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金聖泰 1910.11.9.서울- ,호: 요석'樂石', 일본명:金城聖泰)
작곡가. 김성태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어릴 때에 서양음악을 교회에서 접했다. 그는 18세(1927,경신중학교 2년)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편입학하여 일본 중학교를 졸업했다(교도 양양중학교1930-31). 한국으로 돌아와 잠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축구 특기자로 다니면서 현제명과 채동선에게 작곡을 배웠다. 현제명과의 만남은 두 사람이 거의 인생의 동반관계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성태는 동경 고등음악학교 (현 구니다치 음악대학)를 입학하여 작곡을 공부하였고, 1939년에 졸업했다. 귀국한 그는 경성보육학교 합창단 상임지휘자(1939-1945)와 보성전문학교 음악강사로 활동하였다. 1943년에는 만주신경교향악단에 입단했다. 당시에 영화 {사랑과 원수}의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 채동선이 설립한 고려교향악단의 객원지휘자(1945-1946)로 지내면서 현제명이 설립한 경성음악학교에서 가르쳤다. 경성음악학교가 서울대학으로 편입된 1946년부터 정년이 된 1976년까지 서울대 음대 교수로 지냈다. 이 학교에서 그는 장기간 학장 직을 맡았다(1960-1976). 1955-1956년의 일년간 미국 인디애나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1969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한국방송윤리위원회 위원(1971), 예술원장(1993), 주식회사 예음 대표이사(1984)를 지냈다.
김성태는 화려하고 기나긴 경력에 비해 작품 수가 매우 적다. 또한 뛰어나거나 대단한 크기의 작품도 없다. 그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조성을 바탕으로 한다. 대중적인 {이별의 노래}와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또한 한국 민요를 바탕으로 한 기악곡 역시 기본적 장단조 화성에 바탕을 둔 것이다(예: {한국기상곡}). 실험적인 가곡에서는 약간의 조심스러운 모험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실험이 일정한 작곡 시스템에 이르지 못했다. 김성태는 당대 세대의 작곡가들이 보여준 서양음악의 수용, 한국 전통음악과의 융합, 약간의 현대성을 보여준다.
수상경력:
아시아영화제 최우수영화음악상(수상작: {흙},동경,1960)
문화훈장 대통령장(1962),
국민훈장 동백장(1976),
예술원상
5.16 민족상(1985)
3.1문화상(1981)
작품목록
관현악
{한국기상곡}'코리안 카프리치오'(요석악서1, 1944, 초연: 만주 신경교향악단 1944)
{현악합주를 위한 모음곡} (요석악서2, 1956)
실내악
현악 4중주를 위한 작은 모음곡(1937)
현악 4중주를 위한 3개의 인벤션(1937)
현악 4중주 C단조(1938)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요석악서4, 1969)
독주곡
피아노를 위한 3개의 2성부 인벤션(1936)
피아노를 위한 3개의 3성부 푸가(1936)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모음곡(1980)
김메리의 <학교> 주제에 의한 10개의 피아노 변주곡(1987)
교성곡
교성곡 {비바람속에} (모윤숙 시, 1958)
축전 교성곡 {빛나라 내 조국} (이은상 시, 1978)
가곡
『김성태 가곡집』(요석악서6, 1991)에 수록된 곡
{말} (정지용 시, 1937)
{바다3} (정지용 시, 1937)
{산너머 저쪽} (정지용 시, 1937)
{호면'湖面'} (정지용 시, 1937)
{소곡'小曲'} (양주동 시, 1938)
무용극
{흥부와 놀부}(연주:조선교향악단, 1941)
저서 및 작곡집
『새야새야 파랑새야』(동요집, 1934)
『조선민요곡집』(1946)
『한국민요곡집』(1954)
『가곡집』(1955)
『김성태 가곡집』(1971)
『화성법』(1971)
『김성태 가곡집』(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