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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츠||쉬츠 [Schütz, Hein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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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츠(Heinrich Schütz, 라틴어 이름: Henricus Sagittarius, 1585 게라-1672 드레스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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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곡가. 독일 음악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는 의미로 흔히 ”독일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쉿츠는 어릴 때에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모릿츠(Moritz von Hessen) 백작의 눈에 띄어 13세 때에 카쎌로 옮겨가 거기에서 교회합창단의 단원으로 활약하였고, 겸하여 교회에 소속된 학교에서 기초적인 공부도 한다. 백작은 변성기가 지난 소년 합창단원에게 장학금을 주어 공부를 시키곤 했다. 쉿츠도 그가 준 장학금으로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와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스스로 작곡가인 백작은 쉿츠가 법학보다는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를 베니스로 보내어 지오반니 가브리엘리 (Giovanni Gabrieli) 문하에서 공부하는 길을 열어준다(유학기간: 1609-1613). 장학금이 끝나가는 2년 후에, 스승인 가브리엘리는 백작에게 일년의 장학금을 더 연장해 달라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스승은 죽는다. 쉿츠는 그 후 1년을 아버지가 보내준 돈으로 베니스에 더 머문다. 이태리의 스승은 독일에서 온 제자를 매우 총애하여, 그가 계속 베니스에 머물러 있기를 바랬었다. 가브리엘리는 죽으면서 자신이 도장으로 사용하는 자신의 반지를 쉿츠에게 유산으로 물려준다. 당시 베니스는 상업의 중심지로 매우 부유한 도시였고, 수많은 음악가를 길러낸 전통을 갖고 있었다. 빌라르트(A.willaert), 데 로레(Cipriano de Rore) 짜르리노(Giaseffo Zarlino),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메룰로(Claudio Merulo), 지오반니 가브리엘리, 그리고 몬테베르디 등의 음악적 전통이 있었다. 몬테베르디는 가브리엘리의 후임자였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음악을 배우러 오는 학생이 없을 수 없었다. 특히 독일, 덴마크, 스웨덴 등 북쪽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았다. 쉿츠는 베니스에서 수많은 유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1611년 그는 성공적인 이태리 유학을 마치면서 모릿츠 백작에게 {이태리 마드리갈 곡집}을  보낸다.
 쉿츠는 독일로 돌아와 다시 법률 공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한다. 모릿츠 백작은 그를 오르가니스트로, 법률 비서로 쓰려 했다. 하지만 쉿츠는 잠간 동안만 두 가지 일을 했다.1813년 그는 28세의 나이로 카쎌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일을 시작한다. 
모릿츠 백작은 드레스덴의 영주 요한 게오르그 1세를 방문하면서, 쉿츠를 비서로 대동하고 간다. 거기에서 쉿츠는 음악가로서 요한 게오르그의 눈에 들게 된다. 그 후 요한 게오르그는 모릿츠에게 쉿츠를 자신에게 보내 달라고 여러 번 간청하여 허락을 얻는다. 그래서 쉿츠는 드레스덴의 악장으로 취임한다(1617). 악장의 임무는 교회를 위해 어린이와 직업 음악가로 된 성가대를 육성하고, 궁정을 위해 악단을 이끄는 일이었고, 필요에 따라 작곡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직책을 55년간 수행하게 된다. 쉿츠는 1619년 6월 1일에 막달레나 뷜덱(Magdalena Wildeck)이란 처녀와 결혼하는데, 그의 이중합창 모음집인 ’다윗의 시편가’(Psalmen Davids)는 같은 날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그러나 부인이 결혼 후 6년만인 1625년에 세상을 뜬다. 그는 아내를 위해 ’코르넬리우스 벡커의 가사에 의한 다윗의 시편가’ 중의 몇 편을 쓴다. 아내가 죽은 후 죽을 때까지 그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627년에 쉿츠는 독일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Dafne)를 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현재 유실되고 없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개선시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28년에는 휴가를 얻어 베니스로 다시 여행한다. 그는 이태리에서 자신의 악단에 필요한 악기를 구입하고, 새로운 음악도 접한다. 당시 베니스에는 몬테베르디가 가브리엘리의 후계자로 산 마르꼬(San Marco)교회에 와 있었고, 특히 오페라 작곡에 힘을 기울인다. 쉿츠가 이 음악적 거인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많은 서적들에 기술된 것처럼 쉿츠가 몬테베르디에게 배웠다는 증거는 없다. 이러한 설이 있는 것은, 그의 제자인 쉬르머(David Schirmer)가 1672년 쓴 글에 몬테베르디가 쉿츠를 가르쳤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1630년 친구인 작곡가 샤인(Hermann Schein)이, 그 이듬해는 아버지가, 또 4년 후에는 어머니가 죽는다. 그 후에는 전쟁이 터진다. 그는 자신의 합창단과 악단을 지탱하는데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 단원들에게 보수가 지급되지 않아, 쉿츠는 이러한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으로 쉿츠 자신의 명성은 높아져서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음악 활동을 하고 돌아온다그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가서 장기적으로 머물기도 했다(1633-1635). 그 후 덴마크 궁정에 결혼식이 있어서, 쉿츠는 또 다시 그곳에 초청을 받아 음악 자문을 하고, 젊은 음악가들을 추천하여 직책을 얻게 한다(1642-1645). 그는 점점 독일 전역에 알려진 음악가가 되었다. 그가 데리고 있던 악단은 전쟁의 혹심한 곤경으로부터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는 60세가 되어 은퇴를 간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는 1645년 이후 10여년간 열아홉번 이상 은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만 허락되지 않는다. 그의 은퇴 청원서에는 ”이 상태를 견디는 것 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좋다”는 말까지 들어 있다. 그의 청원은 영주가 죽고 그의 아들 요한 게오르그 2세가 즉위하면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행사 때에는 도와 줘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그는 은퇴 후에야 악단을 정비할 수 있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은퇴 청원서를 제출할 때에 나왔다. 그는 악단을 보강시켜 1660년에는 50명의 단원을 가진 악단이 된다. 그중 17명은 이태리 사람들이었으며, 악장 네 명도 모두 이태리 사람들이었다. 그의 독일인 제자 베른하르트(Christoph Bernhard)는 단지 부악장이었다. 이 제자에게 그는 자신의 장례식 때 사용될 음악의 작곡을 부탁한다. 그 외에도 알베르트(H. Albert),  베크만(M. Weckmann), 타일레(J. Theile)와 같은 제자를 두었다. 그는 죽어서 아내와 함께 나란히 묻혔다. 

쉿츠의 작품들은 한편의 오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음악이었다. 그는 당대에 알려진 모든 작곡기법들을 고루 잘 구사할 수 있었다(마드리갈, 이중합창, 콘체르토, 호모포니 시편가, 대위법적 모테트, 독일의 전통적 낭송양식을 가진 수난곡, 오페라). 당시 독일음악가들은 이태리로 유학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태리 음악가들을 독일로 초청하여 활동하게 하는 경향도 있었다. 쉿츠는 이태리 유학 후에 독일 신교 교회음악 전통을 이어 궁정과 칸토라이(성가대)를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했다. 당시 독일 교회는 종교개혁(1517) 이후 독일어 사용을 강조하여 16세기 말에는 모든 공식 용어가 독일어화 된 상태에 있었고, 독일어 성경을 음악화하라는 요구가 강한 때였다. 이렇게 언어를 강조하는 경향은 오페라가 탄생한 이태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쉿츠의 음악언어는 주로 이태리에서 개발된 계속저음에 의한 새로운 콘체르토 양식이다. 그러나 그는 이태리의 기법을 그냥 옮겨 놓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그 기법을 독일어에 맞게 접합시켜 독일어적 현상이 음악에 드러나도록 했다. 그의 음악은 음형이론의 학습을 위한 보물창고나 다름없다(그의 제자 중 하나인 베른하르트는 그의 음형이론을 글로 남겼다).  그는 대위법적 옛 양식과 가사나 감정의 직접적, 효과적 표현을 가능케 하는 새 양식을 견고한 기법적 바탕 위에서 연결시켜 독창적인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주요작품:
부활절 히스토리(Auferstehungshistorie, 1623), 거룩한 노래 (Cantiones sacrae 1, 1625), 벡커의 시편가(Beckerschen Psalmen, 1628), 거룩한 심포니 (Symphoniae sacrae 1권은 1629, 2권은 1647 , 3권은 1650) 작은 교회 콘체르토(Kleine  geistlichen Konzerte 1권은 1636, 2권은 1639). 음악적 장례(Musikalische Exequien 1636), 십자가 상의 일곱 말씀(Die sieben Wort 1647), 교회합창음악(Geistliche Chormusik 1648), 독일어 미사(Die deutsche Messe 1657), 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 1665) 누가수난곡(Lukaspassion 1664), 요한수난곡(Johannespassion1664) 성탄절 오라토리오(das Weihnachtsoratorium 1664), 독일어 마니피카트(Das deutsche Magnifikat 1671).

참고문헌
H. J. Moser: H. Schütz, 1936
H. Eggebrecht: Ordnung und Ausdruck im Werk H. Schütz, 1961
W. Bittinger: Werkverzeichnis H. Schütz 1960
O. Brodde: H. Schütz, Werk und Leben, 1972
H. Eppstein: H. Schütz, 1975
M. Gregor-Dellin: H. Schütz. Sein Leben, sein Werk, seine zeit, 1984
H. Krause-Graumnitz: H. Schütz: Sein Leben im Werk und in den Dokumenten seiner Zeit, 1993”

[홍정수]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쉿츠, 하인리히(Schütz, Heinrich, 1585-1672)

- 1585년 10월 8일 중부 독일 게라(Gera) 근교 쾨스트리츠(Köstritz)에서 출생.
- 1598년 카셀(Kassel) 궁정 소년합창단원으로 활동함.
- 1608년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함.
- 1609-1613년까지 베네치아(Venezia)에서 가브리엘리(G. Gabrieli)에게 오르간과 작곡을 배움.
- 1613년 카셀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됨.
- 1615년 작센(Sachsen)의 선제후 게오르그 1세(Georg I)의 요청으로 드레스덴(Dresden)에서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감독(Director der Musica)으로 취임.
- 1619년 궁정악장(Hofkapellmeister)으로 임명받은 후 제한적으로 일하다가 1621년 프레토리우스(M. Praetorius) 사망 후 봉급인상과 함께 전임으로 활동함.
- 1619년 6월 1일 막달레나 빌덱(M. Wildeck, 1601-1625)과 결혼하여, 두 딸을 얻고 부인의 사망 이후는 독신으로 지냄. 
- 1628-1629년 사이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몬테베르디의 음악을 접함.
- 1633-1635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의 초청으로 왕가의 결혼식 음악을 주관함. 
- 1642-1644년 다시 덴마크로부터 초청을 받아 궁정 행사를 위한 음악을 작곡함.
- 1656년 십여 년에 걸쳐 간청한 은퇴가 받아들여져 특별 궁정행사만 돕고 작곡에 몰두함.
- 1672년 11월 6일 드레스덴에서 사망. 

  쉿츠는 17C 독일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꼽힌다. 그는 바흐(J. S. Bach) 이전의 독일 개신교 음악을 일으킨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가 남긴 500여 작품은 거의가 교회음악으로 대부분 독일어 가사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그가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에서 배운 바가사를 파악하고 살리고 강조하면서 그 의미를 음악적으로 깊게 하였는데, 독일어로 성취했다. 그의 모음집은 독일 개신교음악의 전통과 이탈리아 성악음악의 새로운 양식을 결합하였다는 점에서 이후의 독일 교회음악에 모범적인 예가 된다.
  쉿츠는 카셀의 합창단에서 활약하던 소년시절부터 음악학도들을 후원하던 모리츠 백작(Moritz von Hessen)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법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 모리츠 백작은 쉿츠가 음악에 더 재능이 있음을 알고 장학생으로 베네치아로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쉿츠는 성공적인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면서 베네치아에서 출판한 ≪이탈리아 마드리갈 곡집≫(Il primo libro de madrigali, SWV 1-19, 1611)을 모리츠 백작에게 보냈다. 계속저음 없이 5성부로 이루어진 곡들은 쉿츠가 마드리갈의 새로운 테크닉을 섭렵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로 돌아온 쉿츠는 결혼하던 해 첫 독일어 교회음악 ≪다윗의 시편가≫(Psalmen Davids, SWV 22-47, 1619)를 작곡한다. 전체 26곡 중  많은 부분은 이미 1617년 황제방문과 개혁주의 기념예배에서 연주되었다. 쉿츠가 스스로 ‘이탈리아 기법에 의거한 독일어 시편가’라고 묘사한 만큼, 이 작품에는 가브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던 다중합창과 프레토리우스로부터 받은 음악적 영향이 함께 나타난다. 쉿츠는 여기에 소수의 ‘잘하는 합창단’(coro favorito)과 다수의 ‘보통 합창단’(capella)의 역할을 분리함으로 자신의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전통적으로 충실한 대위법적 양식과 마드리갈식의 감정표현에 바탕을 둔 가사표현이 잘 결합되어 있다. ≪다윗의 시편가≫는 부분적으로 대조적인 음악어법의 섬세함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음악과 텍스트의 명확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쉿츠의 작품경향을 특징짓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부활절 히스토리≫(Auferstehungs-Historie, SWV 50, 1623)는 신약성경의 복음서 중 부활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1570년대부터 드레스덴의 궁정에서는 부활주일 예배를 위한 부활절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부겐하겐(J. Bugenhagen)의 4복음서(Evangelienharmonie)에 스칸델로(A. Scandello)가 음악을 붙인 것이었다.  쉿츠는 처음 몇 년 그대로 답습하던 것을 부분적으로 자신의 음악으로 바꾸었는데, 복음사가(Evangelist)와 각 개인의 다성부적 대화 등 중요한 음악적인 요소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새로운 것은 플로렌스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레치타티보를 따라 콘티누오 반주를 도입한 점이다. 쉿츠는 복음사가의 반주를 위해 4성부의 자유로운 기악반주를 썼지만, 복음사가의 해설은 기존의 그레고리오 성가적인 낭송방식을 대체적으로 유지하되, 가사를 효과적으로 살려야 하는 특정 부분에서는 가사의 내용을 그려내는 모노디 방식의 음악처럼 변한다. 전체적으로 복음사가가 전면에 드러나고 다른 등장인물들은 덜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쉿츠가 이 작품을 기존의 복음서 낭독음악보다는 더 생생하게 만들었으나 무대작품으로까지는 인식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룩한 노래≫(Cantiones sacrae, SWV 53-93, 1625)는 라틴어 가사로 된 4성부의 종교적 마드리갈이다. 성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두스의 신비적인 글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참회와 명상에 관한 내용을 음악적으로 감정이 풍부한 이탈리아의 정서에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후기 마드리갈의 특징인 전형적인 불협화음의 사용이 돋보인다. 한 성부 내에서 감8도의 도약적 선율이라든지 다른 성부와 감8도를 이루는 음정의 사용 등은 성악적으로 노래하고 청각적으로 이해하는데 거의 극한을 달리는 실험적인 시도로서, ≪거룩한 노래≫가 쉿츠의 가장 급진적인 작품이 되게 하는 근거를 마련한다.  
  ≪베커의 시편가≫(Beckersche Psalmen, SWV 96a-256a, 1628)는 독일어로 가사를 가진 교회노래 모음집이다. 라이프치히의 신학교수 베커(C. Becker)는 당시 사용하던 롭바서(A. Lobwasser)의 제네바 시편가 번역 가사 대신 독일어에 적합하게 시편가를 직접 개사하였는데, 여기에 쉿츠가 전통적인 선율을 이용하여 음악을 붙였다. ≪거룩한 노래≫가 매우 화려한 이탈리아의 마드리갈 기법을 구사하였다면, ≪베커의 시편가≫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통상적인 대위 기법’(nach gemeiner Contrapunts art)을 사용하면서 당시 독일 개신교 음악의 전형적인 단순함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단순히 노래로 볼 수 없는 것은, 주어진 선율에 화성을 붙인 형태가 아니라, 처음부터 독립된 4성부로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사망 2주기인 1627년 9월 6일 완성되어서 침체기의 그에게 위로를 주었던 이 작품은 종종 개인적이고 표현적인 쉿츠의 특징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쉿츠는 독일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오페라 ≪다프네≫(Dafne, 1627)를 작곡하였다. 선제후 딸의 결혼축하를 위해 오피츠(M. Opitz)의 대본을 바탕으로 작곡한 이 작품은 유감스럽게도 현재 남아있지 않다. 훌륭한 오르가니스트였음에도 그가 작곡한 기악음악과 세속작품 또한 소수만이 남아있다.  
  음악적으로 늘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던 쉿츠는 1628년 휴가를 얻어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당시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 가브리엘리의 후계자로 와 있던 몬테베르디의 음악을 접할 기회를 갖는다. 쉿츠가 실제 몬테베르디를 직접 만났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독일로 돌아오기 직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거룩한 심포니≫(Symphoniae sacrae, SWV 257-276, 1629) 제1집은 라틴어 가사를 갖는 20곡의 종교적 콘체르토이다. 이 곡들에는 몬테베르디의 음악적 수사법의 영향과 함께, 기악연주의 독립적인 면이 눈에 띄인다. 기악은 소편성이며 선율적인 흐름에서도 성악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악기로 인한 음역과 음색의 확장은 새로운 기악작곡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13곡 <내 아들, 압살롬>(Fili mi, Absalon, SWV 269)에서는 4대의 트럼본이 사용되고 있다. 이 작품집은 ≪거룩한 노래≫와 비교되는 불협화음과 복잡한 화성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작은 음형의 모티브, 휴지부, 박자의 변화, 리듬의 대조에 의한 텍스트의 전개에 새로운 종류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음악적 장례≫(Musicalische Exequien, SWV 277-278, 1636)는 로이스(Reuß)의 포스트무스 백작(H. Posthumus)이 자신의 장례를 직접 상세하게 계획하면서 쉿츠에게 위촉했던 작품이다. 콘체르토, 모테트, 칸티쿰의 세 부분으로 주문된 복잡하고 독특한 내용을 쉿츠는 하나의 통일된 음악으로 만들었다. 설교 전에 성경구절 가사를 가진 14곡의 계속저음(Basso Continuo)으로 반주되는 콘체르토 스타일로 연주되며 8절로 된 6성부 코랄이 후렴의 기능을 가진다. 설교 후에는 설교의 주제와 같은 시편 가사 <주여, 당신만 계시다면>(Herr, wenn ich nur dich habe)을 내용으로 하는 8성부의 이중합창 모테트가 연주된다. 이어서 매장 직전에 칸티쿰 <시므온의 기도>(Nunc dimitis)가 따르는데, 쉿츠는 여기에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인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Beate anima)로 죽은 자의 영혼이 두 천사에 의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음악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가사의 깊은 의미가 효과적으로 전달되는데 주력하였다. 
  ≪작은 교회콘체르토≫(Kleine geistliche Koncerte)는 솔로에서 5성부에 이르는 성악과 콘티누오의 소규모 편성으로 이루어진 종교적 모테트이다. 제1집(SWV 282-305, 1636)과 제2집(SWV 306-337, 1639)이 나뉘어 출판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음악적으로 솔로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많은 성부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유사하다. 대부분 구약성경을 가사로 하고 있으며, 그 외에 신약의 복음서와 바울서신, 저녁기도 찬송가, 루터교의 코랄 등 다양한 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제2집에는 10개의 라틴어 가사가 들어있는데, 이는 아마도 2차 베네치아 방문 때 작곡된 것으로 원래는 독립적으로 출판하려 하였으나 전쟁 막바지의 어려운 경제를 감안하여 여기에 포함시킨 듯하다. 2성부에서 5성부의 곡들은 프레이즈 구성, 모방, 음색의 변화 등에서 전통적인 모테트의 작곡원리를 따르고 있다. 이 곡에 독창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모테트의 일반 원리를 따를 수 없었던 성악솔로와 계속저음을 위한 곡들이다. 쉿츠는 가사를 효과적이고 시적이고 수사학적으로 다루면서 의도적으로 텍스트를 운율에 맞게끔 바꾸어 후렴을 만들기도 하는 등 가사를 음악적으로 명확히 드러나도록 하였다.    
  ≪거룩한 심포니≫ 제1집이 출판된 지 20여년 후에 쉿츠는 제2집과 제3집을 계속하여 출판하였는데, 이들은 ≪작은 교회 콘체르트≫와는 달리 언어와 음악적 구성에서 제1집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거룩한 심포니≫ 제2집(SWV 341-367, 1647)은 제1집의 라틴어와 같은 제목으로 독일어 텍스트를 선택하였으며 기악의 사용이 유행에 따라 두 대의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로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 눈에 띈다. ≪거룩한 심포니≫ 제3집(SWV 398-418, 1650)은 ≪다윗의 시편가≫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기악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텍스트는 구약의 시편가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신약 복음서도 그 못지않게 중요 부분으로 나오면서 예수의 대화나 설교가 강조되고 있다. 쉿츠는 제3집에서 몬테베르디의 격양양식(stile concitato)을 도입하고 있는데, 특히 바울의 회심을 다룬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Saul, Saul was verfolgst du mich, SWV 415)는 내용적으로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교훈적인 곡이면서 가사를 적절하게 묘사적이며 감정적으로 살린 곡으로 매우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회 합창음악≫(Geistliche Chormusik, SWV 369-397, 1658)은 5성부에서 7성부의 성악과 콘티누오로 이루어진 27곡의 모테트 모음곡집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대위법에 의거한 다섯 음악은 새로운 계속저음 기법에만 익숙하기 쉬운 젊은 작곡가들에게 대한 염려를 담고 있다. 쉿츠는 성악음악을 여러 다양한 양식으로서 작곡함으로써 후배 작곡가들에게 본이 되려 했다. ≪거룩한 심포니≫와 비교할 때 옛 기법을 고수하였지만, 가사에 적합한 선율의 배합, 장단조의 조심스런 사용, 호모포니와 합창의 분배 등에서 쉿츠 나름의 음악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만년의 걸작으로 꼽히는 ≪성탄절 히스토리≫(Weihnachts-Historie, SWV 435, 1664)는 원래의 긴 제목이 이야기 하듯, ‘하나님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기쁘고 축복된 탄생 이야기’(Historia der Freuden- und Gnadenreichen Guburth Gottes und Marien Sohnes, Jesu Christi)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1660년 성탄절에 드레스덴 궁정교회의 저녁기도에서 초연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 작품은 1664년 출판된 인쇄본에 복음사가의 악보만이 완전하게 실려 있고 다른 부분은 가사와 기악 편성만이 적혀있다. 이 인쇄본 외에 두 개의 악보가 더 전해지고 있는데(SWV 435a, 435b), 오늘날 연주되는 악보는 여러 출처에서 나온 내용과 첫 시작합창에 있는 계속저음을 조심스럽게 편집한 것이다. 작품의 시작과 끝은 4성부 합창으로 된 <도입>(Introduction)과 5성부 합창의 <종결>(Beschluß)로 이루어진다. 복음사가가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데, 서문에 쓰고 있듯이 쉿츠는 이 곡에서 처음으로 복음사가 부분에 ‘레치타티보 양식’(stylo recitativo)을 사용하고 있다. 천사, 천사의 무리, 목자, 동방박사, 대제사장, 헤롯왕 등의 등장인물이 독창, 중창, 합창으로 색채감을 더하는 다양한 악기편성과 함께 복음사가 사이에 중간 중간 등장한다(Intermedien).   
  쉿츠는 오랫동안 청원하였던 자신의 은퇴가 받아들여 진 후 악단을 정비하여 작곡에 몰두하였다. 그 중 1666년 수난절에 드레스덴의 성 교회(Schloßkirche)에서 초연된 ≪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 SWV 479), ≪누가 수난곡≫(Lukas-Passion, SWV 480), ≪요한 수난곡≫(Johannes-Passion, SWV 481)은 ‘응답적 수난곡’(responsoriale Passion)의 최후의 그리고 가장 성숙한 작품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이미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많은 악기 편성과 해설이 있는 다른 텍스트가 삽입된 콘체르토적인 수난곡이 연주되고 있었던 당시의 경향과 비교해 볼 때, 쉿츠의 수난곡은 순수하게 성경가사만으로 되어있으며, 등장인물을 포함하여 낭독부분은 모두 단성부이고 합창은 4성부나 효과적인 작은 규모의 모테트 양식을 따른다. 낭독부분에서는 쉿츠가 스칸델로에서 이어받은 전통적인 예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텍스트의 의미나 강세에 적합한 음악이 붙여지고 있다.
  쉿츠의 작품들은 거의가 교회음악이었지만 그는 당대에 알려진 모든 작곡기법들을 고루 섭렵하여 그의 음악에 다양하게 적용하였다. 무엇보다 쉿츠는 독일어 텍스트를 어떻게 음악적으로 표현하는가에 골몰하였다. 이탈리아에서 개발한 마드리갈 양식과 계속저음에 의한 콘체르토 양식을 독일어에 적합하게 사용하여 독일음악을 새롭게 형성했다. 그는 이 점에서 후대 독일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음형이론은 제자 베른하르트(C. Bernhardt)를 통해 후대에 전달되었다. 대위법적 전통의 옛 양식과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감정표현의 새 양식을 탁월하게 구사하면서 쉿츠는 독일 교회음악의 토대를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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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자: 20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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