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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4,122회
홍난파(洪蘭坡, 본명: 永厚, 일본이름: 모리카와 준’森川潤’, 예명: 羅素雲, 1898화성 - 1941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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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음악평론가, 수필가, 소설가, 번역가. 43세의 짧은 생애를 산 당시의 한국 음악인으로서는 대단히 다양한 예술활동을 벌였다. 그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홍준(洪埻)과 부인 이씨 사이에서 난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 양금, 퉁소 등을 연주했다. 난파는 그 중 양금을 연주했다.

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다. 1910년 9월 그는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YMCA) 중학부에 입학했고, 이 곳에서 김인식을 만나 바이올린에 접하게 된다.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에 입학한다. 처음에는 국악을 배우러 들어갔으나, 곧 서양음악으로 방향을 바꾸어 1년을 다녀 성악과정을 마친 후 기악과에서 계속 공부한다. 1914년에 그는 이미 중앙기독교청년회 회관(YMCA) 중학부를 졸업했다. 1915년 그는 16세의 나이로 김상운(金祥雲 1898∼1926)과 결혼한다. 1916년에는 조선정악정습소 서양악부 교사에 임명되어 2년간 근무한다. 한편으로 그는 중앙예배당 안의 영신학교 교실에 음악 강습소를 차려 악리, 음계 연습, 유행 창가 교습을 지도했다. 그는 이런 교육에 필요한 『통속창가집』 (초판 1916. 10. 20)과 『악전대요』(같은 해 4. 10)를 출판한다. 당시의 음악활동으로는 1914년에 김인식이 세운 <경성찬양회>의 음악회에서 활약하였다. 1917년에는 김인식, 이상준, 김형준, 형 홍석후와 함께 새문안교회의 집사로 임명 받는다. 그는 새문안교회와 안동교회의 성가대 지휘자로 일한 경력이 있는데, 정확한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1924년경에 찍은 새문안 교회 성가대 사진에 그가 찍힌 것이 보인다.

그 다음 해에 그는 2년 과정의 일본 동경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한다(1918-19). 그는 동경 YMCA를 중심으로 일어난 2.8운동(3ㆍ1 운동에 앞서간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국으로 귀국한다. 귀국 후 그는 세계 문학 작품들을 읽는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1919년 그는 잡지 「三光」창간호 출판하였으나, 이는 4호를 내고 폐간된다.

1920년 동경음악학교 본과 진학을 거절당해 다시 귀국했고, 미국 유학을 계획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1년 그는 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제1창작집 「처녀혼」을 출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같은 해에 오늘날 『쿠오 바디스』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어데로 가나(센쿠위츠 작)를 번역하였고, 잡지 「음악과 문학」을 창간한다(황석우와 공동 편집). 1922년에는 일종의 음악학원인 연악회를 창설했고 한편으로 독일 비자를 신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트루게네프 『첫사랑』을 번역하여 출판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 『최후의 악수』, 『虛榮』을 출판한다. 1923년 그는 한편으로 음악활동을 하면서 계속적으로 번역서와 창작집을 출판한다: 『매국노의 자』(스델만 작), 제2창작집 『向日草』, 『청춘의 사랑』(홍난파 저), 『靑年立志論』(스마일스 저), 제3창작집 『폭풍우 지난 뒤』. 이러한 사실들을 살펴보면 그가 20-23년에 문학에 더 기울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24년을 기점으로 음악 쪽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1월 19일  자신의 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는데, 연주곡목에는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2번, 바하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1번 1,2악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해에 그는 연악회를 중심으로하는 음악활동에도 열심이었고, 평론도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설을 번역하는 일도 계속했다: 에밀 졸라의 『나나』. 1925년 역시 연악회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활동이 이어진다. 그리고 생의 세 번째 잡지 「음악계」를 창간한다. 이 잡지 역시 4호를 끝으로 폐간된다. 그리고 그가 손수 골필로 악보를 그린 『세계명작합창가집』(등사본)을 출판한다.

1926년에 거행된 연악회 주최 “그랜드 콘서트”(YMCA 강당)는 이제 제법 그럴듯한 음악가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성악의 김형준, 피아니스트 김원복, 박경호, 박인덕, 첼리스트 백명곤의 이름이 보인다. 5월에 그의 아내 김상운이 병으로 죽는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가서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에 입학하는 한편, 다시 서울에 와서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를 만들고,  『세계의 악성』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한다.

1928년 그는 동경에 있는 신교향악단(新交響樂團)의 바이올린 주자로 입단했고 그 다음 해인 1929년에는 동경고등음악원 본과를 졸업한다. 그 후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연악회를 부활시키고 째즈 밴드(Korean Jazz Band)를 만들어 방송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해 9월에는 홍성유, 김원복과 함께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주임교수에 취임한다. 그리고 이 해에는 보육학교의 교육을 고려하여 『조선동요백곡집』(상편-25곡, 손수 그린 등사본, 1930년에는 인쇄본 나옴) 출판한다. 또한 『세계명작가곡선집』(등사본, 인쇄본은 1931년에 나옴)도 손수 악보를 그려서 출판한다. 

1930년 그는 기존에 같이 음악활동하던 사람들 외에도 안익태, 안기영, 현제명, 채동선, 김원복, 김영의, 독고선, 홍재유, 황재경 등과도 함께 연주활동을 한다. 1931년에는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를 하여 그의 이름이 많이 알려진다. 이 해에는 『조선동요백곡집』(하편 손수 그린 등사본, 인쇄본은 1933년에 나옴)과 작품집으로 바이올린 독주곡 『로만스』, 『애수의 조선』, 『동양풍무곡』, 『夏夜의 星群』이 출판된다. 이 해 7월 30일 그는 미국유학을 떠난다. 그는 9월에 미국 시카고에 있는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 입학하여 바이올린과 작곡 이론을 배운다(바이올린 교수: Marinus Paulsen, 작곡이론 교수: W. Keller). 그의 미국 생활은 매우 혹독한 것이었다. 그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하여 수차에 걸친 분납을 해야 했다. 그는 잘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도 많이 하여 건강도 좋지 않았다. 거기다가 교통사고로 늑골을 다친 일도 있었다. 1932년 5월 27일 그는 일년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그리고 1933년 1월에 귀국한다. 한국에 돌아와 그는 소속되어 있던 중앙보육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경성보육학교의 교수로 취임한다. 그는 귀국 독주회를 개최하고 『조선가요작곡집 제1집』을 출판한다. 그러니까 그의 “가곡”은 “가요”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난파 트리오」를 조직하여 진고개(충무로)에 있던「明治製菓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난파트리오는 1936년 해체됨). 그리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1934년 그는 일본 빅타(Victor) 축음기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에 취임하고 그 해 12월에는 김대형(李大亨)과 결혼한다. 그는 음반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문과 잡지에 음악에 관한 글들을 끊임없이 발표한다. 음반회사와 관계하면서 그는 영화음악이나 신민요 그리고 가요에도 관여하였다. 이런 부분과 관련될 경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고 적었다.

1936년에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코리아음악연구소」창설하여 성악•바이올린•피아노•악리과를 설치하여 음악을 가르쳤다. 그리고 『특선가요곡집』을 출판하였다. 1937년 그는 빅타 축음기회사와 경성보육학교를 거의 동시에 사임하고 석달후 경성 중앙방송국 양악 책임자 겸 방송관현악단 지휘자에 취임한다. 그리고 이흥렬, 김태연(金泰淵)과 함게 「성서(城西) 트리오」를 조직한다.

1937년 이후 일제의 성격은 더욱 흉포화한다. 이 해에 그는 조선총독부가 조종하는 조선문예회에 가입하면서부터는 그는 총독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방향에 서고 만다. 1938년에는 수필집 『음악만필』(音樂漫筆) 출판을 출판한다. 그리고 1939년에는 JODK(경성방송국) 제2방송을 통해 모차르트의 주피터 심포니를 연주하여 방송한다.

1940년대에는 모든 것이 전쟁에 맞추어 생각되었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그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일제를 위한 대동아 전쟁의 선전원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 다음해인 1941년에 세상을 뜬다.

홍난파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음악가이다. 이는 한국 역사상 한 음악가에 부여된 명성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음악에 서려있는 “애수”를 사람들은 즐겨 “민족의 애수”로 받아들였다. 이런 면은 홍난파의 발언으로 뒷받침되지 않음에도 그러했다. 물론 그가 총독부의 일을 즐겨했다는 흔적은 없다. 그가 총독부 일을 부담스러워했다는 친지의 증언은 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지울 수 없는 친일의 글을 남기고 있다. 그를 위해 애석한 일이다.

홍난파의 일생은 식민지 시기 내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식민지 시기가 끝나면서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그는  『봉선화』,  『금강에 살어리랏다』,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와 같은 “가요”와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를 통해 해방 직후의 음악 교과서를 통해 한국인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봉선화』와 『고향의 봄』과 같은 노래는 이미 그 이전부터 민요보다 더 광범위하게 불리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과서에서 보는 그의 독과점적인 위치는 그를 거의 한국의 대표 음악가처럼 알려지게 한다. 이는 교과서에 실리는 일제시기에 창작된 문학 작품들의 경우도 홍난파와 유사한 대우를 받기는 하지만 문학에서는 홍난파와 같은 독과점 상태를 성취한 경우는 없었다. 그 이전의 음악가로는 김인식, 이상준, 김형준 등의 음악가가 있었으나 그와는 전혀 비교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보다 조금 늦은 현제명, 박경호, 박태준 역시 그의 음악에 비해 질적으로 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경우였다. 

홍난파는 몇 편의 기악곡을 남겼다고는 하나 그 곡들은 본격적으로 기악적인 상태에는 이르지 못한 것들이다. 즉 홍난파의 기악곡들은 “노래”의 상태를 겨우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음악적 성취는 성악 분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어와 이제 막 익힌 서양식 음악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결합시킨 것은 홍난파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기존의 한국 노래(민요)들이 장단의 틀 속에 선율을 집어넣어 그 속에서 선율이 밀리기도 당기기도 하는 반면에, 그의 노래는 가사의 음절 수에 따라 같은 리듬이 자꾸 반복되는 모습을 갖는다. 예를 들어 『봉선화』는 처음 네 음(또는 네 음절)의 리듬이 12번 반복되면서 한 곡을 이룬다. 물론 그의 모든 노래가 정확히 똑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약간 변하는 경우도 많다. 그대로든지 변하든지 간에 이런 반복적 리듬의 경향은 그의 음악에서 보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는 찬송가의 리듬 구성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는 선율 면에서 찬송가와 비슷한 음악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일반인이 부를 있는 한 옥타브를 약간 벗어나는 음역의 선율만을 사용한다. 즉 그의 노래는 리듬적으로 선율적으로 대단히 쉽게 배울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는 “가요”(가곡)에서 못갖춘 마디의 음악을 많이 썼는데, 이상하게 들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작은 음악(노래)의 대가였던 것이다. 후에 윤이상이 그의 동요들이 “주옥과 같다”고 말한 것은 일리가 있다. 홍난파는 자신의 음악으로 대단한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적 능력에 대해서도 스스로 회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잘 해낸 사람이었고, 당대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 작곡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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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수


작곡(가)사전 한독음악학회


홍난파(洪蘭坡, 1898-1941)

-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홍준(洪埻)의 차남으로 출생.
- 서울 정동교회에서 찬송가를 듣고 배우면서 음악적 소양을 키움.
-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 중학과 시절, 찬송가 독보법을 습득하고 김인식(金寅植)에게 바이올린을 배움.
-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함.
- 동경음악학교 예과에 진학했으나, 3ㆍ1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본과에 진학하지 못하고 제적당함.
-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를 졸업하고 중앙보육학교 교사로 활동함. 이때 보육학교 학생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조선동요100곡집≫ 상편의 동요 50편을 작곡함.
- 미국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 연구과에 유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폴센(P. M. Paulsen)에게 배움. 이 시기 ≪조선동요100곡집≫ 하편의 동요 50편과 이은상의 시조에 의한 가곡집 ≪조선가요곡집≫(15편)을 작곡함. 한편으로 도산 안창호(安昌浩)가 이끄는 흥사단 미주본부에 회원으로 가입함.
- 미국에서 귀국한 후 일본 빅터축음기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으로 재직하면서 신민요, 유행가, 영화음악 등을 작곡함. 동시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경성보육학교 교사로 재임함. 연주가로서 그는 수차례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거나, ‘난파트리오’를 조직해서 폭넓은 연주활동을 벌였고, 다수의 음악평문을 씀.
-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일경에 검거, 서울 종로경찰서에 수감됨. 모진 고문 끝에 유학시절에 얻은 건성늑막염이 재발함. 『思想轉向に就いての論文』(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작성한 후 풀려나서 몇 편의 친일논설 및 친일음악을 작곡, 연주함.
- 1941년 8월 30일 서울 홍파동 자택에서 사망.

  홍난파(본명 홍영후’洪永厚’)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음악에 입문하여 작곡ㆍ평론ㆍ음악교육ㆍ지휘ㆍ방송ㆍ레코드 분야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한 한국 근대음악사의 대표적인 서양음악가였다. 
  비록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과 업적은 그의 명성 때문에 대단한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홍난파가 민족음악가인지 친일음악가인지에 대한 문제가 자주 논의되었고, 오늘날에도 사회적 쟁점을 이루고 있다. 그가 이처럼 오랫동안 평가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것은 그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홍난파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민족활동도 했고 친일활동도 했지만, 이는 그의 다양한 활약상 가운데 부수적인 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주요한 삶은 사회운동가로서가 아니라, 음악가로서 일관했던 까닭이었다. 그는 연주가인 동시에, 작곡가ㆍ평론가ㆍ음악교육자ㆍ지휘자로 활동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후대에 주로 작곡가로 기억되었다. 그가 작곡한 많은 노래들은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사회적 요소가 되었고, 더불어서 그도 사회적 인물이 되었다.
  홍난파의 창작활동은 일제강점기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음악은 이 시기가 지나서도 널리 통용되었다. 해방 이후 ≪봉선화≫,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장안사≫, ≪사공의 노래≫와 같은 가곡과 ≪도레미파≫,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고향의 봄≫, ≪하모니카≫, ≪햇빛은 쨍쨍≫과 같은 동요는 초ㆍ중등학교 음악교과서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그는 수용자 대중들로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봉선화≫ 같은 이른바 ‘예술가곡’을 작곡하였다는 이유에서 예술가곡(혹은 예술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홍난파는 스스로 예술음악을 작곡하고자 한 적이 없었으며, 그의 음악도 예술음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제공했고, 그것은 대부분 실용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그는 아마추어 청중을 위해서 바이올린 독주곡을 썼고, 레코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신민요와 유행가를 작곡했으며, 음악교육 교재의 필요성에 따라 동요와 가곡을 만들었다. 따라서 홍난파는 한국 근대시기의 주요한 실용적 음악 작곡가로 평가될 수 있다. 
  문명개화의 시기였던 1920년대 전후, 홍난파는 근대주의적 음악론을 펼쳤다. 근대주의란 일제강점하의 조선이 설령 독립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실력이 부족하므로 독립보다 오히려 실력양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념이었다. 그러니까 근대주의적 음악론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음악적 실력을 먼저 양성해야 한다는 논리라 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조선을 “깨는 때”, 즉 문명개화의 시기로 파악하였다. 그것은 서구의 문명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조선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이 독립함에 있어 음악적 실력을 양성하는 일도 매우 긴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말하는 음악적 실력은 “완전”히 문명화된 서양음악적 실력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이를 적극 배양하는 것이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 까닭에 그는 서양음악의 소개와 보급은 물론, 경성악우회ㆍ연악회ㆍ난파트리오와 같은 각종 악단을 조직하는 등의 열의를 보였다. 그는 그것이 당대 자신이 맡아야 할 임무라고 생각했고, 그래야만이 조선도 문명국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서양음악의 세 요소인 선율ㆍ리듬ㆍ화성이 갖춰진 음악이 “완전한” 음악이며, 그렇지 않은 것을 “완전하지 않는”, 혹은 “원시적인” 음악이라 폄하하기도 하였다. 즉 그의 근대주의적 음악론은 서구 음악이 세계의 보편적 음악이라는 서양중심적 논리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1930년대 들어오면서 다소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음악적 민족주의로서의 신조선음악론(新朝鮮音樂論)을 주창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음악의 창작에 있어서 조선의 정체성과 신분성을 구현하려 한 논리였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앞서 근대주의적 음악론과는 다소 차이가 없지 않았다. 그가 말한 신조선음악은 기존의 서양음악도 아니요, 그렇다고 재래의 조선음악도 아니었다. 그것은 서양음악과 조선음악의 장점을 취해서 만들어야 할 ‘새’ 음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신조선음악을 건설함에 있어서 조선의 전통음악을 토대로 하자고 하지 않았다. 재래의 전통음악이 새로운 시대의 음악적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신조선음악론은 조선음악의 정체성이 내재되지 않은, 혹은 여전히 서양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음악론이라 할 수 있다. 
  홍난파가 조선음악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자유롭게 비판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전통음악적 경험이 일천한 탓으로 여겨진다. 그가 줄곧 천착한 쪽은 서양음악과 서양악기였고, 그것이 그에게 전통음악과 전통악기보다 훨씬 친숙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기독교 문화를 통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수용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홍난파는 1920년 중반부터 실용주의적 성격의 음악론을 제시한 바 있다. 실용주의는 일반적인 경우 실제 생활에 필요한 사상이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작품 자체의 자율성에 가치를 두는 예술지상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그는 예술음악과 예술음악가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활용할만한 일에 활용하고 이용될만한 끝에 이용되어야만 그 가치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예술적 가치보다 실용적 가치에 보다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가정의 화락한 기분”을 위해서 가정음악이 필요하고, “어린이들의 성정을 순화시키고 그의 덕행을 기르는데” 학교음악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폄훼했던 유행가, 또한 유행속가에 대해서도 “듣는 사람에게 흥미나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이 오히려 음악적 효과가 있다고 보았고, 심지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로부터 적성(敵性) 국가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배척되었던 재즈에 대해서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이러한 열린 생각은 그가 신민요ㆍ유행가ㆍ영화주제가 등 레코드음악의 창작을 실현하는 논리적 근거가 되었고, 그의 작품경향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음악론이기도 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수용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그들이 실제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음악을 적재적소에 제공하는 것도 그는 나름대로 민족에 기여하는 것이라 여겼던 까닭일 것이었다.   
  홍난파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아마추어 청중을 위한 바이올린 독주곡과 관현악곡을 포함해서, 레코드 청취자들을 위한 신민요와 유행가, 음악교육 교재로 만들어진 동요와 가곡 등이 그것이었다. 이들은 당대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쓰여진 실용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홍난파의 바이올린독주곡 ≪애수의 조선≫, ≪하야의 성군≫, ≪로망스≫, ≪동양풍의 무곡≫은 모두 문학적인 표제를 갖고 있으며, 각각의 표제가 암시하는 바를 음악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단순한 선율과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악곡임에도 불구하고 악곡의 프레이즈가 길지 않을 뿐 아니라 음역의 폭도 넓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이 가사를 뺀 성악음악에 가까우며, 본격적인 의미에서 기악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자작(自作) 기성곡을 편작한 그의 유일한 관현악곡 ≪관현악 조곡≫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럼에도 형식이 엄격하지 않아 비교적 자유스러운 느낌을 주고, 이따금씩 5음음계를 바탕으로 한 선율에 3박자의 리듬을 사용함으로써 동양적, 또는 한국적 정서를 드러내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홍난파의 음악적 성취는 무엇보다 성악음악, 특히 동요와 가곡 등의 노래에 있다. 이들은 일제 시기는 물론,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폭넓게 노래되고 있고, 이를 통해 그가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음악 작곡가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홍난파 노래는 주로 정형시를 가사로 선택하고, 거기에 리듬을 정형적으로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정형적인 가사란 일정한 형식에 따라 음절수가 맞추어진 가사를 말하는데, 가령 언어의 의미그룹이 3(4)+4(3), 또는 3(4)+4(3)+5와 같이 일관되게 지속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은 정형적인 노래 만들기를 쉽게 한다. 
  홍난파 노래에서 가사에 대한 리듬분배는 음절수와 리듬수를 균등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즉 3음절이 3박자, 4음절이 4박자에 분배될 때는 각각 똑같은 길이의 음표를 사용한다. 예컨대 ‘여름날/하눌은’(구름)과 같이 3음절의 가사를 3박자로 처리할 경우 ‘♩♩♩/♩♩♩’처럼 4분음표 세 개로, ‘은저고리/은바지를’(입분달)처럼 4음절의 가사를 4박으로 처리할 경우 ‘♩♩♩♩/♩♩♩♩’와 같이 4분음표 4개로 균등하게 리듬을 분배한다. 
  그런데 리듬을 균등하게 분배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가령 3음절이 2박자, 3음절이 4박자에 분배될 경우가 그러하다. 이럴 경우 그는 앞의 음표를 길게 하고 뒤의 음표를 짧게 하거나, 앞의 음표를 짧게 하고 뒤의 음표를 길게 해서 리듬을 분배한다. 즉 ‘천년이/됐는지’를 ‘♩♪♪/♪♪♩’로, ‘예쁜성/맑으니’를 ‘이분음표♩♩/♩♩이분음표’ 등으로 처리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홍난파는 모든 노래에서 기본 리듬형을 지속시키지는 않는다. 기본 리듬형을 반복하거나 그것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보다 더 다양한 리듬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리듬변형은 첫째 변화를 통해 단순성을 피하기 위해서, 특정한 음절을 강조하기 위해서, 짧은 음표분할로 장식을 위해서, 가사의 음절수를 맞추기 위해서 각각 이루어진다. 결국 리듬의 반복과 그 변형은 홍난파 음악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 한 옥타브, 혹은 한 옥타브를 조금 넘어서는 음역 내에 5음음계나 7음음계를 이용해서 선율을 만들고, 이를 지탱해 주는 장․단조의 조성과 주요 3화음 중심의 화성을 적절하게 채워 넣음으로써 노래를 완성한다. 
  따라서 홍난파 노래는 양식적으로 매우 단순하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 단순성은 누구나 쉽게 배워서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게 한다. 단순하기 때문에 ‘쉬운’ 그의 노래는 당대는 물론 후대의 수용자들과의 끊임없는 음악적 소통을 가능케 하고, 그것은 실용적 음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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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자: 2010. 7. 24
[김창욱]


홍난파의 작품목록과 편찬악보 목록

가곡

봉숭아(金亨俊 作詩, 1920, 이 시기에는 가사가 없었음.)

{朝鮮歌謠作曲集}(硏樂會, 1930) 第壹輯에 실린 곡
   (1) 봄
   (2) 봄처녀
   (3) 할미꼿
   (4) 개나리
   (5) 고향생각
   (6) 옛동산에 올라
   (7) 옛강물 차저와
   (8) 입담은 꼿봉오리
   (9) 사랑
  (10) 成佛寺의 밤
  (11) 觀德亭
  (12) 그리움
  (13) 萬川橋 우에서
  (14) 長安寺
  (15) 金剛에 살으리랏다


沙工의 노래(咸孝英 作詩, 1932)
봄노래(洪蘭坡 作詩, 합창곡, 1933)

창가
野球戰(홍난파 최초의 노래로 추정되는 창가, 1916)


동요

{朝鮮童謠百曲集}(硏樂會, 1930) 上編에 실린 곡
  (1) 속임(柳志永 謠)
   (2) 도레미파(洪蘭坡 謠)
   (3) 휘ㅅ파람(尹石重 謠)
   (4) 할미꽃(尹克榮 謠)
   (5) 해바라기(洪蘭坡 謠)
   (6) 달마중(尹石重 謠)
   (7) 쪼각빗(申孤松 謠)
   (8) 조희배(金光允 謠)
   (9) 봄편지(徐德出 謠)
  (10) 엄마생각(尹石重 謠)
  (11) 두루맥이(鮮于萬年 謠)
  (12) 옵바생각(崔順愛 謠)
  (13) 수레(崔京化 謠)
  (14) 고향의 봄(李元壽 謠)
  (15) 아가야 자장자장(尹石重 謠)
  (16) 하모니카(尹福鎭 謠)
  (17) 은행나무 아래에서(金水鄕 謠)
  (18) 싀골길(夕虹 謠)
  (19) 감둥병아리(白夏 謠)
  (20) 나무닙(千正鐵 謠)
  (21) 뱃사공(宋茂翼 謠)
  (22) 집신짝(金靑葉 謠)
  (23) 빨간 가락닙(鄭祥奎 謠)
  (24) 초생달(朴愛筍 謠)
  (25) 낫에 나온 반달(尹石重 謠)
  (26) 돌다리(申孤松 謠)
  (27) 가을바람(朴魯春 謠)
  (28) 고향하눌(尹福鎭 謠)
  (29) 퐁당퐁당(尹石重 謠)
  (30) 병정나팔(洪蘭坡 謠)
  (31) 달(崔仁俊 謠)
  (32) 무명초(尹福鎭 謠)
  (33) 어머니 가슴(朴乙松 謠)
  (34) 동리의원(金貴環 謠)
  (35) 작은 별(洪蘭坡 謠)
  (36) 박꽃 아가씨(吳永壽 謠)
  (37) 골목대장(申孤松 謠)
  (38) 바닷가에서(尹福鎭 謠)
  (39) 어머니(朴英鎬 謠)
  (40) 장미꼿(洪蘭坡 謠)
  (41) 봉사꼿(尹石重 謠)
  (42) 옥톡기(鮮于萬年 謠)
  (43) 푸른 언덕(尹福鎭 謠)
  (44) 쫏겨난 동생(尹石重 謠)
  (45) 꿀돼지(尹石重 謠)
  (46) 노래를 불너주오(洪蘭坡 謠)
  (47) 가을밤(李貞求 謠)
  (48) 기럭이(洪蘭坡 謠)
  (49) 참새(金水鄕 謠)
  (50) 밤세톨을 굽다가(尹石重 謠)
3. {朝鮮童謠百曲集}(硏樂會, 1931) 下編에 실린 곡
  (51) 소곰쟁이(韓晶東 謠)
  (52) 꼿밧(李貞求 謠)
  (53) 나발꼿(郭蘆葉 謠)
  (54) 봄ㅅ소식(鮮于萬年 謠)
  (55) 댕댕이(廉根守 謠)
  (56) 우슴(李元壽 謠)
  (57) 봄이오면(郭福山 謠)
  (58) 피리(徐德出 謠)
 (59) 개고리(李東贊 謠)
  (60) 제비꼿(張孝燮 謠)
  (61) 봄바람(石順鳳 謠)
  (62) 무지개(朴熙恪 謠)
  (63) 봄비(朴露兒 謠)
  (64) 진달내(申孤松 謠)
  (65) 꼿밧(朱耀翰 謠)
  (66) 갈닙배(韓晶東 謠)
  (67) 여름(金永壽 謠)
  (68) 구름(朴乙松 謠)
  (69) 콩칠팔새삼륙(洪玉姙 謠)
  (70) 가을(金思燁 謠)
  (71) 까막잡기(朴八陽 謠)
  (72) 밤한톨이 떽떼굴(尹石重 謠)
  (73) 형제별(方定煥 謠)
  (74) 햇빗은 쨍쨍(崔玉蘭 謠)
  (75) 꼬부랑 할머니(崔永愛 謠)
  (76) 누나와 동생(徐錦榮 謠)
  (77) 입분달(金泰午 謠)
  (78) 귀뜨람이(方定煥 謠)
  (79) 형제(金尙浩 謠)
  (80) 가을(張永實 謠)
  (81) 바람(朴八陽 謠)
  (82) 돌맹이(尹福鎭 謠)
  (83) 전화(金英熹 謠)
  (84) 들국화(郭蘆葉 謠)
  (85) 시냇물(金聖七 謠)
  (86) 허재비(方定煥 謠)
  (87) 해지는 저녁(李貞求 謠)
  (88) 자장노래(李明植 謠)
  (89) 할머니 편지(廉根守 謠)
  (90) 도는 것(尹福鎭 謠)
  (91) 잠자는 방아(申孤松 謠)
  (92) 도적쥐(全鳳濟 謠)
  (93) 눈•꼿•새(毛鈴 謠)
  (94) 까치야(金基鎭 謠)
  (95) 비누풍선(李元壽 謠)
  (96) 가을(金麗水 謠)
  (97) 영감님(南宮琅 謠)
  (98) 싀집간 누나(劉道順 謠)
  (99) 장군석(李源圭 謠)
 (100) 고드름(柳志永 謠)
4. 새양쥐(尹石重 謠)

5. 姜信明: 兒童歌謠曲選三百曲, 평양,1936에 실린 곡
-초판에 실린 곡:

(1)크리쓰마쓰종(주요한 사),35쪽.
(2)자장가(버들새 사), 88쪽.
(3)좋은 날, 유치원 유희노래(李光洙 사) 199쪽.
 -1940 동경판에 추가된 노래
(1)유치원 원가(이은상 사) 43쪽.
(2)애기별(김복진 사)96쪽
(3)병아리(잠자리) (금수향 사) 97쪽.

기악곡
哀愁(1920년 4월 28일 작곡, 이후 가곡 ‘봉숭아’로 개작, {處女魂}에 실림)
哀愁의 朝鮮(硏樂會, 1927)
東洋風의 舞曲(硏樂會, 1927)
夏夜의 星群(硏樂會, 1931)
로-만스(硏樂會, 1931)
라단조 가보테(1931)
{관현악 조곡}(Orchestral Suite, 1939)
   (1) 즉흥곡(Impromptu)
   (2) 론도(Rondo)
   (3) 동양풍의 무곡(Danse Orientale)

신민요
   (1) 방아찟는 색씨의 노래(金水鄕 作歌, 1931)
   (2) 녹쓴 가락지(尹福鎭 作歌, 1931)
   (3) 鴨綠江(康承翰 作歌, 1934)
   (4) 五月 端午(高馬夫 作歌, 1936)
   (5) 靑空 九萬里(高芭影 作歌, 1936)
   (6) 세골 큰 애기(高芭影 作歌, 金福姬 노래, 1936)
   (7) 望鄕曲(乙巴素 作歌, 1934-37년 작곡추정)
   (8) 北岳山(1934-37년 작곡추정, 홍난파의 작품이 아닐 수도 있음)
   (9) 젊은 朝鮮의 노래(1934-37년 작곡추정, 홍난파의 작품이 아닐 수도 있음)
  (10) 漢陽秋色(羅素雲 作歌, 1934-37년 작곡추정)

2. 유행가
   (1) 白馬江의 追憶(江南月 作詩, 1935)
   (2) 우지 마서요(江南月 作詩, 1935)
   (3) 님의 香氣(異河潤 作詩, 1935)
   (4) 내가 만일 男子라면(홍희명 作詩, 1936)
   (5) 내가 만일 女子라면(홍희명 作詩, 1936)
   (6) 외로운 사랑(金岸曙 作詩, 1936)
   (7) 流浪의 나그네(李扶風 作詩, 李圭南 노래, 1937)
   (8) 청춘마력(李扶風 作詩, 1937)
   (9) 여인의 호소(李扶風 作詩, 安玉鏡 노래, 1939)
  (10) 人生은 30부터(1930년대 말)
  (11) 임 실은 배(1930년대 말)
  (12) 異域의 길손(1930년대 말)
  (13) 다녀가 주세요(1930년대 말)
  (14) 沙漠의 旅人(홍희명 作詩, 李圭南 노래, 1930년대 말)
  (15) 마도로스의 노래(薛道植 노래, 1937년경)

3. 영화주제가
   (1) 그리운 廣寒樓(金八蓮 作詩, 1935, 한국 최초의 토키영화 ‘春香傳’의 주제가)
   (2) 序曲(徐恒錫 作詩, 1938, 영화 ‘愛戀頌’의 제1주제가)
   (3) 放浪曲(崔琴相 作詩, 1938, 영화 ‘愛戀頌’의 제2주제가)

4. 찬송가 편곡 및 4성부 카논
   (1) 눈같이 희게(바이올린과 피아노, 1920년 이후 작곡된 것으로 추정)
   (2) 갗이 곕소서(바이올린과 피아노, 1920년 이후 작곡된 것으로 추정)
   (3) 하날 가는 길(바이올린과 피아노, 1920년 이후 작곡된 것으로 추정)
   (4) 영화의 신(바이올린과 피아노, 1920년 이후 작곡된 것으로 추정)
   (5) 찬미하라(미완성, 바이올린과 피아노, 1920년 이후 작곡된 것으로 추정)
   (6) Four Parts Canon(4성부 카논, 작곡연대불명)

5. 군국가요
  (1) 正義의 凱歌(崔南善 作詞, 1939년 9월 15일 발표)
   (2) 空軍の歌(彩本長夫 作詞, 1939년 9월 15일 발표)
   (3) 希望의 아츰(李光洙 作詞, 1937년 이후 작곡된 것으로 추정)

 
홍난파 편찬 악보

{哀愁의 朝鮮}(硏樂會, 1924)
{夏夜의 星群}(硏樂會, 1924)
{로-만스}(硏樂會, 1924)
{東洋風의 舞曲}(硏樂會, 1933)
{朝鮮歌謠作曲集}(京城: 硏樂會, 1933), 第壹輯.
{朝鮮童謠百曲集}(京城: 硏樂會, 1930), 上編.
{朝鮮歌謠作曲集}(硏樂會, 1930) 第壹輯
{朝鮮童謠百曲集}(京城: 硏樂會, 1931), 下編.
편집: {世界名作歌謠曲選集}(京城: 硏樂會, 1931)
편집:{特選歌謠曲集}(京城: 硏樂會,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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