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金順男, 1917.5.28.서울 - 추정:1983)
작곡가. 김순남은 교사가 되기 위해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1937). 그러나 교사의 뜻을 접고 작곡을 배우기 위해 동경고등음악학원(본과 작곡부)에 입학했다(1938). 그 곳에서 그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던 스승 하라타로오(原太郞, 1904-1988)를 만났다. 이 만남은 그의 평생을 결정짓는 이념과의 접촉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바르톡,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등의 음악을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 양식을 이들 방식에 준하는 현대성을 가진 음악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김순남은 작곡부 2년 수료 직후 동맹파업의 주도와 연애사건으로 인해 자퇴하게 되나, 곧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로 편입(1940)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 당시 일본현대작곡가연맹 주최의 <작곡발표회>에 그의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이 발표되었다.
김순남은 졸업(1942) 후 귀국하여 성연회(聲硏會)라는 지하 음악서클을 성악가인 강장일•평론가인 이범준 등과 함께 조직하는 등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을 벌였다. 1944년에는 결혼과 함께 <김순남 제1회 작곡 발표회>([피아노 소나타 제2번]과 가곡 [상렬], [철공소], [탱자])를 개최했다.
해방이 되는 1945년에는 강장일과 공동 발의로 음악가 대회를 소집하여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했다(8월 16일). 이 때 지은 노래가 「건국행진곡」이다. 한 달 뒤 결성(9월 15일)되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에서는 작곡부장으로 선임되고, 이 단체가 머지않아 <조선음악가동맹>으로 흡수•통일(12월 13일)되면서 작곡부장 겸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남로당에도 입당(1946)하며, 이런 활동과 병행하여 [해방의 노래], [인민항쟁가], [농민가] 등 수많은 노래들도 내놓았다. 또한 <해방가요 발표 대연주회>를 주도했고(1946), 음악 강의나 심사위원으로도 폭넓게 활동하며, 연극에도 많은 관심이 보였다([님]•[3월1일]
등의 연극에서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7년 미 군정의 좌익색출 때 [인민항쟁가]의 작곡가라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체포령이 내려짐에 따라 그는 월북했다(1948).
김순남은 황해도 해주에서 한 달여 간 머문 후, 평양으로 옮겨가 평양음악학교 교수이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헌법위원, 역사연구보존위원 등으로서 다시 활발하게 활동했다. 6•25전쟁이 터지는 1950년에는 [승리의 기빨], [개선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1949년에는 소련의 10월 혁명 기념행사에 참가하는데, 쇼스타코비치와의 만남을 계기로 1952년에는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하차투리안[Aram Il’yich Khachaturian, 1903-1978]에게 작곡을 배웠다.
김순남의 유학생활은 얼마가지 못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1952)는 사상문예투쟁의 일환으로서 자연주의나 형식주의 등을 “부르주아 예술의 낡은 사상적 잔재”로 비판하고 외국 유학생들에 대한 귀국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뒤이은 남로당 숙청작업(1953)과 반 종파 투쟁(1954)이 강화되면서, 남로당계 예술인들 특히 김순남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 이었다. [인민항쟁가]가 베토벤처럼 6도 이상의 비약을 쓰고 있으므로 부르주아적이라는 비난까지 받았고, 1955년에는 모든 직함과 창작권리를 박탈 당했다.
김순남은 숙청 뒤에도 한 동안 평양에 머물러 있다가 1960년대 초반에 신포(함경남도)로 옮겨가 노동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1964년경에 그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져 다시 창작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작품으로는 노래 [돌아라, 사랑하는 기대야]와 바이올린 협주곡 [이른 봄] 등이 있다.
1970년대에는 다시 평양에 복귀하여 음악가동맹의 소속원으로서도 활동을 재개하지만, 폐결핵으로 인한 요양생활이 불가피해짐에 따라, 함경남도의 여러 곳을 전전하게 되고, 1983년경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 민족이 겪어온 20세기 중후반의 시대상황이 김순남 만큼 자신의 삶과 음악에 그대로 각인된 작곡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의 일본 유학은 그에게 누구보다도 먼저 현대적 서양 작곡기법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는 동시에 민족음악의 중요성도 깨닫게 했다. 뿐만 아니라, 역시 일본에서 싹트게 된 그의 예술가로서의 남다른 사회의식은 노래를 통한 그 의식의 표출과 사회개혁을 위한 실제적인 음악활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노력과 활동은 일제 말기와 긴박하게 돌아가는 해방공간의 복잡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에게 월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남한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는 1988년에야 비로소 내려진다. 월북한 김순남의 음악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거기서 그의 음악적 희망이 거부 당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도 그는 거의 잊혀진 사람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나라의 작곡가들은 대체적으로 보아 양악의 틀에 전통 음악을 융합시키고자 노력한 흔적들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더 적극적으로 어떤 사람은 더 소극적으로 했다. 김순남은 이 일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 중 하나였다. 이런 생각은 그의 음악에 뚜렷한 족적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는 단지 민족적이지만 않았고, 현대적인 것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전통과 현대적 기법(특히 드뷔시와 바르톡적인 기법)의 융합 시도는 현대적 민족음악의 형상화를 향한 그의 집념을 보여준다. 또한 김순남의 음악은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배경과 또 그것에서 비롯된 이념과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음악장르에는 짙은 이념 성향의 노래가 많고, 북한에 가서 창작한 규모가 큰 오라토리오나 기악곡의 일부도 이념 성향의 것들이다. 비교적 정치적 성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서정적인 시에 바탕을 둔 가곡들이다.
작품목록
노래
1934: 경성사범학교요가(기숙사 노래)
1945: 건국행진곡(김태오), 해방의 노래(임화), 우리의 노래(이동규), 농민가(박아지), 독립의 아침(이주홍), 조선여자 청년 동맹가
1946: 예맹의 노래(임화), 서반아혁명국제의용군의 노래(임화), 기차(2부 합창동요), 인민항쟁가(임화), 남조선형제여 잊지 말아라(임화)
1947: 인민유격대의 노래,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가(임화)
월북이전 연도 미상: 인민의 노래, 농민의 노래
1948: 박헌영에게 드리는 노래, 조선 빨치산의 노래(이 노래는 하차투리안의 편곡으로만 남아 있다)
1950: 땅끄병의 노래(임화), 동무들의 함성이 들려온다(최석두), 근위부대의 노래(박세영), 해병의 노래(조령출), 고향의 어머니(정서촌), 개선 행진곡(임화), 승리의 기빨(박세영), 총을 메고 나가자(조령출)
1960년대 전반: 돌아라 사랑하는 기대야
월북 이후 연도 미상: 추도가, 맹세(임화), 노동자의 노래, 자장가 Ⅳ(김순남), 복구대의 노래(박찬모), 씨뿌리는 노래(정서촌), 조중친선의 기빨(박세영), 붉은 용사의 노래, 태백산맥
가곡
1944(1948년에 출판된 『자장가』가곡집에 포함됨): 상렬(오장환), 철공소(김북원), 탱자(박노춘)
1947(『산유화』가곡집: 김소월 시): 바다, 그를 꿈꾼 밤, 산유화, 잊었던 마음, 초혼
1948(『자장가』가곡집): 자장가Ⅰ(김순남)•자장가Ⅱ(김순남)•자장가Ⅲ(박찬모), 양(오장환), 진달래꽃(김소월)
기악곡
1939: 피아노 소나타 제1번
1944: 피아노 3중주「결혼」, 피아노 소나타 제2번, 민요풍 기악곡
1946년 말 이전: 피아노 소품(몇 편), 관현악과 성악을 위한 바라데, 피아노 협주곡 제1번 in D(제1악장)
1947: 교향곡 제1번 「태양 없는 땅」
1951: 교향악「영웅 김창걸」의 서곡 「진격」
1952: 오보에 독주곡
1966: 바이올린 독주곡 「이른 봄]
오라토리오
1952년 이전: 「승리의 오라토리오」
가극 1949: 「인민유격대」(전4막)
관련악과 합창
1966: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김만섭)
참고문헌
김순남: “악단 회고기”. 『백제』제2권-2호(1947), 15-18쪽.
________. “현실 속에서 배운 것”. 『조선음악』4월호(1964), 16-17쪽.
김재용: 『카프비평의 이해』. 서울: 풀빛, 1989.
노동은: 『한국 민족 음악 현단계』. 서울: 세광출판사, 1989.
________. 『김순남: 그 삶과 예술』. 서울: 낭만음악사 1992.
민경찬(편). 『김순남 가곡 전집』. 북으로 간 음악가 작품 시리즈 제1권. 서울: 삼호출판사, 1988.
역사 문제 연구소 문학사 연구 모임: 『카프 문학 운동 연구』. 서울: 역사 비평사, 1989.
이건용: “해금작가 연구 1: 김순남 이건우의 가곡에 대한 양식적 검토”. 『낭만음악』 1(1988), 6-36쪽.
________. “김순남의 ‘Konzert für Piano forte in D’에 대한 분석적 검토”. 『민족음악의 이해』. 민족음악 2. 서울: 민족음악연구회, 1992, 122-144쪽.
이태원: “김순남 <산유화>: 말과 장단의 이치”. 『민족음악과 근대성』. 민족음악의 이해 8. 서울: 민족음악연구회, 2000, 23-59쪽
홍정수: “양악 작곡과 시김새”. 『음악이 있는 마을: 이강숙 회갑 기념 문집』. 서울: 민음사, 1996, 817-846쪽.
김미옥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김순남(金順男, 1917-1983)
- 1917년 서울에서 상인이었던 부친 김종식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모친 이보경 사이에서 태어남.
- 모친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면서 성장함.
- 경성사범학교 졸업(1937) 후,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 작곡부에 입학(1938). 이곳에서의 그의 스승에게서 현대음악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사상까지 전수받음.
- 작곡부 2년 수료 직후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로 편입(1940)하여 학업을 계속함. 당시 <일본현대작곡가연맹> 주최 작곡발표회에 그의 ≪피아노 소나타 제1번≫ 출품.
- 졸업(1942) 후 귀국하여 지하 음악서클 조직 등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 주도.
- 1947년 미군정의 좌익색출 때 체포령이 내려짐에 따라 월북(1948)의 길을 선택.
- 평양음악학교 교수이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으로서 다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
- 1952년 쇼스타코비치(D. Shostakovich)와의 만남을 계기로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음악원에 유학, 이곳에서 작곡과 교수였던 하차투리안(A. I. Khachaturian)에게 사사받음. 그러나 곧 같은 해에 조선노동당의 사상문예투쟁의 일환으로 유학생들에 대한 귀국조치 당함.
- 1955년 남로당 숙청작업(1953)과 반종파투쟁(1954)의 강화로 숙청당함.
- 1964년경 그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져 작품들을 다시 내놓기 시작.
- 1983년 사망함.
김순남의 삶과 음악은 한민족이 겪어온 20세기 중후반의 시대상황이 그대로 각인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 월북 때문에 그의 이름은 남한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그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가 내려지는 1988년 이후에야 소생되기 시작한다. 월북한 김순남의 음악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거기서 그의 음악적 희망이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도 그는 거의 잊혀진 사람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나라의 작곡가들은 대체적으로 보아 양악의 틀에 전통음악을 융합시키고자 노력한 흔적들을 보여준다. 김순남은 특히 이 일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 중 하나였다. 이런 생각은 그의 음악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데 그는 단지 민족적이지만 않았고, 현대적인 것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전통과 현대적 기법(특히 드뷔시와 바르톡적인 기법)의 융합 시도는 현대적 민족음악의 형상화를 향한 그의 집념을 보여준다. 또한 김순남의 음악은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배경과 또 그것에서 비롯된 이념과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그의 음악은 다면성을 가지고 있다.
김순남의 현존하는 작품은 해방 직전인 1944년부터 숙청당하는 1955년 사이의 짧은 기간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기 이전의 작품으로는 출판되지 않은 노래와 피아노 소나타 한 곡씩만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이후의 작품으로 현재 접할 수 있는 것은 1960년대에 작곡된 기악곡 한 곡과 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곡 하나 뿐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처럼 그의 작품들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 분류하기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김순남에게는 그 기간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해방・월북・분단이라는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그의 음악을 세 시기로 자연스럽게 구분시키는 분기점 역할을 한다.
다음은 김순남의 시기별 작품목록을 정리한 것이다. ∨ 표시가 있는 곡은 현재 악보를 접할 수 없는 것들이며, 노래와 가곡에서는 괄호 안에 작사자가 밝혀져 있다.
<표 1> 김순남의 시기별 작품 목록
위의 도표를 보면, 해방 이후인 제2기에서 노래와 가곡이 제1기에서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이 작곡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김순남이 1944년의 ‘제1회 작곡발표회’ 직후부터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인해 기악 창작만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면서 ‘해방가요’ 등 해방의 기쁨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노래들을 많이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36곡 중 모두 제2기에 속하는 25곡이 출판되어 있음)는 민중을 대상으로 이념적인 가사를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단성음악이다. 즉, 한도막 형식, 12-20마디, 2/4 또는 4/4의 평이한 리듬, 굳건함을 느끼게 하는 선율의 도약 등을 특징으로 보인다. 음계는 일관적인 4도음의 생략, 이끔음 역할의 약화 등 장・단조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형태가 전통적 특징의 접목을 뚜렷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김순남의 가곡(제1-2기의 13곡)은 독자성을 추구한 것이다. 제1기의 3곡 ≪상렬≫・≪철공소≫・≪탱자≫는 모두 이념적인 내용을 포함하여 강렬한 표현이 요구되는데 반해, 제2기의 가곡들은 이런 경향(≪양≫)뿐만 아니라 서정성이나 한국적 정서가 배어 있는 가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사실 이 곡들의 대부분도 이념을 암시하고 있기는 하다). 그의 모든 가곡들에는 전통과 서양의 현대적 기법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단지 가사의 내용에 따라 그 비중이 다르고, 표현적인 곡의 경우에는 현대적 기법이 앞세워져 있어 그 둘을 구분해내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있다. 특히 ≪양≫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곡의 형식에서는 전형적인 서양 가곡형식의 하나인 A-B-A’ 또는 이와 유사한 것들(A-B-A’-B’, A-B-C-A’ 등)에 세부적으로도 서양적인, 특히 드뷔시적인 변주기법이 흔히 적용된 반면(≪양≫은 세도막형식이 가미된 변주곡형식: A-A’-B-A’’-A’’’), 선율에서는 완전4도+장2도의 새야음계나 5음음계에 의해 전통성이 비중을 갖는다. 단, 여기에 반음계적 변화나 증․감음정이 가미됨으로써 현대적 색채감도 갖게 되며, 매우 새롭게 레치타티보적인 선율적 진행도 등장한다.
그리고 화성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선율적 음들이 반주부분의 아르페지오 형태나 특히 동시에 울리는 화음에도 상당부분 그대로 사용됨으로써 전통과 현대적 기법이 매우 효과적으로 융합된다(부가화음이나 클러스터 등). 부분적으로는 반주부분의 화성이 선율과 다른 중심음을 가지며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복조성을 포함하기도 한다. 반주 부분에서는 화성뿐만 아니라 짜임새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융합을 보여준다. 특히, 가사의 분위기를 반영시키는 기법으로서 쓰인 최대 19도에 이르는 넓은 음역의 다중구조적 반주의 경우에 전체적으로는 관현악적인 짜임새를 보이나 각각의 층에서는 전통적 특징들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는 ≪상렬≫의 반주에서 높은 음역의 요령소리, 중간음역의 장구 장단, 아래 음역에서의 상여소리를 묘사하는 진행을 들 수 있다.
다음은 전체 가곡들의 선율(많이 쓰인 음정) ・ 음계와 화성적 특징들을 도표로 정리한 것이다(‘음역’에서는 선율과 반주의 음역이 따로 표시되어 있고, 약자 표시는 도표 아래 참조):
<도표 2> 김순남 가곡들의 선율 ・ 음계 ・ 화성적 특징
강렬한 표현과 함께 민속적인 분위기도 유지시켜야 되는 ≪상렬≫에는 시김새도 가장 다양하게 쓰였으며(굴림소리・트릴・스르렁・싸랭과 특히 농음), 역시 유사한 분위기의 ≪초혼≫과 한국적 정서의 ≪산유화≫가 그 뒤를 따른다.
박자와 리듬에 있어서는 복합박자와 민속적 장단의 사용(13곡 중 5곡)이 전통적 특징을, 빈번한 박자의 변화(13곡 중 9곡)에 따른 박이나 악센트의 불규칙한 이동이 특히 스트라빈스키(I. F. Stravinsky)적인 현대기법을 반영한다.
다음의 악보는 그의 대표 가곡 중의 하나인 ≪상렬≫의 시작부분(서주)인데, 상여 행렬의 음악적 형상화, ‘상렬’을 묘사하는 가사의 내용에 따른 음역의 설정, 넓은 음역을 차지하는 표현적 다중 구조(상여음향과 요령 소리 등)의 관현악적인 반주, 민속적인 뉘앙스의 시김새(반주부의 높은 음역에서 3도 음정의 농음) 등을 볼 수 있다.
<악보 1> 가곡 ≪상렬≫, 마디 1-3
위 악보에서의 오스티나토적인 동음진행(오른손 하성부)도 장구의 ‘기덕’을 연상시키고, 왼손에서의 진행은 상여소리(‘어허야~’)의 묘사적 음향으로 들린다. 그러나 박자 자체는 민속장단이 적용되어 있지 않고 잦은 변박과 함께 현대적이다.
다음의 악보는 상대적으로 훨씬 민속적인 뉘앙스를 반영하는 ≪초혼≫의 시작부분이다.
<악보 2> 가곡 ≪초혼≫, 마디 1-10
위의 악보에서 복합박자 안에서의 격렬한 장구 장단(장구의 북편과 채굴림 연주)은 혼을 부르는 민속적인 의식과의 깊은 관련을 보여준다.
다음은 그의 가곡 중 가장 급진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양≫의 시작 부분이다.
<악보 3> 가곡 ≪양≫, 마디 1-10
위의 악보를 보면, 첫 마디(반주 부분)에서부터 강조되어 나타나는 증4도 관계와 반음계적 변화가 바르톡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전체적인 진행에서의 음정 관계의 중요성은 그런 연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바르톡 음악에서의 증4도는 옥타브를 이분하는 대칭점으로서도 특히 중요성을 갖는데, 이 곡에서도 그와 같은 개념이 드러난다. 즉, 선율의 시작 음정인 단3도(마디 3)는 반주 부분의 첫 음정인 감5도(증4도)의 이분점에 놓인 음정이며, 또한 이후 마디 5까지의 반주도 이 단3도 관계로 중심음이 계속 바뀐다: E#(=F) - D - B - D). 마디 2-5의 선율 부분은 중심음이 D와 G인데, 이 완전5도 또는 완전4도 역시 반주부분에서 중요하게 쓰인다. 반주부분의 마디 1에서 증4도를 제외한 음정은 완전4도이며, 마디 5에서 A부분의 끝인 마디 7까지의 반주도 그 중심음이 5도 관계로 움직인다: D - G - D - (G#) - A.
반면, 중간부분(형식 B 부분: 마디 18-24)에서는 앞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새야음계가 포함된 4음음계의 선율과 역시 새야화현이 포함된 반주부분의 화성이 나타나며 반음계적 진행은 거의 없다. 그리고 선율의 흐름 자체도 A 부분과는 대조적으로 레치타티보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기악곡으로 남아 있는 2곡 가운데는, 제2기의 피아노 협주곡(피아노 반주의 제1악장)은 같은 시기의 가곡들과 매우 유사한 음악적 특징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 피아니스트의 기교를 선보일 수 있는 패시지들이 새롭게 포함된다. 반면, 이북에서 복권된 직후의 곡인 바이올린 소나타 ≪이른 봄≫(피아노 반주의 단악장 독주곡)은 제3기의 노래와 가곡을 접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매우 귀한 자료이기는 하나 그의 창작의지가 상당히 배제된 단순하고 평이한 진행으로 되어 있다(뚜렷한 조성과 3화음적 진행).
역시 이 당시에 만들어진 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큰 규모의 곡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단, 이 곡에서의 매우 이념적이고 과격하기까지 한 가사의 표현을 위해서는 레치타티보적인 선율과 fff에 이르는 다양한 다이내믹 등이 가미되어 있다.
김순남의 음악은, 자신의 음악적 선택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던 시기는 4년이 채 안되지만, 양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한국 음악의 창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 그가 한국음악적인 요소들을 취한 것은 그것이 민족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대적일 수도 있다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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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방송. “서평: 한국양악사의 큰 별, 김순남 연구.” 『민족음악의 이해』, 서울: 민족음악연구회, 1992, pp. 319-325.
이건용. “해금작가 연구1: 김순남․이건우의 가곡에 대한 양식적 검토.” 『낭만음악』 1(1988), pp. 6-36.
. “김순남의 《Konzert für Piano forte in D》에 대한 분석적 검토.” 『민족음악의 이해』제2집, 서울: 민족음악연구회, 1992, pp. 122-144.
이태원. “김순남 「산유화」: 말과 장단의 이치.” 『민족음악과 근대성』, 서울: 민족음악연구회, 2000, pp. 23-59.
민경찬 편. 『김순남 가곡전집』. 서울: 삼호출판사, 1988.
등록일자: 2010.8.4
[김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