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데사우 (Paul Dessau 1894년 함부르크 출생 - 1979년 동베를린 사망)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작곡가로서 주로 알려져 있는 데사우는 20세기의 서구 음악사에서 제대로 평가가 되고 있지 않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서구 음악학자들에게 작곡가의 정치적 참여에 대해 과소 평가하려는 경향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데사우 역시 한스 아이슬러나 쿠르트 바일과 같은 브레히트의 작곡가들처럼 예술과 현실참여를 자신의 작품에서 결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유태교당의 유명한 성악가였던 할아버지 모세스 데사우 (Moses B. Dessau)의 손자로 어렸을 적부터 음악적인 분위기에 자랐으며 11세에 콘서트에서 바이올린연주를 하는 등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었던 데사우는 18세에 함부르크 시립 극장에서 피아노 반주자를 거쳐 브레멘에서 오페라 지휘자로 활동하다 오토 크렘퍼러의 추천으로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쾰른에서 오페라 지휘를 한바 있다. 마인쯔를 거쳐 당시 하인쯔 티센 (Heinz Tiessen)과 부르노 발터 (Bruno Walter)가 책임지고 있던 베를린의 시립오페라에서 1925년부터 1933년 프랑스로 망명하기 전 까지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망명전의 데사우 작품에서 자유무조음악과 민요적인 단순함을 접목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이는데 당시 20년대 독일의 음악적 분위기를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심포니 Sinfonie"(1926), "어린이들을 위한 교훈극 Lehrstuecke fuer Kinder"(1930-32), "첫 현악사중주 Erstes Streichquartett"(1932)를 들 수 있다.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아이슬러와 달리 데사우는 1935년 빠리 망명 중 사귀게 된 러네 라이보비쯔 (Rene Leibowitz)에게서 처음으로 12음기법을 배우게 되는데 라이보비쯔 또한 당시 망명생활을 하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에리히 이토 칸 (Erich Itor Kahn)으로부터 12음기법을 전수 받았다. 데사우가 이 시기에 12음기법을 사용해 쓴 작품으로 피아노 곡 "구에르니카 Guernica"(1939)와 오케스트라리트인 "목소리 Les Voix"(1939-1943)를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유태교적 주제를 가진 오라토리오 "하가다 Haggada" (1936)에서 보여주듯 종교적인 색채를 띄는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1939년 세계 제이차 대전이 발발하자 수 많은 유럽의 망명인들이 다시 망명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데 1939년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데사우는 처음에는 닭치는 일이나 어린이집에서 음악교사를 하는 등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927년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안면이 있었던 브레히트와 같이 일할 기회가 생긴 것은 망명생활이 안겨준 긍정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망명 전 힌데미트나 바일과 공동작업을 하였고 또 아이슬러와 같은 인정받는 작곡가들과만 일했던 브레히트도 미국 망명시절엔 소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신세에 처해 있었었다. 그러므로 영화음악가로 무척 바빴던 아이슬러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데사우와 함께 당장에 무대에 올려질 가능성은 없으나 다가올 미래를 위한 많은 작품들을 준비할 수 있었다. 데사우는 이 시기에 영화음악을 작곡하는 일 외에 "억척 어멈과 아이들 Muttercourage und die Kinder"(1946)과 "세주안의 선자 Der gute Mensch von Sezuan"(1947/48) 그리고 "독일의 비참함 das Deutsche Misere"(1943) 등 주로 브레히트의 텍스트에 기반을 둔 작품들을 썼다.
전쟁이 끝나자 1948년 베를린으로 되돌아간 데사우는 브레히트와 함께 망명시기에 준비해 온 작품들을 성공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자아의식과 예술적 행위의 든든한 바탕을 동독에서야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1949년에 방송극 대본으로 작곡하였고 후에 오페라로 개작한 "루쿨루스의 심문 Verhoer des Lukullus"이 동독의 문화부 간부로부터 형식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는 일이 없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루쿨루스-논쟁"으로 브레히트는 제목을 "루쿨루스의 유죄판결 Die Verurteilung des Lukullus"로 명칭을 바꾸게 되는데 데사우의 음악 또한 민중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낯선 요소가 있다고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내용과 형식을 별개로 이해하는 문화간부들의 수준 낮은 예술관으로 이 작품은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브레히트의 영향력과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이 문제는 무마되었다.
데사우는 1979년 85세로 사망할 때까지 왕성한 창작욕을 보여 주었는데 전부 5개의 오페라를 동독에서 작곡("루쿨르스"외에 "푼칠라 Puntila"(1966), 란킹廣?Lanzelot"(1970), 아인슈타인 Einstein"(1974) 그리고 게오르크 뷔히너의 드라마인 "레옹세와 레나 Leonce und Lena"(1979)가 그것이다) 했을 뿐만 아니라 4곡의 "오케스트라 음악 Orchestermusik" (1955년, 1967년, 1970년, 1973년) 및 "바하 바리에이션 Bach-Variationen"(1963)등 다수의 기악곡도 작곡하였다.
데사우의 작품이 브레히트의 명성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그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다시 검토 연구해 볼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경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