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빈 슐호프 (Ervin Schulhoff 1894년 프라하 출생 - 1942년 독일 뷜쯔부르크 수용소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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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독일유태인계 집안에서 태어난 슐호프는 프란쯔 카프카(Franz Kafka) 나 막스 브로트(Max Brod) 그리고 프란쯔 베르펠 (Franz Werfel)과 같은 프라하의 유명한 독일유태인계 예술인에 속하는 음악가이다. 이미 10세 (1904년)때 안토니 드보르쟉 (Antonin Dvorak)의 추천으로 프라하의 콘서바토리에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고 비인 뿐 만 아니라 라이프찌히와 쾰른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지속적으로 배우게 된다. 이 당시 슐호프에게 모범이 되는 작곡가로는 그가 라이프찌히에서 2년간 배웠던 막스 레거(Max Reger)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그리고 드뷔시(Claude Debussy)와 알렉산더 스크리아빈(Alexander N. Skrjabin)을 들 수 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 그의 예술관에 눈에 띄는 변화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1920년대에 그는 독일에서 진보적인 음악으로 여겨지는 좌파 음악 아방가르드를 자신의 음악으로 추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주가로서나 작곡가로서 현대음악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이는 표현주의적 요소와 다다이즘을 연결시키거나 재즈음악의 요소를 전통적인 예술음악의 형식에 통합시키는 형태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923년 다시 프라하로 돌아가 알로하스 하바(Alois Haba)와 함께 사분음음악 (Vierteltonmusik)을 연구 발표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한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여러 가지 관현악작품을 제외하고도 피아노 곡인 "5곡의 유모레스크 Fuenf Humoresken"(1919), "랙음악 Rag-music"(1922), 그로테스크한 무용음악인 "달에 중독 된 여인 Die Mondsuechtige"(1924), "섹스폰과 피아노를 위한 핫-소나타 Hot-sonate fuer Altsaxophon und Klavier"(1930) 그리고 재즈 오라토리오인 "H.M.S. Royal Oak"(1930) 등을 들 수 있다.
20년대와 30년초는 슐호프의 짧은 생애에서 예술적인 전성기로 볼 수 있는데, 그의 작품이 유럽의 곳곳에서 연주(잘쯔부르크, 베네치아, 겐프, 옥스퍼드등)되었고 또한 출판 (유니버살사 쇼트사, 체스터사 등)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게 되자 슐호프의 예술적 활동범위는 점점 제한되어 프라하와 브린의 방송국에서 피아노연주자로 일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당시 그의 20년대의 실험적이고 과격한 예술관이 또 다시 변화 수정된다. 쏘련을 방문한 후 프롤레타리아 음악의 영향을 받아 정치성을 띄는 내용을 선호하고 음악적으로는 보수화 되어 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1939년 독일인이 체코를 점령한 후에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방송국에서마저도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쏘련으로 망명하기 위해 체코에서 비자를 기다리는 중 체포되어 독일의 집단 수용소 뷜쯔부르크(Wuelzburg)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 8월에 폐결핵으로 병사한다.
슐호프는 모두 8개의 심포니를 작곡하는데 6곡은 완성하고 마지막에 쓴 2곡(1941년과 1942년)은 미완성으로 남긴다. 완성된 첫 번째 (1925년)와 두 번째 (1932년)를 빼면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탄생하였으며 "자유주의 심포니"로 부제가 붙은 6번째 곡(1940-41년)부터는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쓴 것이다. 예술의 힘으로 부자유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싸움의 결실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슐호프는 한창 예술적으로 상승하던 유능한 젊은 작곡가가 나치의 득세로 인해 짧은 생애를 마쳐야 했으며 나치의 멸망 후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야 했던 대표적인 예술인 중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경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