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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겔 [Kagel, Mauri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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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겔(Mauricio Kagel, 1931. 12. 24 부에노스 아이레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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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피아노, 첼로, 오르간, 음악이론 등 음악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다. 음악학교의 오디션에서 떨어진 후 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철학을 배웠다. 당시에 정부가 지원하는 신고전주의 경향을 거부하고, 보다 진보적인  음악세계를 체험하면서(Agrupación Nueva Musica), 작곡가의 꿈을 키웠다. 1950년 함께 설립한 Cinemathèque Argentine를 위한 영화음악에도 열의를 가졌다. 전자음악 스튜디오를 갖고자 한 계획이 실패한 후 실내 오페라단(Teatro Colón)에서 일했다. 또 잡지사(neueva visión)에서 사진과 영화를 위한 편집을 맡았다. 1957년 DAAD 장학금으로 쾰른으로 오게되었고 지금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카겔은 다름슈타트 강습회에 강사로 참여했으며, 1969-75년까지 슈톡하우젠의 뒤를 이어 쾰른의 현대음악 강습회를 이끌고 있다. 그는 1974년 쾰른음악대학의 교수 자리를 받았다. 

카겔의 작품세계는 전통과 새로움이 시각을 통해 의미를 창출하게 한다. 그의 젊은 시절의 경력이 말해주듯이 그는 전통적인 음악어법과 전자음악을 포함하여 새로운 음악어법의 학습에 노력하였고, 문학과 시각적인 예술에서도 이해의 폭을 넓혔다. Palimpsestos (1950, 무반주 혼성합창곡)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에서 탄생한 그의 초창기 작품들은 전통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전통과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50년대 중반에 작곡된 현악육중주(Sexteto de Cuerdas, 1953/57)에는 이러한 내부적 갈등이 잘 나타나는데, 후기 비엔나악파에서의 연주기법 및 음향과 전자음향에 가까운 소음적 요소가 겹쳐있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 들어있는 이러한 내부적 모순 내지 대비를 피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들쳐 내려고 한다. 음악은 총체적인 가능성을 통해서 새로운 청취를 가능하게 하므로 그는 "'새로움'과 '새롭지 않음' 사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각적인 요소가 음악적 요소와 새롭게 만나는 것을 선호한다. 이러한 창작은 또한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데, 모순적인 것과 함께 나타나는 오해 역시 창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카겔의 파격적인 미학은 그의 작품에 케이지가 선보인 것과 같은 우연성이 도입되게 했고(Sur scène, 1959/60; Heterophonie, 1959/61), 동시에 시각적인 요소를 새로운 음재료와 결합시키는 "음악연극"(Instrumentaltheater)이라는 처방을 탄생시키면서 작품에 구체화된다. 이러한 작품에서 소음적인 요소는 가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이 갖게 되고, 또 연주회에서 설득력을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는 이후 이러한 실험적 음악연극에 집중하여 이 분야의 대표자가 된다. 음악연극은 초창기에 주로 소규모 편성으로 나타났지만 카겔에게서는 거대한 규모의 작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국립극장」, 1971; 「독일로부터의 가곡 오페라」, 1981). 이러한 작품에서는 짐머만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꼴라쥬의 기법이 멀티미디어를 비롯한 무대장치와 혼합을 이룬다. 

카겔의 음악연극은 음악에서의 모든 매개변수를 조직화하여 창작세계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시키는 총음렬음악의 한계성이 대두되었고, 케이지의 우연적 음악의 무원칙성이 유럽음악계를 흔들고 있을 때, 이러한 음악들의 소음적 음향을 시각과 연결시켜 생각함으로써 전통과 혁신을 융화시킬 수 있게 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카겔은 1980년대에 들어서서 다시 전통적인 장르에 의한 작품을 내놓으면서(현악사중주 제3번, 1988), 시대성에 연연해하지 않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에 합류한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신의 작품들이 연대순에 의해서가 아니라 알파벳순으로 정리되기를 바랐다. 또 그는 음악작품 못지 않게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자신의 말을 통해서 청중들의 작품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를 기대했다. <작품목록/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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