). 그러나 합동찬송가(1949)까지에는 가사붙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곡들이 들어있다. 또한 "저 새장에 새가 날 듯" : 이 곡은 스페인 민요로서 교회 밖에서는 "사랑하는 나의 고향을 한 번 떠나 온 후에"의 가사로 불리운다. 또한 "천지가 진동하며 해빛 흐리고" 는 원래 일본의 철도가인데, 최남선이 <권학가>라는 이름으로 "소년(少年)이 이로(易老)하고 학난성(學難成)하니" 가사를 붙여 창가로 통용되기도 한 노래이다. 


이와 같은 노래들은 언제 가사가 찬송가식으로 붙여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또한 작사자의 이름도 모른다. 지금 이 노래들이 찬송가에 들어있지 않은 것은 곡의 선택과 가사의 작성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한 "천지가 진동하며"는 영문으로 "traditional song"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노래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정확하게 모르면서 찬송가에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노래의 근원에 대한 무관심은 새로운 가사 작사가들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어떠한 종류의 음악이든지 원래 찬송가가 아닌 것은 크게 비판받고 제거되는데, 이는 개편찬송가(1967)에 와서이다. 






가장 널리 불리운 노래 가운데 하나로는 <학도가>를 생각할 수 있는데,이 노래의 선율은 일본의 <철도창가>를 빌려 쓴 것이라고 하는데,1910년경 우리나라에서 널리 불리웠다. 이 노래는 또다른 가사로도 불리웠는데,이는 일반 한국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일제가 만든 <보통교육 창가집 제1집>에 실린 것으로"청산 속에 묻힌 옥돌"이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이 곡에 맞춰 노래 부르라는 감은절(感恩節)[감사절] 찬송이 기독신보 1916년.11.22일자에 실려 있다. 


1.텬디만물 죠셩하고,츈하츄동 뎡하시샤 

?때를 따라 복주시는,하나님께 감샤하셰 

2.싹이 나셔 자라는것,볼적마다 깃븜이오 

열매 열녀 닉는것은,생각하매 감샤찬숑 

3.때를?따라 오던비는,만곡백과 흡수하야 

충실하게 닉엇스니,하나님의 능력일세 

4.산과들에 잇던곡식,념려업시 것웟스니 

간곳마다 풍년이오,사람마다 격양가라 

이 노래가사는 더 이상 불리우지 않고 있으나,그 곡은 <신구약 성경 목록가>로 오늘날까지도 교회의 일각에서 불리우고 있다."창세기 출애굽기"로 시작하는 이 가사는 언제 붙여진 것인지 알 수 없다.이렇게 1920년대에 유행했던 창가 <희망가>는 오늘날까지도 <신구약 성경 목록가>로 살아남아 있다. 


아마도 가장 가사가 많이 붙여진 곡은 창가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하는 <희망가>일 것이다.1920년대에 유행한 이 노래는 미국인이 작곡한 것이라고 하는데,그 정확한 작곡가나 작곡연대가 모호하게 알려져 않다.이 노래는 한국에서 알려지기 전,일본에서 1910년대에 조난 당한 학생을 추도하는 내용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오음음계,삼박자의 이 노래는 한국에서 대단히 유행했는데,아직까지도 완전히 안 불리우지는 않고 있다.이러한 노래에 찬송가식의 가사를 많은 사람들이 붙인 것은 이 음악의 대중성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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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일본의 창가 <토기와 거북이>(우사키 또 가메)에 만국동락가(萬國同樂歌)라는 기독교적 노래가사가 붙여진 것을 볼 수 있다.그 밖에도 더 많은 노래에 찬송가가사가 붙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발표 당시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어떤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 가사바꾼 노래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의 <영문밖의 길>과 손양원(孫良源, 1902-1950) 목사의 <주님고대가>가 있다. 이 두 곡은 교회나 기도원 등에서 사사로이 만든 노래책에 자주 실리는 곡들이다. 이 두 노래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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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i)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Valurile Duvarii,1880)선율이다. 이 곡은 1926년에 음반으로 나온 윤심덕의 <死의 찬미>라는 곡으로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곡이다. 그러니까 위의 곡은 그 가사를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사의 찬미> 가사는 주로 세 음절 그룹이 연결되는 가사도 되어있다: "황막한 / 황야를 / 달리는 / 인생아". 그러나 이 삼음절 그룹이 <영문밖의 길>에서는 네음절로 바뀐다: "서쪽하늘 / 붉은 노을 / 영문밖에 / 비치누나". 이렇게 노래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데에는 음절 수가 달라도 괜찮을 수가 있다. 주기철 목사는 당시의 유행가에 가사를 붙이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있는데, 유행가와 찬송가를 음악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그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 곡은 손양원의 <주님고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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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일본노래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음계가 일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일본식으로 유행가를 작곡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열려있다. 주기철과 손양원은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순교자들이다. 이들은 대단히 슬픈 가사를 서글픈 선율에 실었다. 이 곡이 아직도 일부의 사람들에게 불리우는 것은 곡과 가사가 서로 어긋나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있는 노래에 가사를 붙인 새로운 노래들은 악보와 함께 전해오는 일이 드물다. 이러한 새 노래의 작사자들은 악보를 그릴 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음악을 머리 속에 담고 다니기에 가사를 적는 것만으로도 노래부르기에는 불편이 없다. 이들은 가사만의 노래모음집을 만드는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출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혼자 보기 위해 만드는 경우들이 더 많다. 이러한 개인 노래모음집으로서 한국 교회 초창기에 만들어지고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 중에는 <앵산(鶯山)전도가>가 있다. 앵산전도가는 말 그대로 전도용 노래이다. 대체적으로 4 4조의 틀을 유지하는 운율과 '어화'라는 말로 시작하는 가사형식은 얼핏보아 천주교 초기의 '천주가사'와 흡사해 보인다. 노래의 길이 역시 천주가사처럼 대단히 길다. 이 곡은 '어화'라는 표현때문에 서양곡이 아닌 한국의 민요에 맞춘 것이 아닐 것처럼 생각되지만 최후의 판단은 유보할 수 밖에 없다. 한편 심로가(尋路歌)의 중간에 "멀니 멀니 갓더니" 찬송가 가사의 1절 전체가 소개되고 있다. 


다음은 앵산전도가의 맨 처음에 실린 <지로가>이다. 


指路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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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노래가사는 한학(漢學)에 익숙한 사람의 것임을 알게 한다. 위의 가사는 '하나님'을 '上帝'로, '요한'을 '仍翰'으로, '에덴'을 '埃田'으로, '가나안'을 '迦南'으로, '아브라함'을 '亞伯拉罕'으로,'메시아'를 '彌賽亞'로 쓰고 있다. 이는 중국식 표현이다. 또한 서양에 대한 지식도 어느정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작자는 동서양의 여러 길을 열거한 다음 "上帝님의 救世道"를 제시한다. 노래의 내용은 서정적이라기 보다는 거의 서사적인데, "救世道"의 끝에 오는 천당을 목표점으로 단계적으로 서술해간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永生길을 차자가세"하는 권유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위의 여러 면을 볼 때에 이 노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든 노래를 묶어 &lt;전도가&gt;라고 이름 붙인 것도 이 책의 용도를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용이 한편의 설교를 압축해놓은 듯한 느낌을 주어, 작자가 목사나 전도인이었으리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음악적으로는 4행이 한 절을 이루어 계속 한 선율을 반복 사용하여 끝까지 불렀으리라고 여겨진다. 4행을 한 절로 보는 것은 "魚禾世上 사람들아"하는 전형적 시작 문구가 끝에서 네번 째 행에 "魚禾 우리 同胞들아"로 다시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lt;심로가&gt;의 끝부분에 박힌 "멀니멀니 갔더니"의 찬송가도 4행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노래는 많은 한문투에도 불구하고 시조와 같은 느린 노래 양식으로 불리우지 않고 매우 단순한 선율을 빌려 불리웠으리라 생각된다. 


<전도가>가 모두 작곡된 노래라고 생각해 보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작곡의 가능성이 더 희박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미 있는 선율에 노래를 붙였으리라는 추측은 당시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성결교 출신 부흥목사인 이성봉은 1951년 전쟁의 와중에 &lt;임마누엘 성가&gt;를 펴낸다. 이때에 발간된 초판본은 찾을 수 없고, 1964년에 몇개의 가사가 덧붙여진 판본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 실린 노래들은 거의가 이미 있는 노래에 새로운 가사를 붙인 것들이다. 몇개는 그가 스스로 만들지 않았나 짐작되는 선율들도 잇다. 70여개의 가사가 실려있는 그의 책에는, 22개의 악보도(선율만) 실려있다. 가사만 실린 앞부분에는 찬송가 몇장의 곡에 맞추어 부른다는 기록이 있고, 악보가 실린 경우에는 악보 몇번에 맞추어 부르라고 되어 있다. 창가조의 노래, 서양민요, 일본식 음계의 노래, 독일 코랄 등의 노래들이 실려있다. 


여기에 실려있는 가사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모아져 온 것으로 생각되고,특히 부흥회에서 불리운 것으로 되어있으며 "구령전도에 조그마한 이바지가 될까 하여" 이 책을 펴낸다고 서문은 말하고 있다.이성봉이 스스로 짓지 않은 가사도 포함되어 있는데, "작사불명"으로 된 것도 있고(장망성 나그네, 신앙혁명가), 이명직 목사의 것도 있으며(虛事歌1, 虛事歌2), 이인수(순교자의 詩歌)와 양도천 목사(주께 맡기어라)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이성봉 작사의 노래들은 부흥회의 설교에서 중간중간에 진행되고 있는 설교의 내용에 맞추어 부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엄숙하고 장엄하게 불리우지 않고 열정적으로 불리워지는 이 노래들은 설교자와 회중의 열기가 점점 더하여짐에 따라 더욱 빨리 불리워진다. 따라서 음악이 시간적으로 매우 압축된 경향을 보인다. 악보 19를 보면 32마디의 노래가 8마디의 노래로 압축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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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악보는 원래의 네 마디가 한 마디로 묶여 있다. 이와같이 부흥회의 열기를 반영하는 노래는 홀수 박자를 짝수 박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위의 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한국 민요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현상이다. 


열기를 띠는 노래 중의 다른 종류는 부점이 많이 붙은 노래이다. 이 부점은 템포를 가속시키기에 용이하다. 가속은 열광을 불러온다. 이는 한국교회의 부흥회를 음악적으로 특징짓는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인데 위의 곡에서도 원래 부점이 아닌 부분이 부점으로 변해있다. 이것 역시 한국의 음악에서 흔히 보는 현상이다. 


이러한 가속현상에 의해 달라지는 음악의 변모는 원곡이 서양의 것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위의 곡 역시 서양적인 원래 못갖춤마디로 되어 있으나, 위에서는 갖춤마디가 되어있다. 또한 잦은 3연분음표 역시 대단히 한국화된 것을 뜻한다. 위와 같은 곡을 외국음악으로 느끼기는 사실상 어려웠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렇게 부흥회적 가속화 속에 던져진 서양선율들은 상당히 우리식의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들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점이 끊임없는 음악엘리트들의 비판과 기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악을 살아남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가사바꾸기를 주로하는 부흥성가는 오늘날도 살아 있다. 비록 부흥회나 기도원 등 교회의 외곽에서 불리우지만 이 노래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전도에 열성적이었던 이름없는 평신도들도 노래가사를 만들어 스스로 사용한 경우들이 없지 않다.그 한 예로 "찬송 할머니"라고 불리운 김리브가 권사를 들 수 있다. 1893년 강화읍 신문리에서 출생하여 1970년에 타계한 그녀는 평생을 인조견 장사를 위해 평생동안 한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했는데,그녀는 그 일을 주로 찬송으로 해냈다.그녀가 작사한 <십자가 군병가>와 <복음의 용사>의 곡이 어떤 것인지,즉 다른 곡조에 맞추어 지은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작곡한 것인지를 김권사를 소개한 전택부의 책은 말하고 있지 않다.그러나 필자는 이미 있는 곡에 가사를 붙인 것이라고 추측한다.전택부가 이미 있는 곡에 김리브가 권사가 가사를 붙였다는 밝힌 노래에는 <우리의 구주>와<십자가>;가 있다. 


&lt;우리의 구주&gt;는 찬송가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의 곡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그 1절은 찬송가 가사를 그대로 사용하고,2절부터 김권사의 작사가 시작된다.12절까지 가는 대단한 길이를 가졌지만,마지막 절은 찬송가 가사를 다시 사용하는 것이다.사사의 내용도 찬송가 가사의 내용과 흡사한 부분들이 많은데,특히 첫줄에서 "...지나 ...에 가도"와 같은 틀이 그대로 사용된다(2-8절까지).또한 <십자가>의 곡은 창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의 곡을 빌린 것인데,이 곡에서도 1절은 창가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2절부터 김리브가 권사에 의해 덧붙여졌다. 그녀의 찬송가들은 정확하게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또한 이름 없는 여성들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들이 더 많이 있으리라.단지 한국의 교회는 이러한 생활 속의 찬양을 주목하지 않은 것 만은 사실이다. 





민요, 찬송가, 창가, 일본노래 등등 생각할 수 있는 노래 선율에 가사가 붙여졌다. 이는 한국교회가 생긴 이래 나타난 노래 양태의 일부를 드러내는데,특히 초기에 많이 보이는 현상이었다. 가사를 짓는 사람들은 이런 여러 종류의 혼합상태나 비도창성에 대해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노래를 새로 배우기란 어려운 것이니까 이미 알고 있는 노래를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새로운 노래를 작곡할 수 없는 것도 한 요인이 되겠지만 작곡할 수 있는 사람에게 곡을 부탁하는 일은 가사짓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음악에 관한 적은 관심이 이들의 특징이다. 물론 이것은 음악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가사 짓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택한 노래 종류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는 일이 많았다. 부러 한국민요에 가사를 붙인 게일의 경우는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여러가지 외국노래들은 비극적인 한국 역사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부분적으로 거의 한국화되어버린 노래도 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의도적으로 한국적이었기 보다는 한국식 음악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 의해 자연스럽게 한국화되었다.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의 음악적 틀은 존중되지 않았다. 오늘날도 한국찬송가를 우리에게 맞추어 틀리게 부르는 일이 많은데, 이런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에는 음악을 배웠다는 사람들이 비판적이다. 우리가 서양음악에 익숙해질수록 가사붙이기 음악이 뒷전으로 밀려났다. 


가사들은 탁월하다거나 오래 불리운 경우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찬송가책에 실린 경우는 드물고 그것도 애창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한국교회에서 가사가 붙여져서 대단히 애창된 경우는 스왈른(W.L.Swallen, 한국명:蘇安論, 한국거주:1892-1932)선교사가 작사한 "하늘가는 밝은 길이"(원곡:Annie Laurie,1905년 작시) 정도인데, 이 노래는 &lt;합동찬송가&gt; 시절에 매우 많이 불리웠으나 근래에는 덜 불리운다.이 노래는 60년대의 &lt;개편 천송가&gt;에서 빠졌으나 당시의 &lt;새찬송가&gt;에 포함되어 있었고,이 두 찬송가를 합한 현재의 &lt;통일 찬송가&gt;에 다시 실렸다. 


이러한 가사짓기 현상은 한국교회 음악의 일부였으나 주목받지 못했거나,파기해야할 것으로 생각되었다.이러한 가사들을 더 갈고 다듬어서 우리의 찬양생활의 일부를 더 발전시킨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이러한 가사들은 대단히 토착적인데,교회음악의 토착화를 부르짓는 사람들조차도 이 부분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오늘날도 이러한 가사들은 교회의 어느 구석,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불리우고 있는데,이는 한국의 교회음악이 발전적으로 용해해야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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