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퐁논쟁(도.Buffonistenstreit, 영.buffon's quarell, 프.querelle de bouffons)
1752년 8월 빠리. 페르골레지(Pergolesi)의 『하녀 마나님』(La Serva Padrona)의 두 번째 공연되었다. 이 때 이른바 “부퐁논쟁”이 벌어진다. 그 음악은 당시의 주도적 이었던 오페라 세리아의 것과는 다르게,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음악이 청중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을 프랑스의 철학자 쟝 쟈끄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높이 평가했다. 루소는 프랑스에서도 음악적인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프랑스의 전통주의자들은 그의 생각에 반대했다. 라르프((LaHarpe), 그림(Grimm), 디드로(Diderot) 등 이름있는 백과사전학파는 모두 루소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개혁주의자들(이태리파)과 전통주의자들(프랑스파)의 싸움은 시민전쟁에 흡사한 것이었다. 부파 오페라의 지대자들은 극장에서 프랑스 오페라가 연주되면 소란을 피워대, 경찰이 동원되어야 진정될 정도였다. 반대파 역시 같은 수준으로 공격적이었다. 왕실도, 당시 막강한 권력자였던 마담 퐁파두르(Pompadour)도 이 논쟁에 참여했다.
프랑스 음악의 옹호자들은 라모(Rameau)와 륄리(Lully)를 중심막?그룹을 이루었다. 이들의 음악은 루소에 의해 전면적으로 부정된다. 루소는 프랑스 음악에 "리듬. 박절. 멜로디가 없다"고 말하고, "프랑스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라고 결론 짓는다. 그는, 프랑스어가 너무 많은 자음과 콧소리로 음악에 부적당하고, 시행(詩行)이 너무 복잡하여, 멜로디에 부담을 주고, 거기에다 너무 오케스트라 편성이 두텁고 현학적인 폴리포니 사용이 심한 것을 지적한다. 그는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멜로디의 통일성"(unité de Mélodie)을 가진 음악을 추구한다: "음악이 청중의 참여를 북돋고, 영혼에서 의도된 감정이 일깨워질 수 있도록, 모든 부분이 표현의 강화를 위해 통합되어야 한다. 곡은 이의 강화를 위해서만 기여해야 하고 반주는 이를 덮어 버리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아름답게만 해야 한다. 저음부는 가수와 청중을 일률적인 단순한 움직임을 통해 이끌어야 한다." 루소는 음악적 자연현상처럼 보이는 멜로디를 생각해서 만드는 화성보다 더 우위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라모는 화성이 멜로디에 우선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1)멜로디가 감정을 전달하지만 비이성적인 것이며, (2)화성은 이성적으로 규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멜로디가 화성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이에 비해 루소는 언어, 시, 음악의 통일체를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오페라의 시작과 함께 계속 있어 온 것이었으나, 음악적 기교에 짓눌려 잊혀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태리 음악파들은 결국 음악적 반민족주의자들로 지탄받았고, 1754년 이태리 오페라단은 프랑스에서 추방된다.
하지만 이태리 음악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보랑(Pierre Baurans)은 『하녀 마나님』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La Servante Maîtresse라는 이름으로 1754년 빠리의 이태리 코메디(Comedie italienne) 극장의 무대에 올린다. 몇 개의 곡들이 더 첨가되었고, 레치타티보는 그냥 말로 했으며, 등장인물들은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페르골레지의 이 음악은 다음에 오는 프랑스 음악에 영향을 준다. 그 결과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새로운 프랑스 오페라가 발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페라 코미크였고, 작곡가들은 루소, 몽시니, 두니, 그레트리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등럭일자: 2005-02-18
홍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