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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바하],요한 세바스찬 [Bach, Johann Seba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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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세바스찬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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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 바하는 1685년 3월 21일 독일의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하(Johann Ambrosius Bach, 1645-1695)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래머히르트(Elisabeth Lämmerhirt)의 일곱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6세기 중엽 이후 대대로 음악가들을 배출했던 집안이었으며, 어린 J. S. 바하 역시 일찍부터 음악에 재질을 보여 그의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1694년 바하는 부모를 여의고 오르드루프(Ohrdruf)에 있는 그의 맏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하(Johann Christoph Bach, 1671-1721)의 집에 머물게 된다. 여기서 그는 형에게 하프시코드와 오르간을 배우는 한편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1706)의 음악양식을 배우거나 형이 소장하고 있던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등의 작품을 악보로 접하게 된다. 또한 오르드루프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게 되는데, 이것은 훗날 바하의 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700년 바하는 함부르크 근처의 뤼네부르크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며 교회의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라인켄(Johann Adam Reinken) 등에게 오르간을 배운다. 1703년 학교를 마치고 3월부터 9월까지 바이마르의 궁정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다가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한다. 1704년 바하는 작곡에 전념하여 내림나장조의 『카프리치오』(Capricio)를 작곡하였다. 1705년 10월 바하는 휴가를 얻어 뤼벡으로 북스테후데를 찾아가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후 깊은 감명을 받고 예정된 휴가기간을 마음대로 연장시켜 이듬해 초에 아른슈타트로 돌아갔다. 하지만 지연된 휴가기간 때문에 아른슈타트 종교국으로부터 문책을 받은 바하는 1706년 그곳의 오르가니스트를 사임하게 된다. 1707년 6월 바하는 뮐하우젠(Mühlhausen)의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10월 17일 그의 육촌 누이동생인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와 도른하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708년 바하는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사임하고 바이마르로 초빙되어 궁정의 오르가니스트 겸 바이올린 주자로 취임하여 이후 약 10년간 그곳에서 일한다. 당시 바이마르의 영주인 빌헬름 에른스트 공은 스스로가 종교적, 문화적 교양이 높은 사람이었고, 그 주변에 모여들었던 많은 지식인이나 교양인들을 높이 대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바하는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또한 교회의 오르간을 자신의 뜻대로 개조한 후 바하는 많은 수의 오르간 작품을 이 시기에 작곡하였다. 1714년 3월 빌헬름 공은 바하를 합주단의 악장으로 승진시켰으며, 이에 대한 답으로 바하는 매달 1곡씩의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쾨텐의 궁정악장으로 부름을 받는 1717년까지 많은 칸타타와 오르간작품들을 작곡하였다. 바하는 1717년 바이마르의 빌헬름 공에게 자신을 궁정악장으로 승진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했고 때마침 쾨텐의 레오폴드 공으로부터 궁정악장을 제의받자 바이마르에 사표를 제출하고 쾨텐으로 옮겼다. 

바하는 쾨텐의 레오폴드 공 아래서 가장 높은 지위와 좋은 작업조건을 획득하였으며 그가 쓴 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음악을 사랑하고 아는 자비스러운 군주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서 평생을 보낼 것으로 생각한다.\\\\\\\"(1730년에 쓴 바하의 편지) 하지만 레오폴드 공이 재혼한 두 번째 부인이 음악에 대하여 문외한이었기에 영주의 음악열이 식었다고 생각한 바하는 1723년 쾨텐의 궁정악장을 사임하고 아들의 대학공부를 위해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로 옮기게 된다. 

쾨텐시대에 바하는 17명의 우수한 단원으로 구성된 악단을 가지고 교회음악 보다는 많은 세속음악을 작곡한 것으로 나타난다. 바하 스스로도 이 악단에 비올라 주자로 참여하며 이탈리아풍과 프랑스 풍의 작곡기술을 발휘하며 관현악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쾨텐 시대의 바하는 성악음악 보다는 기악음악, 특히 합주음악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들로는 그의 아들인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edemann Bach, 1710-1784)을 위해 작곡한 소품들(1720)이나 브란덴부르크 주의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공에게 헌정된 브란덴부르크협주곡(1721, 3, 24),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 작곡한 평균률I(1722), 인벤션과 신포니아(1722),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의 모음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파르티타, 서곡 그리고 40여 개의 세속칸타타 등이 있다.

쾨텐에서 1720년 7월 7일 바하는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를 잃고 그 이듬해인 1721년 3월 12일 안나 막달레나 빌케(Anna Magdalena Wilcke, 1701-1760)와 재혼을 하고 그녀와의 사이에 6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두었다. 그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모두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인 칼 필립 엠마누엘(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뛰어난 음악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바하는 두 번째 부인인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 둔 13명의 자녀들 가운데 바하의 뒤를 이어 음악가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맨 마지막의 두 아들인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Johann Christoph Friedrich Bach, 1732-1795)와 요한 크리스티안(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을 꼽는다.

1723년에 바하는 쾨텐의 궁정악장을 사임하고 아들의 대학공부를 위해 그리고 교회음악에 대한 심적 요구 등을 이유로 라이프치히로 옮긴다. 라이프치히에서 바하는 토마스 교회의 작곡가였던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 토마스 교회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이후 니콜라이 교회 등 주요 교회들의 칸토르이자 음악감독으로도 일하게 된다. 라이프치히시대에 바하는 주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일하면서 세속음악보다는 교회음악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작곡한 작품들로는 칸타타, 오라토리오, 수난곡, 건반악기 연습곡, 콘체르토, 『b단조 미사』의 일부분(1733) 그리고 오르간 음악 등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1724년 4월에 초연된 『요한수난곡』과 1725년 초에 작곡한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연습곡, 『칸타타 BWV249a, 205(1725), 249b(1726), 198(1727)』 등이 있으며, 1729년 4월에 바하는 『마태수난곡』을 발표하였다. 이밖에 수많은 칸타타와 미사음악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1734-35)가 발표되었으며, 말년에 바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1742), 『평균율 피아노 곡집 II』(1744), 『음악적 헌정』(1747), 『b단조 미사』(1748완성), 『푸가의 기법』(1745-50) 등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말년에도 쉼없는 작곡활동을 통해 바하는 과로로 인한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되었는데, 특히 1750년 3월과 4월에 걸쳐 두 번의 눈수술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이후 다시 뇌일혈을 일으켜 라이프치히에서 7월 28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바하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이름은 당분간 음악계에서 잊혀져 갔다. 18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바하라는 이름들은 대부분 그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다시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라는 이름은 독일의 베를린을 중심으로 재발굴 되었으며, 1780년대에 들어 모차르트 등의 음악가들을 통해 서서히 음악계에서 재조명되기 시작됐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형식을 개척하거나 새로운 면을 많이 보인 작곡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에서 대위법을 최고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작곡가이었으며, 당시까지의 음악적 기법이나 표현방법을 가장 잘 활용했던 음악가이었다.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나아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악적 기법을 수용하여 통합시켰다.

* 바하의 음악에 수용된 영향

바하의 음악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음악적 경향은 다음과 같이 대략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이탈리아 : 코렐리(Arcangelo Corelli)와 비발디(Antonio Vivaldi)의 음악으로부터 이탈리아음악의 협주양식, 리듬의 생동감, 형식의 명료함 등을 영향받음.
프랑스 : 쿠프랭(Francois Couperin)으로부터 클라브생(Clavcin)음악을 통한 화려한 장식음 기법과 멋을 그리고 륄리(Jean-Baptiste Lully)의 음악으로부터는 프랑스 서곡 양식을 받아 들였다.
독 일 : 파헬벨(Johann Pachelbel),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라인켄(Jan Adam Reincken) 등의 오르간 음악을 통합하여 자신만의 음악으로 재창조하였다.

* 바하 음악의 영향

바하의 사후 약 50여년간 그의 작품은 잊혀진 채로 남아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1780년대에 들어 모차르트 등의 음악가들에 의해 재조명되었으며, 곧이어 등장했던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바하의 음악을 재조명하기 시작한 대표적 작곡가이다. 모차르트는 고트프리트 스위텐이라는 외교관을 통하여 바하의 음악을 만난다. 고트프리트 스위텐은 베를린에서 바하의 음악을 알게되었고, 그후 빈으로 돌아와 매주 일요일 바하와 헨델의 곡들로 작은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스위텐이 개최하던 음악회?모차르트가 1782년부터 참가하면서 바하의 음악에 매료되었 다. 그는 바하의 푸가로부터 주제를 인용하여 작곡과 편곡을 하기도 하였다. 예) 교향곡 41번(Jupiter)의 마지막 악장에서 찾을 수 있는 5중푸가나 오페라 『요술피리』에서 푸가기법을 사용.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그의 스승인 알브레히츠 베르거에게서 바하의 단순 대위법, 2중 대위법, 단순푸가, 2중푸가, 3중푸가의 전부분에 걸쳐 상당히 철저하게 배운다. 베토벤도 B-A-C-H음을 기초로 서곡을 구상할 만큼 바하에 심취했었는데, 피아노 소나타 Op. 109, 1악장의 처음에 나오는 베이스음들은 바하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테마를 인용하였거나, 피아노 소나타 Op. 110에는 커다란 푸가를 작곡하였다.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1749-1818): 1802년 처음으로 <바하 전기>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1908년에는 알베르트 슈바이쳐가 바하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낭만주의 작곡가들에 의해 바하의 음악은 계승되어 나갔다. 
멘델스죤(Felix Mendelssohn Bartoldy): 20세의 멘델스죤 바르톨디에 의해 바하의 『마태수난곡』(Matthäus  Passion)이 초연 100년만에 1829년 재연되었다. 멘델스죤은 첼터로부터 작곡을 배우면서 그리고 베를린의 노래학교에서 바하의 음악과 친숙해져 있었는데, 그는 누구보다도 내면적인 정신세계가 바로크 음악과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창작세계에서 바로크 음악형식 등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멘델스존의 음악에서는 고전주의시대의 경향과 더불어 바로크(특히 바하)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피아노를 위한 『카프리치오 E장조』의 첫악장에서의 모방 기법을 이용한 지그 주제는 바하의 영향을 강하게 나타낸다.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슈만이 보여 주었던 음악에서의 시적이고 해학적인 분위기는 바하의 음악 세계로 연결이 된다. 바하 평균율의 전주곡과 푸가는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음악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바하의 폴리포니 기법은 슈만의 작품에서 주로 중간 성부에서 쓰여지면서, 낭만주의의 표현주의적 예술로 다시 활발하게 피어난다. 1840년이후 슈만은 폴리포니 기법 연구에 한층 정컥?쏟는데, 그의 부인 클라라 슈만과 함께 1842, 1845, 그리고 1853년에 거듭 푸가 형식을 철저히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깊은 연구에 대한 결과는 슈만의 푸가곡 op.56, 58, 60 그리고 79에 잘 나타난다. 슈만은 1843년 자신이 발행한 <음악신보>에서 바하는 어느 작곡가보다 음악가들에게 항상 새로운 원천을 제공하는 작곡가라 극찬하기도 하였다.
쇼팽(Frederic Chopin): 쇼팽이 남긴 『24전주곡』은 C장조로 시작하여 관계 단조로 그리고 5도 순환의 조성의 틀로 진행되는데 이는 바하의 『평균율 피아노』를 기본으로 작곡한 것이다. 쇼팽은 바하의 음악에 몰두하기는 했었지만 자신의 작품에 엄격한 대위법형식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페지오로 된 화음의 사용이나, 바로크음악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쇼팽의 이러한 작업은 이후에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음악에서도 다시 한번 찾을 수 있는데, 스크리아빈의 『24전주곡』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브람스(Johannes Brahms): 브람스는 일반적으로 베토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음악에서 바하의 음악적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브람스는 바흐의 대위법 예술을 자신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취급했던 작곡가이었으며, 그가 비엔나 ‘징 아카데미’의 지휘자로 있을 때 바하의 음악을 청중에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브람스의 모테트나 그의 최후 오르간용 코랄 전주곡에서 바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다.
20세기 음악가들: 1900년대에 들어서도 12음 기법을 완성한 아놀드 쇤베르크나 이골 스트라빈스키 등의 많은 작곡가들이 바하의 음악적 영향권 내에 머물고 있었다. 
힌데미트(Paul Hindemith): 힌데미트는 이론서를 통하여 대위기법을 연구하고 이를 『음의 유희』(Lusdus tonalis)라는 작품을 통해 확인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2개의 푸가와 11개의 인터루디움은 곡의 첫머리에 놓인 프렐루디움 그리고 곡의 마지막에 놓인 포스트루디움으로 싸여 있다. 여기서 푸가는 바하의 평균율처럼 12개의 반음을 바탕음으로 하고 있으며, 이 작품의 전반적인 진행은 바하의 대위 기법 등을 현대적 기법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 힌데미트의 15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성모마리아의 일생』이나, 『현악사중주 4번』 등에서 바하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빌라-로보스(Heitor Villa-Lobos(1887-1959, 브라질): 빌라 로보스의 『바하풍의 브라질리아라』(Bachianas Brasileiras)는 성악을 포함한 모음곡으로 바로크 시대의 음악적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빌라-로보스는 바하의 음악에 깊이 심취해서, 바하의 평균율 중에서 몇 곡을 합창과 첼로 앙상블로 편곡하기도 하였으며, 브라질의 민속음악과 바하 음악의 유사성을 작품을 통해 주장하기도 하였다.
바하협회: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두드러지게 높아졌고, 필립 슈핏타를 중심으로 라이프치히에서 1850년에 ‘바하협회’가 창립되고(옛 바하협회) 1851년부터 1899년까지 46권의 <바하 전집>이 간행되었다. 20세기가 되자 우선 1900년에 ‘신 바하 협회’가 설립되고 1904년부터는 <바하 연감>을 발행하여 바하연구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악보의 출판이나 연주를 통해 바하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954년부터 괴팅겐 바하 연구소와 라이프치히 바하 자료보관소에서 <신 바하 전집>의 간행이 시작되었고, 그와 아울러 기본적인 자료의 재검토되었다.
바하 작품번호: 현재 바하의 작품번호로 쓰이고 있는 BWV(Bach Werkverzeichnis)는 1950년 볼프강 슈미더(Wolfgang Schmieder)가 라이프치히에서 책으로 출판하였다. 

차호성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바흐, 요한 세바스찬(Bach, Johann Sebastian, 1685-1750)


- 1685년 3월 21일 독일 아이제나흐(Eisenach)의 시(市) 음악감독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J. A. Bach)의 막내아들로 출생.
- 1694년 5월과 1695년 1월에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읨.
- 1695년 초 파헬벨(J. Pachelbel)의 제자이자 오르드루프(Ordruf)의 성 미하엘리스교회(St. michaeliskirche) 오르가니스트인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J. C. Bach)에게서 자람.
- 1699년 가을 오르드루프의 라틴어학교 입학. 라틴어, 그리스어, 음악, 산술, 수사학 등을 배움.
- 1700년 4월 오르드루프의 칸토르 헤르다(E. Herda)의 권유로 뤼네부르크(Lüneburg)의 성 미하엘리스교회 소속 학교로 전학. 이후 합창단원으로 활동. 신학, 수사학 등을 배움. 뤼네부르크의 요하네스교회(St. Johanneskirche)의 오르가니스트 뵘(G. Böhm)의 연주와 작품을 접하면서 북독일 오르간양식 익힘. 여러 차례에 거친 함부르크 방문을 통해 라인켄(J. A. Reinken)의 오르간 음악과 카이저(R. Keiser)의 오페라를 접함. ‘작은 베르사유’로 불리는 첼레(Chelle) 궁정의 프랑스양식 기악음악 접함.
- 1703년 3월 바이마르 궁정의 궁정음악가로 채용됨.
- 1703년 8월 아른슈타트(Arnstadt)의 노이에교회(Neue Kirche) 오르가니스트로 임명       됨.
- 1705년 마리아 바바라 바흐(M. B. Bach)와 결혼.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 F. Bach)와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C. Ph. E. Bach)를 포함해 7명의 자녀를 둠
- 1707년 7월 뮐하우젠(Müllhausen)의 시(市) 오르가니스트이자 음악감독이 됨.
- 1708년 7월 바이마르 에른스트(W. Ernst) 대공의 궁정 오르가니스트이자 실내음악가로 채용됨. 다수의 오르간작품 작곡. 비발디(A. Vivaldi)의 9개 협주곡을 포함해 여러 대가들의 22개 기악협주곡을 오르간과 클라비어를 위한 작품으로 편곡함.
- 1714년 3월 바이마르 궁정의 악장으로 임명됨. 이후 1716년 12월까지 규칙적으로 칸타타를 창작함.
- 1717년 12월 쾨텐 레오폴드 대공(Leopold von Anhalt-Köthen)의 궁정 카펠마이스터이자 실내악 악장으로 임명됨. 이후 바이올린, 플룻, 첼로, 감바 등을 위한 소나타, 트리오소나타, 협주곡, 오케스트라서곡 등 다수의 기악작품과 클라비어작품으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Das Wohltemperte Klavier Ⅰ, 1721), ≪영국 모음곡≫(Englische Suiten, BWV 806-811), ≪프랑스 모음곡≫(Französische Suiten, BWV 812-817),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Chromatische Fantasie und Fuge, BWV 903) 등 작곡.
- 1721년 7월 마리아 바바라 바흐 사망. 1721년 12월 빌케(A. M. Wilcke)와 재혼함.
- 1723년 6월 요한 쿠나우(J. Kuhnau)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Leipzig)의 토마스교회의 칸토르이자 시(市) 음악감독이 됨. 이후 약 10년간 칸토르로서 교회칸타타(3년분의 칸타타가 보존되어 있으며, 2년분의 칸타타는 소실된 것으로 추정), ≪요한 수난곡≫(Johannes Passion, BWV 245, 1724), ≪마그니피카트≫(Magnifikat, BWV 243), ≪b단조 미사≫(h Moll Messe, BWV 232, 1748)의 <쌍투스>, ≪부활절 오라토리오≫(Oster Oratorium, BWV 249),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Weihnachts Oratorium, BWV 248), ≪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 BWV 244, 1727 또는 1729) 등 다수의 교회음악 작곡. 시 음악가로서는 여러 세속칸타타를 창작함.
- 1729-1737년, 1739-1746년(?)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의 감독, 지휘자로 활동. 오케스트라, 실내악, 쳄발로 음악ㆍ세속칸타타를 작곡, 연주함.
- 1735년경부터 서서히 교회음악 작품이 감소하는 대신 작품들의 집성과 완성, 클라비어와 오르간 작품들의 출판 작업. ≪클라비어 연습곡≫(Clavier-Übung) 제2권, 제3권, 제4권, ≪쉬블러 코랄집≫(Schübler Choral, BWV 645-650) 등 활성화. ≪음악의 헌정≫(Das Musikalisches Opfer, BWV 1079),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a, BWV 1080 미완성) 등 후기 걸작들을 작곡함.
- 1747년 5월 포츠담 궁정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를 방문함.
- 1750년 7월 28일 라이프치히에서 사망.

프렐류드와 푸가, 토카타와 판타지아, 모음곡과 파르티타, 콘체르토 그로소와 독주 콘체르토, 모테트, 칸타타, 수난곡, 오라토리오, 미사 등의 형식과 장르에 있어서, 그리고 대위법과 계속저음, 폴리포니, 모방, 협주방식 등의 작곡 기법과 양식에 있어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후기바로크의 작곡가로 분류된다. 이러한 형식과 장르, 작곡기법은 바로크음악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당시 중부와 북부 독일 지역의 음악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들이다. 이렇듯 바흐의 음악과 작곡양식은 전통과 당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전통은 바흐의 음악에서 총괄되고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다.
바흐의 음악예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도의 탁월성은 이미 초기 작품들에서 감지되는데, 예컨대 뮐하우젠에서 작곡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카타 d단조≫(Toccata in d minor, BWV 565)에서 바흐는 자유로운 토카타의 연주방식과 대위법적인 엄격한 작곡양식에 격정적이고 대비로 가득한, 극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3부분 구성의 ≪토카타 C장조≫ (Toccata in C major, BWV 564) 역시 유희적이고 표현성 강하며 극적인 성향에 있어 바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오르간 푸가 또한 이미 초기부터 대위법적 건조함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으며, 유쾌하고 유희적인 성격의 ≪프렐류드와 푸가 D장조≫(Prelude and Fugue in D major, BWV 532), 말하는 듯한 성격의 ≪프렐류드와 푸가 C장조≫(Prelude and Fugue in C major, BWV 531), ≪푸가 g단조≫(Fugue in G minor, BWV 578)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푸가의 주제들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바이마르시기에 작곡된 수많은 원숙하고 독창적인 오르간 작품들, 특히 코랄편곡 오르간작품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르간 소곡집≫(Orgelbüchlein, BWV 599-644)을 꼽을 수 있는데, 바흐의 본래 작품제목에 따르면 이는 “오르가니스트에게 코랄을 전개하는 다양한 방법과 더불어 페달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가르침을 주는” 교육용 작품이다. ≪오르간 소곡집≫의 코랄전주곡들은 몇몇 비전형적인 예외의 경우(BWV 639, 615)를 제외하고는, 세 종류의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유형에서는 오른손이 풍부하게 장식된 코랄선율을 연주하고 왼손과 페달이 반주를 하며(BWV 614, 622, 641), 두 번째 유형에서는 코랄선율이 두 성부에서 카논식으로 전개됨과 동시에 자유롭게 움직이거나 역시 카논식으로 연주되는 다른 성부들에 의해 보충된다(BWV 600, 608, 618-620, 624, 629, 633, 634). 마지막 세 번째 유형에서는 코랄선율이 4성부 중 최상성부에 놓이고, 중간성부들이 지속되는 음형들을 토대로 대위법적으로 전개된다. 이때 페달은 독립적인 베이스성부의 역할을 하거나 중간성부들의 수식적 진행과 연관된다(나머지 32개 코랄전주곡). 이 가운데 세 번째 유형은 바흐 고유의 것으로서 “오르간 소곡집 유형”이라고 일컬어지곤 하며, 물론 극도로 다양한 형태로 실현된다. 더불어 이 코랄전주곡들에서는 노련하고 탁월한 작곡기법이 명료한 가사의 음악적 해석과 결합되는데, 가사의 음악적 묘사와 해석은 바로크의 수사학 전통에 의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르간 소곡집 유형”은 바흐가 아른슈타트에서 코랄전주곡 작곡을 시작한 이래로 한편으로는 파헬벨과 북스테후데(D. Buxtehude)의 작곡양식을 수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성적 실험과 계속저음의 대위법적 전개, 코랄가사와 연관되는 기악부분의 다양한 전개를 꾀하면서, 전통에 의거하면서도 작곡양식과 음악적 질에 있어 이전 것들을 능가하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낸 대표적 예이다.
바흐의 전체 작품에서 양적, 질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칸타타의 창작은 뮐하우젠 시기에 시작되었는데, 뮐하우젠 시기의 초기 칸타타들(≪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Gott ist mein König, BWV 71), ≪주여, 내가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나이다≫(Aus der Tiefen rufe ich, Herr, zu Dir, BWV 131), ≪하나님의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이로다≫(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BWV 106) 등은 예외 없이 소규모의 구성과 개별 부분들의 특별한 연관성을 보이지 않는, 여전히 모테트를 연상시키는 배열원칙을 특징으로 하는 ‘옛 형식’을 취한다. 이 초기 칸타타들에서는 또한 레치타티보가 생략되어 있으며, 아리아 역시 아직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력 밖에 놓여 있다.
바이마르에서 바흐는 궁정악장의 의무로서 ≪울며 탄식하고 근심하며 두려워하도다≫(Weinen, Klagen, Sorgen, Zagen, BWV 12), ≪내 마음에 근심 많으니≫(Ich hatte viel Bekümmernis, BWV 21), ≪오라, 달콤한 죽음의 시간이여≫(Komm, du süße Todesstunde, BWV 161)를 포함하는 약 30여곡의 교회칸타타를 작곡하였다. 이 교회칸타타들은 새로운 유형의 칸타타로서, 여기에는 레치타티보와 다 카포 아리아가 도입되어 있고, 전반적으로 노이마이스터(E. Neumeister)에 의해 성립된 칸타타 유형을 따르는 살로모 프랑크(S. Franck)의 가사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로써 오페라에 속하는 이탈리아 양식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교회칸타타에 수용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합창의 구성 역시 모테트, 카논, 오스티나토 변주곡, 푸가, 서곡 등의 사용으로 새롭고 다채로워졌다. 전체적으로 바이마르 칸타타에서는 다양한 형식이 발전, 실험되었으며, 이후 쾨텐과 특히 라이프치히 시기의 칸타타들에서는 이러한 형식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기보다 폭넓게 확대, 완성되었다.
신교(칼빈파)로 개종한 쾨텐 궁정은 교회음악을 거의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교회칸타타보다 후놀트(C. F. Hunold)의 가사를 토대로 하는 세속칸타타가 주로 작곡되었다. 반면 라이프치히에서는 집중적으로 교회칸타타가 작곡되어, 약 140여곡, 즉 현존하는 바흐의 교회칸타타 약 200여곡 가운데 2/3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처음 7여 년 동안 창작되었다. 바흐는 이 작품들을 교회력에 따라 정리했는데, 현재 그 가운데 3년분(제1년분: 1723-1724, 제2년분: 1724-1725, 제3년분: 1725-1727)의 칸타타가 보존되어 있다. 라이프치히의 시인 헨리치(C. F. Henrich[Picander])의 텍스트를 가사로 하는 1728-1729년의 제4년분 칸타타는 소실되었으며, 1729년 이후의 칸타타들은 개별 곡으로 전해지고 있다. 첫 해분의 칸타타들은 복음서의 성경가사를 갖는 첫 곡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두 번째 해의 칸타타들은 주로 코랄칸타타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코랄 가사들은 내용 해석의 차원에서 자주 변경, 확대된다. 제3년분의 칸타타들은 이전의 칸타타들과 비교해서 그다지 일관된 형태를 띠지 않는다. 따라서 뒤르(A. Dürr)는 이 칸타타들이 두 해분의 혼합체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여기에서는 새로운 내용적, 형식적 구성방식이 관찰되지는 않지만, 옛 기악음악을 도입부의 신포니아로 재수용하는 현상이 눈에 띈다.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칸토르 직에 전념한 처음 10여 년간 그 외에도 ≪마그니피카트≫, ≪요한수난곡≫, ≪b단조 미사≫의 <쌍투스>, ≪부활절 오라토리오≫, ≪마태수난곡≫, ≪마가수난곡≫(Markus-Passion, BWV 247, 1731, 대부분 소실),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등 교회음악의 걸작들이 작곡, 연주되었다.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쳄발로와 감바 연주자였던 안할트 쾨텐의 선제후 레오폴드와 슈피스(J. Spiess), 아벨(C. F. Abel) 등 탁월한 연주자들을 갖추고 있었던 궁정악단이 바흐에게 최적의 음악적 환경과 조건을 마련해준 쾨텐에서 그는 카펠마이스터이자 실내악 감독으로서 기악곡 작곡에 전념했다. 이리하여 바이올린과 플루트, 첼로를 위한 독주소나타와 파르티타, 트리오소나타, 바이올린협주곡, 오케스트라 서곡 등이 창작되었는데, 그 가운에 최고 걸작으로 수년간에 걸쳐 작곡되었으며 브란덴부르크(L. v. Brandenburg) 백작에게 헌정된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Brandenburgische Konzerte, BWV 1046-1051)을 꼽을 수 있다. 이 6개의 콘체르토는 편성과 구조적 형식에 있어 서로 다른 양식을 취하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작품으로 구상되었다. 전반적으로 1번과 3번, 6번 콘체르토는 전통적인 집단적 협주양식으로 분류되는 반면, 2번과 4번, 5번은 새로운 비발디의 콘체르토 유형에 따른다. 즉, 1번과 6번은 앙상블 콘체르토로서, 그리고 2번과 5번은 콘체르토 그로소로서 서로 상응하며, 3번과 4번에서는 각각 3개의 3중 현악기군과 독주 악기군을 통해 양식의 대비가 다시 한 번 분명해짐으로써 전체 작품은 대칭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나아가 이 작품은 새롭고 혁신적인 작법과 양식을 통해 후기바로크의 기악 협주곡을 발전, 통합시킨 합(合)의 음악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쾨텐 시기의 클라비어 작품으로는 대표적으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과 각각 6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영국 모음곡≫과 ≪프랑스 모음곡≫,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널리 연주, 학습되고 있는 이 시기의 교육용 작품으로는 1720년부터 구상된 ≪빌헬름 프리데만을 위한 작은 클라비어곡집≫(Klavierbüchlein für Wilhelm Friedemann Bach, BWV 924-932)과 ≪2성 인벤션≫(zweistimmige Inventionen, BWV 772-786), ≪3성 신포니아≫(dreistimmige Sinfonien, BWV 787-801)가 있다. 클라비어 작품은 1730년대 중반 바흐가 칸토르 직으로부터 내적, 외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다시 부각되었는데, 이 때 그는 특히 클라비어와 오르간 작품 출판에 심혈을 기울였다.
1730년대 중반부터 작곡, 출판된 오르간 작품들은 ≪6개의 소나타≫(Sechs Sonaten, BWV 525-530)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코랄편곡 작품들이었다. 이는 이 시기에 고정선율이나 가사와 연관되는 오르간음악이 바흐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리하여 1739년에는 코랄전주곡들(BWV 669-689)과 E♭장조의 프렐류드와 푸가(BWV 552), 그리고 4개의 듀엣(BWV 802-805)으로 구성되어 있는 ≪클라비어 연습곡 제3권≫이 출판되었고, 1746년에는 쉬블러(J. G. Schübler)에 의해 ≪다양한 양식의 6개 코랄≫(Schübler Choral’, BWV 645-650)이 출판되었다. ≪쉬블러 코랄≫은 완성도 높은 악구 구조를 동반하는 자유롭고 선율적으로 풍부한 대선율들이 경쟁하듯이 주요 선율요소로서의 고정선율과 대비를 이루는 새로운 유형의 오르간 코랄이이며, 그 가운데 BWV 646을 제외한 나머지 5개의 코랄은 칸타타 아리아의 편곡이다. 1748년에는 바흐가 미츨러(L. Mizler)에 의해 라이프치히에 설립된 ‘음악학 협회’(Societät der musikalischen Wissenschaften)의 회원이 된 것을 기념해 1746-1747년에 작곡한 ≪’높은 하늘에서 나는 왔도다’에 의한 카논 변주곡≫(Einige canonische Veränderungen über das Weihnachtslied “Vom Himmel hoch, da komm ich her”, BWV 769)이 출판되었다. 클라비어 작품으로는 6개의 파르티타가 ≪클라비어 연습곡 제1권≫(BWV 825-830)으로, ‘이탈리아의 취향에 따른 협주곡’ (BWV 971)과 ‘프랑스 양식의 서곡’ (BWV 831)이 ≪클라비어 연습곡 제2권≫으로-유럽 음악의 두 주요 양식에 대한 작곡가의 능력을 증명하는 작품으로서-, ‘다양한 변주들을 동반하는 아리아’(일명 ‘골드베르크 변주곡’)가 ≪클라비어 연습곡 제4권≫(BWV 988)로 각각 1731년과 1735년, 1741(1742?)년에 출판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바친 ≪음악의 헌정≫은 바흐의 예술적 능력과 작곡을 학문으로 이해한 바흐 음악관의 단면을 직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2곡의 리체르카레와 10곡의 카논, 1곡의 트리오소나타로 구성된 이 불후의 걸작은 바흐가 1747년 5월 포츠담을 방문했을 때 즉흥연주를 위해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받은 주제(“Thema regium”)를 토대로 한다. 3성부의 첫 리체르카레는 바흐의 즉흥연주를 악보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6성부로 이루어진 두 번째 리체르카레는 더욱 조밀하고 엄격한 작곡 양식을 보인다. ≪음악의 헌정≫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왕의 주제”를 극도로 다양하게 전개하는 다수의 카논인데, 그 중 반복구조 안에서 끝을 맺지 못하는 <첫 카논>(Canon perpetuus)은 주제를 고정선율처럼 취급하는 2성부, 혹은 3성부의 5개 카논 그룹의 도입부 역할을 한다. <5도 카논 푸가>(Fuga canonica in epidiapente)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베이스 위에서 2성부 카논이 전개된다. 2성부와 4성부의 <수수께끼 카논>(Quaerendo invenietis)은 단성부로 기보되어 있는데, 이 때 음자리표의 종류와 위치가 개별성부들의 음고와 진행을 지시해준다. 변화된 작곡기법 안에서 첫 카논과의 연관성을 유발하는 마지막 <무한 카논>(Canon perpetuus) 앞에는 플루트와 바이올린, 계속저음을 위한 4악장 구성의 트리오소나타가 위치하며, 이 트리오소나타는 다른 음악적 맥락 안으로 끌어들여지는 주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주제의 원형은 두 번째 악장에서만 나타나고, 나머지 세 악장에서는 주제가 ‘배후’에 머문다. 바흐는 이 트리오소나타에서 당시 궁정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음악양식과 악기편성을 따랐다.
≪음악의 헌정≫과는 달리 바흐의 자유의지로 창작된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 1080, 1740-1746)은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함께 여러 개의 개별악곡으로 구성된 대작들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며, 동시에 바흐의 예술성과 독창성, 대위법의 진수로서 음악예술의 역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푸가의 기법≫은 바흐 음악의 특징인 전통의 수용, 그리고 그 전통의 새롭고 고차원적 실현을 대표한다. 이 작품의 강한 전통성은 우선 푸가와 카논의 형태로 표출되는 대위법에서 명시된다. 단 하나의 주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 대규모 대위법 작품에는 그 외에도 감정적 요소, 수사학, 상징성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푸가의 기법≫에서 바흐는 단순푸가, 2중푸가, 3중푸가, 전위푸가, 카논 등의 다양한 종류의 푸가뿐 아니라, 전위, 역행, 확대, 축소와 같은 푸가의 전통적 작곡기법, 그리고 그 외의 통상적인 음악적 구성 수단, 즉 점리듬, 3연음, 강도 높은 반음계, 특정 음정이 두드러지는 도약음형, 빠른 16분음표의 움직임 등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각각의 개별 푸가에는 하나나 여러 개의 작품 구성적 아이디어가 내재한다. 더불어 리듬의 재구성, 음들의 첨가나 생략을 통해 푸가의 주제에 변화가 가해지기도 한다. ≪푸가의 기법≫은 바흐의 어느 작품보다도 신비에 쌓인 작품인데, 이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으며, 사용악기의 지시가 없고, 또한 개별 악곡들의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B-A-C-H의 대주제가 처음으로 출현하는 부분에서 중단되는 이 작품의 특성에 기인한다.
바흐의 음악사적 업적은 후기바로크의 다양한 전통 양식들을 수용하고 융합하여 이것들을 이상적인 미래의 음악을 예시하는 미학적 차원으로 올려놓았다는데 있다. 이러한 바흐의 예술작품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시작해 1740년경 남부 독일, 특히 만하임과 빈에서 정점에 이른 새로운 반바로크적 음악양식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탄생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바흐의 엄격하고 난해하며 ‘학문적인’ 음악은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19세기초 멘델스존(F. Mendelssohn-Bartholdy)의 ≪마태 수난곡≫ 바흐 사후 재연(1829)을 통해 드디어 재발견된 바흐의 음악은 이후 음악예술에서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갔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예술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 예술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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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자: 20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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