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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팔레스트리나 [Palestrina, Giovanni Pierluigi]
4회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Palestrina, 1525. 2. 03 로마 근교의 팔레스트리나 - 1594. 2. 02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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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트리나


그는 탄생한 도시의 이름에 따라 팔레스트리나라 불린다. 하지만 그 도시는 프레네스테(라. Praeneste, 이.Prenestino)라 불렸기에 그의 이름 역시 푸레네스테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쓰일 경우 보통 Johannes Aloysius Praenestinus라 표기된다.

팔레스트리나는 거의 교회음악만을 작곡한 작곡가였다. 105곡의 미사, 500곡 정도의 모테트, 그리고 세속음악으로 약 100곡의 마드리갈 등을 남겼다. 그의 작곡기법의 중심에는 네델란드 악파처럼 일관모방식이 있다. 하지만 그는 리듬적으로 더 까다롭고 섬세한 구성을 보여준다. 팔레스트리나는 이태리가 낳은 최초의 대작곡가이다. 그의 이전에는 프랑스와 네델란드 사람들이 유럽의 음악을 -교황이 있었던 로마까지도- 지배했다. 팔레스트리나와 함께 "로마악파"라 불리는 일련의 작곡가들이 나타난다.

팔레스트리나는 1525년경부터 로마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537년 소년 성가대원으로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교회에서 활약했다. 그는 성가대원으로 있으면서 음악적 교육을 받는다. 1544년에는 고향 팔레스트리나의 두오모(Duomo)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겸 가수가 된다. 1547년 팔레스트리나의 유복한 가정집 처녀와 결혼한다. 이들 부부는 세 아이를 갖게 된다. 추기경이었던 지오반니 마리아 델 몬테(Giovanni Maria del Monte) 주교가  교황(율리우스 3세, 1550)에 선출됨에 따라 팔레스트리나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악장에 임명된다(1551. 1. 15). 1554년 자신의 첫번째 미사 작곡집을 교황에게 헌정한다. 1555년 교황은 그를 다른 한 사람과 함께 교황 교회(cappella sistina) 성가대원으로 임명하는데, 이는 기혼자였고 사제가 아니었던 그들에게 내려진 이례적 조처였다. 율리우스 3세의 후임자였던 마르첼로 2세는 불과 몇 개월을 교황에 재위하면서 교회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그 일환의 하나로 1555년 가수들에게 수난절 금요일과 같은 때에는 즐거운 노래를 부르지 말고,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합당한 노래를 부르고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노래하라고 경고한다. 그 다음 교황이었던 바오로 4세는 결혼한 가수들을 교황교회 성가대에서 제외시키면서 팔레스트리나도 다른 두 사람들과 함께 그 일을 그만 두게 된다. 같은 해인 1555년 팔레스트리나는 오를란도 디 랏소의 후임으로 라테라노의 산 지오반니 교회의 악장이 된다. 하지만 이 교회에서의 일은 재정긴축과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1561년 그는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교회로 자리를 옮긴다. 

1566년 팔레스트리나는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교회의 악장 일을 그만 둔다. 1566년부터 71년까지 그는 트리덴트 공의회가 제시한 과제들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설립된 기관(Seminario romano)에서 일하게 되며 동시에 이폴리토 데스테(Ippoloto d'Este) 추기경 밑에서 일하게 된다. 1567년 비엔나의 궁정 악장으로 옮길 생각도 있었으나 그가 원한만큼의 재정적 보상이 거절되어 이주를 단념한다. 1571년 로마의 베드로 성당의 악장이었던 아니무치아가 죽자 팔레스트리나는 그의 후임자가 되어 다시 옛 직장으로 되돌아간다. 1572년과 75년에는 그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죽는다. 팔레스트리나는 이 두 아들의 작품들을 자신의 모테트집에 포함시켜 출판한다(1572). 1577년 그는 졸리오(A. Zoilo)와 함께 "오류와 야만적인 요소"를 그레고리오 성가로부터 제거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하지만 그 사업은 1578년 또는 79년에 그레고리오 8세가 교회개혁을 중단함으로 인해 끝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많은 멜리스마들을 그레고리오 성가로부터 제거하려고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580년 그의 첫 아내가 죽는다. 그는 홀아비로 남아 있을 때 신부가 되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결혼한다. 후처는 모피상을 하는 사람의 과부라서 그는 모피 공장의 주인이 된다. 1583년 그는 만토바의 궁정악장으로 초빙을 받으나 봉급이 맞지 않아 가지 않게 된다. 1594년 악보 출판 준비에 바쁜 가운데 숨을 거둔다. 성 베드로 성당에 묻힌다.             

팔레스트리나가 카톨릭 교회음악의 기준적인 작곡가가 된 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야기 된다. 1545-63년까지 있었던 트리덴트 공의회는 언어 이해가 잘되는 교회음악을 위해 합창음악을 교회에서 제거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또 1562년 9월 17일에는 교회음악에서 세속적인 선율의 차용을 금한다는 결의를 발표한다. 이러한 공의회의개혁 방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공의회는 추기경 보로메오(Carlo Borromeo)와 비텔리(Vitellozzo Vitelli)에게 교회음악 개혁의 임무를 맡긴다. 1565년 추기경 보로메오는 팔레스트리나, 루포(V.Ruffo), 비첸티노(N. Vicentino)에게 가능한한 언어가 잘 이해되는 통상미사를 작곡해달라고 부탁한다. 1565년 4월 28일 추기경 비텔리의 집에서 언어가 잘 이해되는지 알아보기 위한 미사 연주회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일을 위해서 팔레스트리나는 눈 깜작할 사이에 『마르첼로 교황 미사』를 작곡했다는 것이다. 그가 작곡한 음악 덕분에 합창음악은 교회에 허용이 되었고, 이로써 팔레스트리나는 교회음악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핏츠너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팔레스트리나』 1917)

위와 같은 이야기에 대해 최근의 음악학자들은 냉철하게 재검토하는 경향이 있다. 6성부 『마르첼로 교황 미사』는 전해오는 이야기와는 다르게, 1562/63년 겨울에 작곡되었다. 이 곡이 출판된 것은 1567년의 제2 미사곡집에서이고, 이 때에 『마르첼로 교황 미사』(Missa Papae Marcelli)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그가 이미 12년 전에 죽은 교황의 이름을 이 곡의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마르첼로 교황과 교회개혁이 동일시되던 당대의 생각과 부합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르첼로 교황의 교회음악 개혁 의도는 바로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처럼 각 성부가 독립적인 성향을 지니는 폴리포니 음악을 없애는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제2 미사곡집은 예배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는 합창음악이 더 유용하다고 주장한 스페인의 왕 필리포 2세에게 헌정된 책이다. 정말 팔레스트리나의 『마르첼로 교황 미사』가 가사 이해에 탁월한지, 음악적으로 교회음악의 모델이 될만한 곡인지는 별로 생각해본 흔적이 많지 않다. 그의 폴리포니가 언어 낭송에 적합한 형태인지? 그의 음악이 세속음악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지? 하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은 상태로 수백년을 내려왔다. 하지만 『마르첼로 교황 미사』의 테마는 당시에 유행하던 유명한 세속 선율인 『무장인간』(L'homme armé)의 것과 너무도 유사하다. 따라서 이는 당시 공의회가 금하고 싶어했던 세속음악을 패로디한 것이다. 팔레스트리나가 작곡한 미사 절반 가량이 이러한 패로디 미사에 속한다. 물론 거기에는 차용한 것은 세속음악 뿐만 아니라, 교회음악도 -예를 들어 죠스깽의 미사와 같은- 포함되어 있다. 공의회에 모였던 추기경들은 팔레스트리나의 음악보다는 야코부스 데 케를레(Jacobus de Kerle)의 『특별 기도』(Proces speciales)에 대해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가 이른바 "교회음악의 구원자"로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은 1607년 아가짜리에 의해서였다. 그는 팔레스트리나가 새로운 바로크 음악 양식의 창시자이자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폴리포니 음악을 가능케 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팔레스트리나 양식은 리듬의 맥박이 잘 느껴지지 않고, 매끄럽게 진행하는 선율들의 집단적  흐름을 특징으로 한다. 표현은 직접적이지 않고 절제되어 있다. 그 음악적 전통은 네델란드 악파로부터 유래하는 일관모방 양식을 지키고 있다. 그의 모방양식은 -예를 들어- 그의 음악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죠스깽의 것보다 리듬의 복잡성으로 인해 언어이해가 더 어렵다. 물론 이중합창적인 부분에서는 언어이해가 더 나을지 모르지만, 그의 중심적 기법인 일관모방을 사용한 부분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팔레스트리나는 그의 전설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게 가사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음악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1568년 만토바의 공작이 미사 작곡을 의뢰하자 그는 가사가 쉽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되물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음악은 자신이 늘 작곡하는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필리포 네리가 교회음악 개혁 작업을 하면서 가사 이해를 높이는 음악을 그에게 요청했으나 그는 다른 작곡가들(루포, 아졸라)과는 달리 그런 음악을 작곡하지 않는다. 그의 후기 작품들로 추정되는 라멘타치오네(탄식가), 마니피카트, 힘누스(찬가)에는 그런 가사 이해적 측면을 높인 측면이 있으나, 이는 특별한 전례를 위한 것이며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그는 당시에 있었던 교회음악 개혁에 대해 냉담한 편이었다. 그는 자신이 택한 양식에 충실했던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으로부터 체계화한 이론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전형적 16세기 대위법으로 간주된다. 그 대표적 이론가는 바로크 후반의 푹스(Johann Joseph Fux)이다. 그는 『파르나소에의 계단』(Gradus ad Parnassum, 1725)에서 팔레스트리나 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대위법 학습을 위한 이론을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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