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판(原典板, 도. Urtext-Ausgabe)
1990년대에 들어 한국의 피아노 전공자들 사이에서 “원전판”이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이는 그전에 한국의 출판사들이 복사하여 많이 쓰던 페터스 출판사(Peters Edition)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악보를 의미했다. 페터스 출판사의 것은 “원전판”의 범주에 들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악보출판사들은 기존의 악보를 버리고 외국에서 원전판을 수입하거나 외국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원전판을 복사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국의 피아노 악보 시장에는 원전판이 아닌 악보들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원전판”이라는 악보는 실용적 악보이면서도 학술적 성과를 포괄한다. “원전판”의 모델은 이른바 “비평판”(Kritische Ausgabe)이다. 비평판은 전해오는 여러 악보들에 대한 엄격하게 학술적으로 검토하면서 만들어진다. 이러한 학술적 검토를 “원전비평”(Quellenkritik)이라고 부른다. 원전비평은 음악이 여러 악보들을 통해 전해 내려오면서 변질되는 과정을 밝혀내고 원래의 음악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모든 악보들에 관한 원전비평 작업은 가능하다. 하지만 원전비평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자주 연주되는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작품들은 수없이 많이 출판되면서 원전과 멀어지는 모습들을 많이 보여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쉽게 살 수 있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악보들 중에는 전해져 내려온 과정에서 덧붙여진 것, 탈락된 것, 고쳐진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니까 그런 악보는 작곡된 이후에 타인이 개입한 역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음악학자들은 본래의 악보인 “원전”의 확보에 고심한다.
흔히 원전(영. Original source, 도. Quelle)이라고 불리는 악보들은 작곡가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한 기록물이나 출판물을 의미한다. 중요한 원전의 범위에 드는 것은 작곡가의
-자필본,
-정사본(淨寫本, 작곡가 자신 또는 직업적 필사가들에 의한 것),
-초판본,
-작곡가가 승인한 개정본
등이다. 이 원전들이 서로 다를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럴 경우 내용에 음악 논리적 오류가 있을 경우에는 오류가 없는 쪽을 취한다. 하지만 틀린 면을 보여주지 않을 경우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할지 때로는 결정이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원전에 해당하는 악보가 존재하지 않는 음악이 많다는 것이다. 원전의 확보가 쉽지 않은 경우는 어떤 것이 더 원전에 가까운 것인지를 가려내는 것이 원전비평의 일이다.
하지만 원전은 없고 베낀 악보들이 더 많다. 악보출판업자들이 작곡자의 본래 음악을 고려하지 않고 상업적으로 만든 악보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곡가 주위의 사람들이 -예를 들어 제자가- 작곡자 몰래 필사본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 때에도 원본과 차이점이 나타난다. 또한 연주가들은 자신이 음악을 고치거나 첨가하여 악보를 출판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 중에는 상당한 수의 가짜 작품들이 존재한다. 이는 후대의 출판업자나 음악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가짜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고, 유명 작곡가의 것으로 잘못 알고 그렇게 표기되어 전해오는 경우도 있다.
1)비평판 악보는 대개 다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비평판 악보는 주로 한 작곡가의 “작품전집”(Gesamtausgabe) 형태로 발행되는 경우가 가장 많다. 그러나 모든 전집이 모두 비평판은 아니다. 비평판은 음악학자들에 의해 모든 관련 자료들이 검토된 세부적 사항들을 - 대개 별책으로 이루어진 보고서를 통해 -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악보에 사용된 첨가 기호나 사용 활자의 차이 등에 대한 설명도 되어 있다. 비판적 보고서는 원전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그 내용과 형태에 대해 말하고, 원전들 간의 상호 의존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원전들에 있는 추가적인 첨가 부분들에 대한 설명도 포함된다. 한편 편집자에 의해 보충된 부분들은 다른 활자체로 표기하여 그것이 편집자에 의해 보충된 부분임을 명확히 한다.
2)원전판 악보.
이 악보는 비평판 악보가 성취한 성과를 기준으로 삼는다. 비평판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여 원 작곡가가 쓰지 않은, 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첨가된 부분들을 원칙적으로 피한다. 그리고 원전과 다른 내용을 기록해야할 경우에는 학술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첨가부분들만을 허용한다.
원전판 이전에는 이른바 “재편집악보” 악보가 많이 통용되었다. 이 악보 종류는 손가락 번호(피아노 음악, 활의 올림과 내림(현악), 프레이즈 표기 등을 첨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으로 원래의 악보를 변형시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원래 piano와 forte의 기록이 없는 악보에 이를 집어넣는다든지, 또는 그것이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을 경우 이를 pp, ppp 또는 ff , fff 등으로 더 세분화시켜 기록하기도 한다. 또한 f를 sf로, p를 leggiero와 같이 바꾸어 적는 경우도 있다. 또한 어떤 부분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새로운 연주지시어를 적어 넣기도 한다(risoluto, pesante 등). 그런가 하면 현재의 음향적 상황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셈여림기호, 프레이즈 나누기 등을 첨가하는 경우들이 있다(H. v. B low, M. Reger, F. Busoni).
한국의 출판업자들은 원전판의 지배 이후 악보 출판업자가 되지 못하고 단순히 악보 수입상이나 중개상으로 전락했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아직도 저작료를 지불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런 점은 아직 한국에 원전판을 만들 수 있는 음악학적 토대가 없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러한 허약한 토대는 음악 분야만이 아닌, 경제 분야에서도 대단히 민감한 문제를 불러온다.
홍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