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金東振, 1913 평남 안주-2009.8.31서울)
김동진은 목사였던 김화식(金化湜)을 아버지로 두어서,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쉽게 서양음악을 접했다. 1923년부터 그는 안윤덕에게 바이올린 배웠다.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였고, 1929-1936년에 숭실중고등학교 밴드부 지도교사였던 말스베리(Dwight R. Malsbary)에게 음악을 배웠다. 그가 말스베리에게서 주로 배운 것은 바이올린이었다. 말스베리는 학교 교과과정에 따라 그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과외로 가르쳤다. 또한 학교 밴드부의 일원으로 바리톤, 클라리넷 등 여러 악기를 배웠다. 1931년 숭실중학교 5학년(현 고교 2년/18세) 학생으로 『봄이 오면』(김동환 시)을 작곡했다. 김동진은 1932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민요풍의 합창곡인 『당달구』와 『뱃노래』를 작곡하였다. 또한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1932년과 1933년에 각각 『발자국』과 『가고파』를 작곡하였고, 이를 말스베리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이후로 말스베리는 김동진에게 화성학, 대위법, 피아노까지 가르쳤다. 이렇게 김동진은 정식 음악학교 교육을 통해 음악가가 된 것이 아니라, 독학과 말스베리의 개인지도로 작곡가가 되었다. 말스베리는 당시 선교사로서는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좋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쉬카고의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를 졸업했고, 악곡을 다룰 줄 아는 능력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시절에 명창 이동백이 이끄는 창극단이 공연한 ≪춘향전≫과 ≪심청전≫의 창극을 보고 심취했다. 이 때에 그는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가극을 작곡해 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김동진은 가곡 『가고파』(이은상 시)를 통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는 작곡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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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 후 일본고등음악학교로 진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1938년 졸업했다. 1938년 이 학교의 졸업을 앞두고 『양산도를 주제로 한 바이올린 협주곡』 제1악장을 완성했다.
1939년 <만주 신경교향악단>에 입단, 제1바이올린주자 겸 작곡가로 8년 동안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민요 『양산도』를 주제로 한 관현악곡 『양산가』(1943), 관현악곡 『제례악』(1943), 평양지방 상여소리를 바탕으로 한 교향시곡 『만가』(1942) 등을 작곡했다. 또한 대한(對韓) 방송 프로를 위해 『신 아리랑』과 『넝쿨타령』등 수많은 민요를 편곡하였다. 또한 김동명 시에 의한 『내마음』(1940), 『수선화』(1941) 등의 가곡도 작곡하였다.
1945년 김동진은 해방을 맞아 평양으로 돌아온다. 이 해에 그는 평양교향악단 및 합창단의 전신인 <중앙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조직, 지휘였다. 평양에서 그는 관현악곡 『신 밀양아리랑』, 오페라『심청전』을 완성하였다. 이 『심청전』은 나중에 발표되는 1977년 심청전의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되던 해 김동진은 평양음악대학 교수가 되었다. 기독교 집안이라는 그의 출신성분은 그가 활동하기에 불편한 환경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감금되었고, 그의 대중적 『가고파』 역시 불리지 못하게 되었다. 1950년 6ㆍ25가 발발하자 김동진은 서울로 남하했고, 남쪽으로 다시 피난하면서 『행군의 아침』, 『내 조국』등의 곡을 썼다. 1951년 그는 <육군 종군작가단>의 일원이 되었고, 『육군가』 등 수많은 군가를 작곡하였다. 1952년 <해군 정훈음악대> 시절에는 『샘가에서』, 『칠월의 노래』등의 서정적 가곡을 작곡하였다.
1952년 김동진은 숙명여대 음악강사 생활을 하였고, 1953년 서라벌 예대 음악과에서 교수가 되었다. 서라벌 예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김동진은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김동진 가곡의 어떤 것들은 영화의 주제가였다. 『진달래꽃』(1957), 『못잊어』, 『초혼』, 『저 구름 흘러가는 곳』(1960) 등이 그것이다.
50년대 후반은 작곡의 생산성이 비교적 높지 않은 김동진에게 비교적 많은 작품을 작곡한 시기였다. 이 때 그는 가곡, 영화음악, 관현악곡과 -행사와 관련된-교성곡을 포함하여 50여곡의 작품을 썼다.
교성곡은 『민족의 축원』(1967)과 『민족의 행진』(1971)은 모두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을 위한 음악이었고, 『대학찬가』(1969), 『대학송가』(1974)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경희대학교 축전용이었고, 『평화』(1982)는 경희대 이사장 조용식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곡이었다. 그가 작곡한 곡 중에는 조용식이 작사한 것이 『평화』, 『목련화』, 『대학송가』 『조국이여 겨레여 인류여』(1994), 『세계 속의 새 한국』(1996) 등이 있다.
1978년에 초연된 김동진의 가극 『심청전』(작곡:1977)은 그가 숭실전문학교 시절부터 끈질기게 관심을 보여온 판소리의 현대화의 결실이었다. 이 곡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있었던 『심청전』의 개작으로 보이는데, 1930년대 초 현대화된 판소리를 꿈꾸던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이는 무려 40여년이 걸린 기나긴 작업이었다. 그는 이 음악을 “신창악”이라 이름하였다. 신창악은 판소리의 시김새 등의 음악적 내용과 판소리 발성을 서양식 성악에 접목시키는 성격의 것이다. 1979년 그는 신창악 연구회를 조직하여 그 보급에 힘을 썼다. 그의 신창악은 1993년 가극 『춘향전』을 통해 두 번째의 결실을 보았다.
김동진의 음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서양의 보편적 장단조 조성 체계를 바탕으로 한 음악, ②는 한국의 전통음악(특히 판소리와 민요)을 바탕으로 한 음악.
그의 대중성은 주로 첫 번째의 음악으로부터 온 것이다. 『가고파』, 『목련화』, 『내마음』등 그 길이가 상당한 가곡들이 그것들이다, 이런 음악은 선율성을 매우 중시하며, 아마추어가 부르기에는 음역의 넓고, -홍난파나 현제명 등에 비해- 쉽지 않은 편이다. 이 음악은 성악가들의 한국 레퍼토리에서 자주 발견되며, 그들에 의해 대중에게 자주 노출된다. 시원한 성악적 절정 부분을 갖는 이 노래들을 한국의 청중들이 친근하게 생각한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작곡가 자신도 이런 취향에 적극적으로 부응한 흔적을 보여주었다.
김동진에게는 가곡 외에도 관현악곡, 교향시, 신창악이라는 다른 분야가 있으나 이 부분은 덜 알려졌다. 김동진은 자신의 대중적 가곡들보다 신창악을 더 귀하게 생각했다. 그는 판소리의 사소한 부분까지 관찰하여 판소리적 분위기가 나는 한국적이 성악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의 신창악은 판소리로부터 오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 편곡한 것은 아니었다, 판소리적인 바탕 위에 자신의 창작을 덧붙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창악 음악을 민족적인 것의 음악적 표현으로 생각했다. 또한 그의 민요 편곡, 그리고 가야금협주곡과 같은 서양 오케스트라와 전통악기의 협주곡 등에서 그런 생각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는 이런 방향의 음악을 초기부터 일관되게 계속해 왔다. 단지 이 부분이 그의 너무나 대중적인 음악의 뒤편에서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김동진은 그의 긴 생애에 비해 많은 작품을 썼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한 작품을 대단히 오랜 기간에 걸쳐 작곡하는 관습을 보여주었다. 신창악의 완성이 거의 40년 걸렸다는 것, 그의 가곡 『가고파』는 1933년에 일부를 작곡하고 1973년에야 시 전체를 마저 작곡하는, 기다림에 능한 작곡가였다. 그의 오랜 기다림은 자신이 선택한 음악의 범위에서 완성도가 높은 음악을 낳게 했다.
김동진의 작품목록
성악곡:
1931: 봄이 오면/1932: 발자국, 당달구, 뱃노래/1933: 가고파/1934: 파초1940: 내마음/1941: 수선화/1942: 신아리랑/1946: 신밀양아리랑, 부끄러움/1947: 섬색시, 오월의 순풍/1951: 내조국, 샘가에서, 낙동강/1952: 칠월의 노래/1954: 낙동강, 조국찬가, 명태, 농부가, 솔멧골, 나들이, 낯선 마을에서, 추석/1955: 풍년가, 바다로 가자, 농민의 노래/1956: 닐릴리야, 길/1957: 님의 노래, 진달래꽃,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못잊어, 초혼/1958: 창문을 열면, 떡타령, 돌아가자 내고향으로/1959: 그리움/1960: 저구름 흘러가는 곳/1961: 너는/1962: 동해바다/1963: 밤이 내리면 눈이 내리면/1964: 그 강물 다시 흐르리/1966: 충무공의 노래, 충무공/1967: 앞을 보고 살아가자, 잘살기 노래/1968: 탄금대, 한산섬, 봄은 개나리, 청춘의 기를 세워라/1969: 오월의 순풍, 섬색시/1970: 사월의 왈츠, 자장가/1971: 망향가/1973: 가고파(후편)/1974: 목련화, 봄의 왈츠, 우리 강산/1977: 베들레헴의 종
1982: 평화의 노래/1984: 민들레꽃/1985: 도봉,새로운 계절, 망향가, 평양경계가/1987: 소리/1988:사철가,긴농부가, 자진농부가/1990: 백두산/1991: 하나가 되라/199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994: 남산이여 영원하라, 겨울의 아침, 서소문 길섭 눈물다리, 달아달아 밝은달아, 통일이여 어서오라/1998: 한강/2001: 금강산 찬가, 땅끝해송
관현악곡
1942:만가/1943:제례악/1943:양산가/1957:동양적 조곡/1958:가야금 협주곡-가야금산조에 의한 협-/1959:가야금 협주곡
교성곡
1955: 조국찬가/1958: 승리의 길/1958조국/1967: 민족의 축원/1969: 대학 찬가/1971: 민족의 행진/1974: 대학송가/1994: 조국이여 겨레여 인류여/1996: 세계 속의 새한국<내 조국에 영광있으라>/1998: 문화세계 창조<세계 속의 새한국>
가극
1978: 심청전(초연)
1993: 춘향전
참고문헌
김동진, 가곡집 『내마음』, 세광출판사, 1973.
-----, 가곡집 『목련화』, 세광출판사, 1978.
-----, 자전에세이 『가고파』, 성광사, 1982.
-----, 판소리 채보 춘향전, 도서출판 주류, 1985.
-----, 『한국정신음악 신창악곡집』, 도서출판 주류, 1986.
-----, 가극 『심청전』, 재순악보출판사, 1990.
-----, \\\\”한국정신음악 신창악\\\\”, 『아시아음악학총서 3』, 중앙음악연구소-아시아음악학회, 2001, 12, 1-108쪽.
나진규: 김동진의 가곡 『가고파』에 나타나는 음악구성 요소들의 변화가 갖는 의미, 『음악학이란?』-음악학 4-, 음악연구회 편, 세종출판사, 1988, 183-205쪽.
나진규: 김동진의 가곡 『수선화』에서 가사와 음악의 관계 『음악과 민족』 민족음악악학 회 2001(제21호), 207-227쪽.
신인선: \\\\”작곡가 김동진\\\\”, 『음악과 민족』 제26호, 2003.
권경란: 선교초기 선교사들의 음악활동에 관한 고찰(1930년 이전에 활동한 선교사 중심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5.
신인선/홍정수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김동진(金東振, 1913-2009)
- 1913년 3월 22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
- 목사였던 부친 김화식(金化湜)의 영향으로 서양음악을 쉽게 접함.
- 1923년부터 안윤덕에게 바이올린을 사사함.
-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 음악이론을 통해 작곡가로서의 기본을 배우기 시작함.
- 1929-1936년까지 숭실전문학교 음악선생이었던 미국인 말스베리(D. R. Malsbary, 한국이름: 마두원’馬’斗元)에게 바이올린, 피아노, 화성학과 작곡법을 배움. 숭실학교 밴드의 일원으로 바리톤, 클라리넷 등 광범위하게 여러 악기를 다룰 수 있는 기회를 가짐.
- 숭실중학교 5학년(현 고교 2년/18세)때 ≪봄이 오면≫(김동환 시, 1931)을 작곡함.
- 1932년 숭실중학교를 졸업. 그 해에는 한국적인 가곡 ≪당달구≫와 ≪뱃노래≫ 등을 작곡함.
- 평양 숭실전문학교 시절에 명창 이동백이 이끄는 창극단의 ≪춘향전≫과 ≪심청전≫ 창극 공연을 보고 우리 한국의 가락과 장단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판소리를 바탕으로 가극을 만든다면 세계성을 갖춘 최고 수준의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고, 이후 평생 작업으로 이를 구체화함.
- 숭실전문학교 2학년 때인 1933년 작곡가 김동진의 이름에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가곡 ≪가고파≫(이은상 시)를 작곡함.
- 193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전문적인 음악적 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함.
- 일본고등음악학교 기악과(바이올린 전공, 1938년 졸업) 재학 기간 동안에도 ≪양산도를 주제로 한 바이올린협주곡≫(1938) 제1악장을 완성함.
- 일본고등음악학교 졸업 후 김동진은 만주신경교향악단에 입단(1939)하여 제1바이올린주자 겸 작곡가로 활동함.
- 이 악단의 지휘자(오스카준, 사이토 히데오)에게 지휘법과 관현악법 지도를 받으면서 지휘자로서 그리고 관현악곡 작곡가로서의 터전을 마련함.
- 학창시절부터 품고 있던 한국적인 작품을 쓰려는 노력과 서양적 관현악법의 결과물로서 ≪양산도≫를 주제로 한 관현악곡 ≪양산가≫(1943), 관현악곡 ≪제례악≫(1943), 평양지방에서 부르는 상여소리를 바탕에 둔 교향시 ≪만가≫(1942) 작곡함.
- 만주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그리고 작곡가와 판소리 연구가로 활동하던 당시 예술가곡 분야에서도 그는 김동명 시에 의한 ≪내마음≫(1940), ≪수선화≫(1941) 등을 작곡함.
- 1945년 만주국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김동진은 평양교향악단 및 합창단의 전신인 중앙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조직하였고 지휘자로 활동함.
- 평양음악대학 교수(1945)로 근무함.
- 1950년 6ㆍ25가 발발하자 김동진은 12월 4일 대동강 다리를 건너 월남함.
- 1951-1953년 육군 종군작가 단원으로 활동하며 많은 군가를 작곡함.
- 1952년 해군 정훈음악대 창작부장으로 있으면서 작곡과 지휘에 종사함.
- 육군 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하면서도 ≪샘가에서≫(양명문 시)와 같은 서정적 가곡을 작곡함.
- 1952년 숙명여대 음악강사, 1953년 서라벌 예대 음악과 교수에 임명됨.
- 서라벌 예대 재직하면서 김동진은 생활의 한 수단으로 영화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함.
- 김소월 시에 의한 ≪진달래꽃≫(1957), 김용호 시에 의한 ≪못잊어≫, ≪초혼≫, ≪저 구름 흘러가는 곳≫(1960)을 영화의 삽입곡으로 작곡함.
- 50년대 중반 이후에는 관현악곡, 협주곡 그리고 관현악 반주에 의한 교성곡을 작곡함.
- 1963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1964년 교수로 승진함.
- 그의 교성곡 작곡은 대학의 후원체계와 60년대 중반 이후 두 번의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축하공연을 위해 작곡된 ≪민족의 축원≫(1967)과 ≪민족의 행진≫(1971)으로 계속됨.
- 경희대학교에서 1974년 음악대학 학장으로 임명. 1978-2002년까지 명예교수로 후학 양성.
- 한국적 오페라인 가극의 창작, 나아가 국악 연주 효과에 대한 연구 그리고 신창악에 대한 연구는 1978년 가극 ≪심청전≫의 초연으로 결실을 봄.
- 1979년 ‘신창악 연구회’를 조직하여 신창악연구ㆍ보급운동을 전개.
- 1982년 6월 26일 제18회 신창악발표회를 국립극장에서 개최함.
- ‘우리 판소리의 정신과 멋의 기법을 이어받아 현대에 적응시켜 올바르게 발전시키고자’하는 의도를 담은 신창악 연구는 1993년 가극 ≪춘향전≫을 통해 두 번째 커다란 결실을 내놓음.
- 2003년 5월 30일 ‘한국작곡가회 창립 30주년 기념 작곡세미나’에 참석하여 자신의 예술가곡과 신창악에 대한 강연.
- 수상경력: 부일영화음악상(1962, 1970), 청룡상 수상(1966), 대종상 수상 (1967), 서울시문화상(1967), 문화훈장 모란장(1973), 3ㆍ1문화상(1974), 대한민국예술원상(1982).
- 작곡집: ≪내마음≫(세광음악출판사, 1973), ≪목련화≫(세광음악출판사, 1978), ≪한국정신음악, 신창악곡집≫(주류출판사, 1986-신창악집 음반), 조국광복 50주년 기념 칸타타 ≪세계 속의 새한국≫(재순악보출판사, 1996/피아노 악보, 1998년 교성곡 ≪문화세계 창조≫라는 제목과 관현악 악보로 재출판) 등 다수.
- 2009년 7월31일 향년 96세로 서울에서 별세.
김동진은 주체적 민족음악의 수립이라는 자신의 창작관을 조성음악의 영역에서 구현했다. 이는 그를 대변하는 가곡뿐만 아니라 한국적 음악을 이루고자 하는 신념의 결실인 ‘신창악’ 작품과 그 음악어법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는 50년대 이후 한국 창작계에 들어온 현대적 물결 속에서도 ‘현대 수법이건 옛날 수법이건 창작품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곡’이어야 한다는 신조와 ‘옛 것과 새 것만을 논할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쁜 것을 논해야 한다’는 자신의 미학관을 조성음악 속에서 펼쳤다.
김동진의 작품들을 장르에 따라 나누어 본다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가곡과 함께 전 창작시기에 걸쳐 작곡가가 심혈을 기울인 장르인 ‘신창악’, 그리고 교성곡을 들 수 있다. 가장 많은 가곡이 작곡된 시기(월남이후 1951년 ‘육군종군 작가단’으로, 그리고 1952년 ‘해군 정훈음악대’ 창작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와 환도 후 영화음악을 작곡하던 시기)를 중심으로 김동진의 가곡은 두 가지 유형, ‘어야지여 어야지여’로 시작되는 대동강 뱃사공들의 소리를 발전시킨 ≪뱃노래≫(1932), 달구질하는 소리를 주제로 합창곡 ≪당달구≫(1932)와 같은 ‘한국민요적 가곡’과 ≪가고파≫와 같은 ‘예술가곡’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가곡 유형인 ‘국민가곡’(50년대 이후 위촉을 받아 작곡된 ≪충무공의 노래≫, ≪앞을 보고 살아가자≫, ≪잘살기 노래≫ 등)이 첨가될 수 있다. 한국 민요적 가곡의 유형에 포함시킬 수 있는 가곡, 예를 들어 ≪뱃노래≫, ≪당달구≫, ≪신밀양아리랑≫, ≪명태≫, ≪농부가≫, ≪신아리랑≫ 등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첫 번째의 음악적 특징은 5음음계의 사용이다. 한국 민요적 가곡의 두 번째 특징은 3박자 체계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전통민요적 성격의 표현에 적합한 3박자 외에도 악곡의 진행 속에서 두드러지는 잦은 3연음부, 당김음, 앞꾸밈음 등의 사용은 또한 민요적 가곡의 리듬적 특징으로 드러난다. 또한 세 번째 특징으로 서양음악에서의 화성적 진행을 약화시키는 3화음에서 3음을 생략한 4도와 8도의 도약 진행은 ‘민요풍으로’라는 작곡가의 의도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김동진의 한국 민요적 가곡 유형의 네 번째 특징은 완전 4도 상, 하행(완전 5도 하, 상행)의 도약 진행과 그에 이어지는 2도 진행(새야화현)을 들 수 있다. 또한 ≪뱃노래≫와 ≪당달구≫에서는 “새야화현”의 역행형에 의한 선율적 움직임(장2도 상행+완전4도 하행)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또한 3화음적 성격을 찾을 수 없는 민요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김동진은 이러한 구체적 음악언어 뿐 아니라, 양명문의 시가 포함하고 있는 낭만성과 민족적 정서에 흠뻑 젖어 그의 시에 의한 가곡 ≪명태≫, ≪농부가≫, ≪솔맷골≫, ≪나들이≫, ≪낯선 마을에서≫, ≪추석≫ 등을 작곡하였다. 그 속에서 작곡가는 민족음악에 바탕을 둔 그의 창작 사고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민요풍의 ≪명태≫는 이러한 음악적 사고 하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고 작곡가 스스로 평가했다. 양명문의 시에 의한 이러한 가곡들은 그가 창작 초기부터 작품 속에서 추구하였던 민족음악적 작품의 구현을 대변하는 작품들이었다.
김동진의 수많은 가곡 가운데 예술가곡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할 것이다. 영화음악 작곡으로 접하게 된 김소월의 시, 그리고 이은상의 시조를 가곡화한 예술가곡 가운데 ≪가고파≫, ≪못잊어≫, ≪내마음≫, ≪수선화≫, ≪진달래꽃≫,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등과 같은 애창 가곡들은 한국 민요적 가곡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우선 이 곡들에서는 조성적으로 민요적 음계의 사용을 찾아볼 수 없다. 악곡의 시작 부분과 종지 부분에서의 명확한 조성적 성격 외에도 선율 진행에 있어서의 3화음의 분산화음 사용은 서양화성적 성격을 강하게 보여준다. 그의 예술적 가곡의 두 번째 특징은 낭송적 부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서정적 선율선이 강조되는 노래에 이은 낭송적 부분은 시어의 낭송을 통한 그 의미 전달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김동진 예술가곡의 특징으로 언급할 수 있는 내용은 피아노 반주에 대한 것이다. 우선적으로 이 부류에 속하는 가곡들의 전주는 성악성부의 처음 부분을 예시하고 있으며, 후주를 가지고 있는 가곡은 아주 드물다. 예술 가곡의 유형으로 위에서 언급된 작품들 가운데 ≪내마음≫만이 후주를 가지고 있으나, 그 역할은 노래 처음 부분의 반복을 통해 여운을 남기는 정도에 그친다. 후주에 비해 간주를 포함한 가곡은 그 수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간주의 역할 또한 19세기 독일 예술가곡에서의 그 역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 가곡의 유형들 가운데 ≪내마음≫의 중간부분, 전반부의 클라이맥스 이후에 이어지는 간주는 19세기 예술가곡에서의 간주의미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작곡가는 그의 가곡에서 서정적인 선율선을 잘 드러내기 위해 충분한 반주형을 택한다. 단순한 화음 반주, 선율선을 담고 있는 화성적 진행과 분산화음, 아르페지오 음형 등이 한 가곡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기는 하지만 선율적인 노래 성부를 뒷받침한다는 목적성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이러한 피아노 반주의 형태는 독일 예술가곡에서의 피아노 반주가 가지는 성악 성부와의 이중주적 의미로의 해석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의 예술적 가곡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반주의 특징은 그의 가곡을 이탈리아풍 노래의 유형에 가깝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이를 또한 뒷받침하는 음악적 요소들은 위에서 언급된 낭송적 부분, 아리아를 연상시키는 멜리스마적 선율이다. 그의 가곡에서 자주 등장하는 리타르단도, 페르마타, 아첼레란도 등의 당기고 늦추고 하는 음악적 지시어는 그의 가곡을 더욱 더 서정적이고 선율적인 이탈리아풍 노래에 가깝게 하는 요소이다.
한국적인 오페라를 만들고자 하는 의욕으로 시작한 판소리 연구는 신창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구축했는데, 이는 가곡과 함께 전 창작시기에 걸쳐 작곡가가 심혈을 기울인 장르이다. ‘판소리의 정신과 창법의 멋을 올바르게 이어받아 현대 서양음악 기법과 과학적인 발성법으로 노래할 수 있게 최고수준으로 창작된 성악음악’인 신창악이 한국 정신과 주체성을 담고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심청전≫의 초연 그리고 1979년 <신창악 연구회> 조직에 기인한다. 신창악이란 결과는 작곡가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한 1930년대 초 달구질하는 소리를 주제로 합창곡 ≪당달구≫와 대동강 뱃사공들의 소리를 발전시킨 ≪뱃노래≫를 시작으로 한 것이다. 가곡으로 시작한 그의 자주적 민족음악 수립의 첫걸음은 판소리를 접하면서 한국적 가극 작곡이라는 큰 걸음을 내딛는다. 김동진은 ≪심청전≫의 작곡 진행에서 작품들이 너무 단순한 민요적인 것으로 또는 서양음악에 가깝게 진행되는 난관을 맞이한다. 국악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인한 난관을 그는 정정렬계 레코드를 통하여 판소리 ≪춘향전≫을, 김창룡계 레코드를 통하여 ≪심청전≫을 3년간 듣고 배우고 악보로 채보하여 창법을 연구하는 것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 연구의 과정들 속에서 그는 판소리 채보 방법을 연구하는 데서 많은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1940년대에 착수하고, 잠시 판소리 연구로 뒤로 밀어 두었던 ≪심청전≫의 작곡이 1978년에 완성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그의 연구는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계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신창악 연구가 본격화되고 그 결과물로서 ≪심청전≫과 ≪춘향전≫이 작곡되기까지는 창작 초기부터 이루어진 판소리 채보, 국악편곡, 민요 채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판소리 연구를 하는 데 있어서 판소리의 음정이 서양음악의 평균율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정확한 음정 표기의 어려움은, 판소리에 가까운 평균율 음정의 음계를 설정하면서 극복하였다. 또한 서양발성법에 의한 목소리로 창의 기교를 터득하고 새로운 멋을 찾으려는 노력은 판소리가 아니면서 판소리에 가깝게, 서양의 과학적인 발성과 공명법 그리고 한국말의 발음을 똑똑히 할 수 있는 방법의 새로운 발성법과 발음법을 개척하였다. 현대 감각에 맞게 세계성을 띠게 하기 위한 의도로 신창악에서 보여준 음계와 발성법에 대한 노력 외에도 작곡가는 한국 고유의 리듬을 변화시키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판소리에 쓰이는 기본장단, 즉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굿거리, 세마치 등을 사용하나, 변화된 방식으로 하였다. 바로 이러한 장단의 변화는 신창악의 또 하나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김동진이 신창악에서 시도한 장단의 변화는 기본 장단을 다양한 종류의 리듬으로 묶는 혼합리듬에 의한 것이었다. 변박자 또한 판소리에 사용되는 기본 장단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그의 신창악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장단의 변화는 언어상의 액센트를 따르기 위한 것 일뿐만 아니라, 악곡의 진행에 멋을 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박자와 혼합리듬을 통한 장단의 변화를 수반하는 악곡은 기본 장단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신창악 작곡에 있어서 두 번째 중요한 과제는 선율 작곡이었다. 판소리의 가사만 다를 뿐 선율이 비슷하여 단순하다고 판단한 김동진은 특히 신창악의 선율 작곡에 있어서 선율의 변화와 서양음악의 기법 결합을 시도하였다. 신창악의 다양한 선율 작법은 리듬어법에서 언급한 변박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창악에서 의미하는 다양한 선율이란 한국적인 정서와 감정의 표현이라는 목적을 담고 있는 것으로 서양음악 어법인 다양한 전조가 이에 수용되었다. 다양한 전조를 통한 한국적 정서와 감정의 표현이라는 내용은 신창악의 선율 작곡이 조성에 의거하여 작곡되었음을 증명한다. 판소리의 평조, 우조 계면조라는 창조(昌調)를 김동진은 자신의 민요적 가곡에서와 같이 서양의 조표를 사용하여 전환하였다. 비록 조표를 가지고 있지만 선율과 반주에서의 장ㆍ단조 음계의 제4음의 부재 그리고 제7음 이끔음으로의 기능부재 등은 5음음계에 의한 작곡기법을 명확히 제시했다. 또한 김동진은 판소리의 특징인 ‘농현법과 장식음의 표현’을, 서양음악의 장식음 기보와 리듬의 분할을 통하여 그리고 새로운 표기법을 통하여 신창악 선율 작곡에 활용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8년간 근무한 만주신경교향악단에서 관현악법을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소수 관현악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창작 초기의 관현악곡은 민족음악에 대한 열망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에게 관현악 작곡의 두 번째 기회는 전쟁의 폐허 복구와 함께 서서히 활기를 띠게 되는 연주회와 함께 왔다. 이러한 대규모 연주회를 위해 위촉받아 작곡된 관현악이 포함된 대규모 작품들은 시대의 반영과 작곡가 자신이 음악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민족음악의 성향을 품고 있었다. 정부수립 10주년 경축음악회를 위해 작곡한 교성곡 ≪승리의 길≫의 서곡에선 서양 오케스트라와 가야금의 협연을 시도하였고, 서양음악과 동양음악의 이러한 만남을 통해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민족음악을 위한 국악연주 효과에 대해 실험하였다. 1959년 이 서곡을 김동진은 ≪가야금협주곡≫으로 추가 작곡해서 발표하였다. 1961년 5ㆍ16혁명 100일제 경축음악회에서 연주된 교성곡 ≪조국≫은 <조국의 광복>, <조국의 수난> 그리고 <조국의 재건>의 3부로 이루어진 위촉 작품이었다. 이러한 교성곡의 작곡은 그의 창작세계에 대한 조망에 앞서 당시 사회적 반영을 강하게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연주 인원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악곡의 창작은 연주를 위한 경제적 조건으로 인하여 대부분 위촉이 아니면, 성사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성곡 창작은, 그의 가곡 창작의 중심적 사고인 서정성과 낭만성보다는, 전쟁 이후의 한국 사회와 정부가 요구하는 것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 후원 속에서 작곡된 교성곡 ≪대학송가≫에 포함된 <목련화>는 작곡가의 강한 낭만적 성향을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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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자: 2010.7.17
[신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