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장은언
등록일자: 2006-12-20
장은언: 독일 음악교육기관의 발달과정과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의 음악교육사적 의미
I. 들어가는 말
18세기 유럽에서 음악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한 나라 중 이탈리아가 가장 먼저 음악교육기관1)의 필요성을 인식하였으며 독일은 상대적으로 늦다. 음악계의 발전을 이끌어가는 계층이 이탈리아에서는 귀족이나 상류계층이었던 반면 독일은 국민이 음악계의 주역이었던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모든 음악교육을 기독교계 학교와 시립관악대가 담당하였다. 학교교육은 가창수업을, 시립관악대는 악기연주를 각각 맡았다. 이 두 기관의 구분된 음악적 역할이 바로 별도의 음악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음악에 재능이 있거나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 또는 학교나 시립 관악대가 제공하는 것 이상의 음악수업을 받으려면 개인교습에 의존해야 했다. 18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독일 음악교육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시립관악대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이 쇠퇴하고 학교의 가창수업이 장려되는 등 공교육 내의 음악교육에 대한 관심과 자각이 고조되었다.
당시 음악교육은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한다. 첫째는 음악교육이 전인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한다는 인본주의의 관점이며(Erziehung durch Musik) 둘째는 학문적이며 전문적인 음악교육으로, 음악 자체가 교육목적인 전문음악가 교육이다(Erziehung zur Musik). 첫 번째 방향은 특히 음악교육이 일반교육 이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전인교육을 위한 음악교육에 비해 전문 음악교육기관의 역사는 짧다.
본 논문은 독일 음악교육기관이 생성되기 이전의 사회적인 동향과 사상적 배경을 고찰하여 이러한 점이 음악교육기관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프랑스와 이태리의 음악교육기관의 특성을 알아보고 독일 음악교육기관 설립에 어떠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는지 비교해본다. 독일 음악교육기관은 19세기 초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그로 인해 음악교육은 많은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 그 후 1843년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Konservatorium)2)의 설립을 통해 독일 음악교육기관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본 논문은 독일 음악교육기관의 발전과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이 음악교육계에 준 의미를 조명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II. 음악교육기관 생성의 사회적 배경
1800년을 전후로 유럽에서는 국가개념이 발생할 당시 프로이센은 제후국으로부터 근대적 국가형태로 가장 먼저 이행하였다. 영주제도의 붕괴는 각 영주에 소속된 음악가들의 실업과 함께 음악가의 사회적 위치가 하락하였다. 이에 반해 음악애호가들은 오케스트라 또는 합창단을 결성해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쳐 직업음악가들에게 새로운 경쟁상대로 부상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이러한 현상, 즉 경쟁을 통한 음악활동은 음악교육기관의 설립을 필요로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음악가들의 위치회복과 공동체형성을 위해서 정규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한다는 깨달음이 무엇보다 음악교육기관 설립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Sowa 1973, p.22)
이 시기에 음악교육이 일반적인 교육의 한 방편으로 국민교육에 미치는 중요성이 교육학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820년대 후반부터 프로이센에서 음악교과가 국공립학교의 정규수업으로 인정되었다. 음악교육은 특히 국가적인 의미와 윤리적인 면에 역점을 두었다. 교육가 페스탈로찌(Johann Heinrich Pestalozzi)는 국민교육의 기초로서 가창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에 따르면 노래는 가정의 행복에 기여하며 사회적 연대를 유발시키는 힘이 있어 공동체적인 생각과 느낌을 표현한다고 주장하였다.3)(함희주 2002, P. 362) 국민학교의 음악교육은 가창연습이 주를 이루었는데 가사는 바른 정신적인 생활과 실용주의 정신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Sowa 1973, p. 34)
훔볼트(W. v. Humboldt)에 의해 학교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음악교육 발전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는데 그는 가창수업을 정서순화와 교회음악과 민속음악의 향상에 이바지하는 경로로서 김나지움과 고등학교에 도입하였다. 김나지움의 음악교육은 가창수업뿐 아니라 기악음악도 폭넓게 실행하면서 학생오케스트라도 결성하였다. 이 학생오케스트라는 학교의 행사뿐 아니라 궁정악단과의 협연 등 공식 음악회에서도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음악육성책은 음악의 모든 분야를 총괄하는 공식 음악학교의 절실한 필요성을 시사한다. 음악수업을 받는 학생들은 처음부터 교회와 시민단체에서 음악활동으로 봉사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작곡과 기악연주의 체계적인 교육과정이 이전의 학교음악에서 불충분했기에 실제적인 지도와 개인적인 경험이 가장 훌륭한 지도법으로 통용되었으며 이러한 김나지움의 생동적인 음악진흥책은 후에 발생하는 음악대학보다 앞서 있었다. 특히 라이프찌히의 토마스 슐레(Thomasschule), 드레스덴의 크로이쯔 슐레(Kreuzschule), 뤼네부룩의 미하엘리스 슐레(Michaelisschule)에서는 이탈리아의 콘세르바토리오가 실행한 것처럼 음악가를 키우기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세기 중반 이후로 교회합창단이 세속합창단과 경쟁하고 음악애호가 오케스트라가 직업오케스트라와 경쟁하면서 김나지움의 음악교육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음악교육이 전반적인 정신교육의 한 측면으로서 그 중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음악실기보다 윤리적인 면이 지속적으로 강조됨으로서 음악이 미학적, 도덕적, 종교적 감성을 형성하며 진정한 인성교육에 기여하는 과목으로 자리 잡은 것은 김나지움 음악교육의 성과로 꼽힌다.
대학의 음악교육은 음악이 전체 국민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다.4) 19세기 초반부터 대학5)은 음악교수를 채용하였고 음악이론, 음향학, 음악사, 화성학 등의 음악 강좌를 개설하였다. 그밖에 작곡과 악기연주수업이 개설되었다. 이렇게 독일의 대학은 학생들에게 음악지식과 음악실기 과목을 제공하였으며 더 나아가 합창단원과 연주가로서 시립음악협회에서 함께 공연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오래전부터 내려온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6)의 활동이 새로이 활발해졌으며 대학의 음악활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순수한 음악학교의 설립에 자극제가 되었다.(Sowa 1973, p. 216-218)
III. 음악교육기관의 생성과 발달과정
1.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악교육기관
1800년대 초반 외국의 공공 음악교육기관이 독일에 알려졌을 때 비로소 독일에서도 음악교육기관에 대한 계획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중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음악교육기관에 관한 보도가 독일 음악교육기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는 1795년 파리에 국립음악원(Conservatoire National de Musique)을 설립하였다. 이 음악원의 전신은 1784년 파리의 그랑 오페라(Grand Opera)가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한 “성악학교”(Ecole Royale de Chant et de Declamation)이다. 이곳의 교육과정에 군악대의 후임 연주자의 충원을 위한 악기수업을 도입함으로서 국립음악원으로 발전하였다. 파리 국립음악원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을 필요로 했던 프랑스 군대 때문이었다. 파리 국립음악원은 이로써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국가음악기관으로 승인되었다. 1830년 독일의 음악전문 잡지 헤스페루스(Hesperus)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파리 국립음악원은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기관으로서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다. 이 기관은 규모와 예술적인 기능면에서 매우 중요하며 놀라움을 준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완벽하고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연주하였다."(Hesperus 1830, p. 317)
이처럼 성악학교로 출발한 파리 국립음악원은 악기수업을 도입하면서 악기연주를 더 장려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년에 한번 시행하는 종합시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켰으며 대외적인 대규모 학생음악회와 한 달에 한 번씩 개최하는 소규모 음악회를 통해 음악연주의 실전을 훈련하였다. 또한 파리 국립음악원을 모범으로 지방에 분교를 세워 프랑스 전체의 음악교육기관을 활성화 하고자 하였다. 이 중앙 집중적인 음악교육행정은 후에 독일의 프로이센에서도 기본 이념으로 나타난다. 파리 음악대학은 독일의 입장에서 가장 훌륭한 기관으로 인정받았으며 규모 또한 모범이 되었으나 애국심과 자긍심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면은 수용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교육방침, 국가와 국민에게 재능을 바쳐야한다는 이념은 학생들의 졸업증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음악과 음악장려는 국가의 업무이며 후진양성은 애국적인 행위로 인정되었다. 파리 국립음악원은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만을 선발하였다. 프랑스인에게만 국한하며 나이를 제한하는 선발방침은 반면에 많은 비평을 야기했다.(Sowa 1973, pp. 44-46, Schmidkunz 1903, p. 184)
프랑스에 고무되어 독일 내 음악교육기관 기획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던 때에 이탈리아 음악교육기관에 대하여 보도되었다.7) 프랑스의 음악기관 설립경위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음악교육기관은 “콘세르바토리오”라는 고아원내에서 음악교육을 함으로서 시작되었다. 16세기 수도회 연합회는 나폴리에 수많은 고아들을 콘세르바토리오에 수용하여 교육하였으며 이 중 음악에 재능이 있는 어린이를 한 반으로 편성하여 음악수업을 진행하였다. 음악반은 점차 인원이 늘어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어린이들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연습을 통해 음악을 삶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었다. 점차 각 콘세르바토리오는 합창단 또는 오케스트라를 전문화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799년 나폴레옹이 나폴리를 침공한 이후 콘세르바토리오는 소멸되고 말았다.(Schmidkunz 1903, p. 183)
1800년대에 이르러서 이탈리아의 음악교육기관은 재구성 되었다. 콘세르바토리오는 음악에 재능 있는 청소년만을 수용한다는 새로운 구상 하에서였다. 프랑스와는 달리 외국인 학생도 입학을 허용하였다. 밀라노, 베네치아, 볼로냐 등에 재구성된 콘세르바토리오는 특히 성악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탈리아의 음악교육기관은 1800년 이후로 두 가지의 유지정책을 세웠다. 영주의 재단이 되거나 국가의 산하기관이 되는 것이었는데 이로써 수업료가 면제되고 학생들에게 숙식도 제공되는 전적인 음악진흥정책으로 발전하였다. 음악교육은 어린이부터 시작되었고 성악이 교육 프로그램의 중점이었다. 종교, 예절, 작문, 수학, 언어 등 일반적인 인문사회 교과목도 음악수업과 함께 병행하였다. 이탈리아 음악교육의 방침은 이렇게 성악중심 교육과정과 전반적인 일반교육을 병행함으로서 파리 국립음악원의 교육과 구별된다. 이러한 이태리식 유형의 음악기관은 독일 내에서 프랑스의 유형보다 더 큰 관심과 호응을 얻었다.(Sowa 1973, pp. 47-49)
2. 다양한 형태의 독일 음악교육기관
같은 유럽 내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음악교육기관이 설립되어 발전을 이루던 시기에 독일은 비로소 공공 음악교육기관에 관한 논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상대적으로 뒤늦게 출발했지만 독일의 음악학교는 설립과정과 체제에서 각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형태로서 나타났다. 먼저 음악교육기관의 기획에서 확고한 교육의 목적과 함께 음악교육이 추구해야할 방향을 제시했다. 우선 음악교육이 국민음악교육의 측면에서 비전문가와 전문가를 위한 교육으로 세분화 할 것을 명시하였다. 음악교육 계획안이 명시하는 목표는 다음과 같다.
1. 음악교육은 작곡, 성악, 기악연주 모든 방면의 음악가를 육성한다.
2. 일반인과 음악애호가에게도 포괄적인 음악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3. 칸토르, 오르가니스트 즉 교회음악가에게 철저한 기술적인 능력을 함양하게 한다.(Sowa 1973, p. 84)
독일 음악교육기관은 운영적인 면에서 중앙집권적이며 상부기관의 지시에 의해서 설립된 프랑스식과 음악교육기관이 지방 자치구역의 필요에 의해 나타난 이탈리아식이 각각 독립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전인교육에 의거한 음악교육의 이념과 성악교육을 강조하는 독일의 음악교육방침은 이탈리아의 것에 더 근접한다.
1) 음악협회 소속의 음악학교
첫 번째 형태의 음악교육기관은 18세기부터 음악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준 공익 음악협회(Musikverein)에서 설립한 음악학교이다. 음악협회는 각 지역에 자치적으로 존재하며 시민음악문화를 형성해 왔다. 그 대표적 예로서 남부독일 바이어른 주의 파사우 음악학교를 들 수 있다. 1803년 파사우의 대주교구가 국유화되면서 이 작은 도시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궁정악단이 해체되면서 단원들은 실업자가 되었고 심지어 사교계의 문화활동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무원, 장교, 성직자, 시민 등 여러 계층의 인사들이 단합하여 창단된 “독서협회”(Leseverein)는 사교계 문화를 활성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모임을 계기로 파사우 대학생들이 성악과 기악 등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독학 또는 음악교사 페르디난드 칼라우스(Ferdinand Kallaus)의 지도를 받아 음악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학생 자치단체의 활동을 지켜본 교수진과 학부모, 친지들이 그들의 재능을 집중적이며 체계적으로 장려할 의무를 느꼈으며 특히 당시의 학장 미하엘 발트하우저(Michael Waldhauser)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1812년 가을에 음악애호가를 후원자로 만들기 위하여 음악협회를 창설하였다. 이 협회의 목적은 “훌륭한 음악가의 작품연주를 통한 교회음악의 향상과 음악교육기관의 설립”이었다.(Sowa 1973, p. 96) 음악수업은 대학건물에서 이루어졌고 교수진은 실업자가 된 궁정악단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모든 학생에게 무료로 개방되었다.
파사우 음악협회는 짧은 기간 내에 음악애호가와 유능한 교육가들의 후원과 노력으로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초기의 발전상황은 유럽 내의 저명한 음악기관인 프라하와 비엔나 콘세르바토리움을 능가하였다. 이와 함께 자연적으로 음악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발전은 음악 애호가, 직업 음악가, 학교, 담당관청의 공동작업의 토대 위에 이루어졌다. 8000명 인구의 작은 도시에서 이룩한 음악협회의 연주활동과 학생 수의 규모8)는 주정부 수도에서 담당할 만한 업적이었다. 1822년부터 성악수업에 큰 비중을 둔 음악학교는 성악을 필수과목으로 정하였다. 악기수업을 이수하기 전에 성악수업을 먼저 이수하도록 정함으로서 이 음악학교의 특색을 분명히 표명하였다.(Sowa 1973, p 95-100)
2) 교회음악학교
프로이센주에 나타난 국립음악기관의 대표적인 형태는 카알 프리드리히 첼터(Karl Friedrich Zelter)의 교회음악학교다. 첼터는 음악계에 음악기관을 중앙집권화하는 일과 음악교육기관의 개혁에 힘썼으며 특히 교회음악과 학교음악교육의 문제를 개선하는데 주력하였다. 첼터는 음악교육문제에 관한 전문적인 고문위원 및 조직위원으로서 당시 교회음악의 개선에 관심을 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의 후원을 얻었다.
1700년부터 존속하는 프로이센 예술대학의 활동범위를 활성화하고 완성시키기 위하여 첼터는 여러 개혁안을 제안하였다. 대학에 음악과를 설립하여 새로운 규정을 세울 것과 음악과에 국가에서 세운 교수를 임용할 것, 시립관현악단의 재편성, 교회음악 개혁, 교회음악과와 음악교육과 설립, 칸토르와 오르가니스트를 위한 국가고시 도입 등이 그의 개혁안이다. 그의 개혁에 대한 노력의 결과로 베를린(Berlin 1822), 브레슬라우(Breslau 1815), 쾨닉스베르그(Königsberg 1824)에 교회음악학교가 세워졌다.
1822년에 비로소 세워진 베를린의 교회음악학교의 명칭을 첼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음악교사를 지망하는 김나지움과 사범대학의 학생과 오르가니스트의 교육과 교회음악의 장려를 목적으로 한 베를린 음악학교”(Max Schipke 1922, p. 11). 이 교회음악학교는 성악가나 오케스트라 연주가 등 순수 음악가를 양성하는 목적이 아닌 오로지 오르가니스트와 음악교사의 교육에 주목적을 둔 학과로서 교사교육은 순수한 교사활동에 초점을 맞추었고 오르가니스트는 불가피한 경우를 대비해 교사역할도 담당해야 했다.(Schipke 1922, pp. 5-14)
같은 목적을 표방하는 베를린, 브레슬라우, 쾨닉스베르그 교회음악학교와 함께 프로이센은 첼터의 발의에 의해 독립된 음악교육기관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교육기관은 실기교육과 1년의 전문적인 교과과정을 갖추면서 다른 음악교육기관과 성격을 달리하였다. 첼터는 페스탈로찌의 교육방침에 근거한 성악교육을 음악교육의 기본으로 삼아 교회음악학교를 대학의 성격을 지닌 동급기관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음악을 전인교육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으며 이 세 곳의 교회음악학교는 다른 사범 교육기관에 모범과 방향을 제시하였다. 특히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교육이념과 일치하는 성악수업에 가장 큰 비중을 두어 성악수업, 성악방법론, 합창수업 등 과목별 분류수업이 이루어졌다. 이 음악학교는 독일의 첫 번째 국립음악교육기관으로서 국민에게 음악교육을 실시하려는 취지에서 출발하였다. 첼터는 이러한 자신의 음악개혁의지를 당시 정부의 이념과 발맞추어 교회음악가와 음악교사 양성을 통해 펼쳐나갔다.(Sowa 1973, pp. 117-124, Moser 1932, pp. 7-10)
3) 일반 종합대학교의 음악과
프로이센 주 정부의 교육이념 하에 설립된 프로이센 교회음악학교와는 달리 뷔르쯔부르크 대학의 음악과는 학생들의 음악에 대한 욕구와 열정, 한 개인의 음악학교 설립에 대한 노력이 정부 기관의 승인과 적극적인 후원을 통하여 설립되었다.
뷔르쯔부르크 음악대학은 이미 존재하는 대학의 부설기관으로 시작하여 발전한 예다. 이러한 특성은 음악과를 설립하여 오랜 기간 동안 운영해온 프란쯔 요제프 프뢸리히(Franz Josef Fröhlich)로부터 기인한다. 그는 예술가이자 학자로서 음악과의 설립에 가장 이상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1803년에 음악대학의 설립을 구상하였는데 2년 전부터 콜레기움 무지쿰을 지휘하면서 자신의 단원을 훌륭한 연주가로 키워나갔다. 그의 경험은 음악교육이 정신적 교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이 자각은 일반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특정한 시간에 성악과 기악을 연습하여 예술적 감성과 미적 감성을 완성시킬 수 있는 음악기관 설립으로 이어졌다.
프뢸리히는 1804년 뷔르쯔부르크 대학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그는 음악실기와 음악사, 음악미학 등의 음악이론을 강의했으며 김나지움 학생에게는 음악기초지식을 가르쳤다. 또한 음악수업을 사범학교 학생과 음악에 재능 있는 일반 청소년에게 확산시켰다. 이로 인해 뷔르쯔부르크의 음악과는 도시의 중심적 음악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음악과는 실기와 이론을 겸비하고 사범학교 학생을 수용함으로서 일반음악대학, 음악학과, 음악교육학과의 성격을 띤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뷔르쯔부르크 대학의 음악과는 1875년 왕립 음악학교의 명칭을 얻었다. 이 음악학교는 종합대학내의 한 부설기관으로 시작하여 독립된 음악학과로 성장한 점에서 프로이센의 교회음악학교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 음악과는 뷔르쯔부르크 대학의 학생과 김나지움 학생, 사범대학 학생의 음악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프뢸리히의 계획과 노력에 의해 설립된 이 음악교육기관은 다른 학교에도 모범이 되었으며 뒤를 이어 다른 도시에도 유사한 학교가 발생하였다.(Kliebert 1903/04, pp. 55-58)
4) 시립음악학교
음악교육에 소명을 가진 음악가 혹은 교육자가 음악교육기관 설립을 위해 대중의 관심과 해당 관청의 경제적 후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아샤펜부르크의 음악학교 설립과정은 반대의 경우를 보여준다. 아샤펜부르크의 시의회와 교육위원회는 지속적으로 음악기관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음악기관을 책임질 만한 능력을 갖춘 인재를 찾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아샤펜부르크 음악학교는 프랑크푸르트 정부의 재단으로 1810년 설립됐다. 아샤펜부르크의 군대 음악가 요제프 베커(Josef Becker)가 교사 겸 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정년이 보장됨으로 독일 최초의 시 공식음악가가 되었다. 1821년 음악학교가 지방정부에 소속되면서 공식시험제도가 도입되고 음악학교는 공식기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교과목은 베커가 군대음악가 출신인 연유로 관악기가 특별히 장려되었다. 시의회와 교육위원회는 아샤펜부르크 음악학교를 “시민음악학교”로 명명했으며 일차적으로 아샤펜부르크의 군대음악가를 위한 학교로 재정비하였으며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시민음악학교는 시민들의 특별한 의지 즉, 모든 계층의 자녀를 위한 음악학교의 의지를 표명한다. 이 시민음악학교는 후에 발생하는 시립음악학교(Stadtmusikschule)9)의 모범이 되었다. 시의회와 교육위원회는 무엇보다 음악학교가 고유의 특색을 유지하도록 지원하였다. 음악애호가들이 연주회를 함께 할 수 있도록 독려함으로서 음악에 관심을 가진 자들에게 보다 많은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여학교와 고아원에도 음악교사를 파견하여 음악교육을 함으로써 음악교육 기회의 균등화를 꾀하였다. 1900년에 시립음악학교로 재정비 된 아샤펜부르크 음악학교는 지금까지 그 면모를 이어오고 있다.(Sowa 1973, pp. 138-142)
19세기 초반에 설립된 독일 음악교육기관은 다양한 형태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네 가지 공통된 목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목표는 각 학교의 상황과 조건에 혹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강조되는 부분이 조금씩 차이 나게 나타난다. 음악 교육기관의 공통된 첫 번째 목적은 인도주의에 따른 국민음악교육이다. 두 번째는 음악애호가와 전문음악인을 위한 음악교육이며 세 번째는 칸토르, 오르가니스트, 음악교사교육이다. 이는 순수 음악교육과 음악교육대학의 구분이 확연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 마지막으로 대학의 음악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이로써 음악은 학문적 위치를 확보한다.10)
지금까지 살펴본 몇몇의 음악교육기관을 통해서 독일의 음악교육기관은 프로이센의 교회음악과를 제외하고 모두 시민, 학생, 음악애호가의 음악에 대한 욕구와 열정에 의해 탄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설립과정은 독일이 프랑스나 이태리의 음악교육기관의 모범을 따랐으나 근본적인 면에서는 고유의 방식을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3. 공공 음악교육기관이 음악교육계에 끼친 영향
공공 음악교육기관이 설립되고 많은 음악교사가 배출되기 이전까지는 예술가는 교육자이기도 하다는 것, 예술은 자유로운 것, 예술지도는 자유롭게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음악적인 실력이 교육적인 자질보다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였으며 예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충분히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음악교육에 대한 방법론과 지도법의 중요성이 인식되지 못한 가운데 차선책으로 음악교육을 담당하는 이들 즉 성직자, 오르가니스트, 칸토르, 교사에게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할 것을 논의하였다. 1830년 11월 프로이센에 오르가니스트와 국민학교 교사의 국가시험이 도입되면서 교회와 학교음악의 수준이 눈에 띠게 향상되었다. 교사와 오르가니스트 교육은 개인의 예술적 자질의 향상보다는 교회음악의 향상과 일반적인 학교음악교육의 정착에 이바지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로이센의 교회음악 교육기관은 다른 주의 모범이 된다. 이 음악학교의 구성원은 장래의 오르가니스트, 칸토르 그리고 가창교사와 같이 교육 분야에 종사할 사람들이었다. 공공 학교의 음악수업은 순수한 가창수업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종교적 노래가 우위를 차지하였다. 가창교육에 중점을 둔 교회음악학교의 졸업생이 학교와 교회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학교음악교육은 질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학교 음악수업이 음악교사와 교회음악가 교육을 통해 향상된 반면 음악수업이 미흡한 공공 학교, 즉 국민학교 또는 김나지움의 학생들에게 공공 음악교육기관이 음악수업을 개방함으로써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음악교육기관이 음악교육에 끼친 영향으로 또한 대학 내의 음악지도의 변화를 들 수 있다. 파사우, 아샤펜부르크의 학생기관과 뷔르쯔부르크의 프뢸리히가 설립한 음악기관이 좋은 예다. 이 세 기관에서 음악은 젊은이에게 정신적 교육요소로서 학교생활에 활력을 주고 정신적으로 긴장된 대학생활에 균형을 주며 몸과 마음을 신선하게 해주는 요소로 인정받았다. 학생들의 음악활동은 성악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활동까지 담당하면서 그 예술적 실력을 교회음악분야와 공공 음악회를 통해 인정받았다. 규모와 실력 그리고 활동을 통해 행사하는 음악적 역할은 전문 음악기관과 견줄 정도의 수준이었다. 실기수업과 함께 화성학, 대위법등의 이론수업도 함께 개설되었으며 특히 뷔르쯔부르크 대학은 이론수업을 광범위하게 개설하였다. 이러한 대학 내의 음악교육기관은 대학생 뿐 아니라 김나지움학생, 사범학교학생, 심지어는 국민학교 학생에게도 강의를 개방하였다. 이러한 개혁적 의지는 프로이센에서는 규정과 법령을 통해 실현되었으나 대학 내의 음악교육기관에서는 순조롭고 상대적으로 빠르게 실현되었다.
공공 음악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전 전문적인 음악교육은 시립관악대와 사설교사가 전담했다. 경영자유화의 물결과 함께 시립관악대의 사회적인 위치는 약화되었고 활동범위도 점점 줄어들었다. 또한 당시대의 흐름인 페스탈로찌의 인도주의 교육이념도 수용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하여 수많은 시립관악대가 해체되었으며 사설교사의 상황도 이와 유사했다. 새로운 시대의 음악교육에 대한 요구는 음악수업이 공공성을 띨 것과 공동수업, 광범위한 음악교육, 엘리트선발과 재능장려정책으로 집약되었다.
공공 음악교육기관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함으로서 시립관악대나 사설교사와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공공 음악교육기관의 설립으로 인하여 그동안 학교 외 음악수업의 전권을 쥐고 있던 개인교사의 시대상도 변화하였다. 공공 음악교육기관의 설립은 음악교육의 기회가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예술과 문화에 대한 시민의식도 높아졌으며 그로 인한 개인교사의 수도 증가하였다. 공공 음악교육기관의 설립과 확산은 균등한 음악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일조하였으며 더불어 사설 음악교육의 질도 향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Sowa 1973, pp. 219-232)
IV. 독일 음악교육기관의 새로운 시대
1.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
1843년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이 세워지기 이전에는 한 개인의 후원에 의해 설립된 음악교육기관은 없었다. 수많은 음악교육기관이 학생 또는 교육자의 자각에 의해 작은 모임으로 시작하였으며 음악학교 설립을 위해 복지가나 정부의 후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러나 라이프찌히는 처음부터 안정된 상황에서 예술적, 교육적 임무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의 배후에는 예술에 조예가 깊은 라이프찌히 시민과 멘델스존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1839년 궁정의 고위관리 하인리히 블륌너 박사(Dr. Heinrich Blümner)가 유산상속자가 없는 가운데 사망하면서 그의 전 재산을 “예술과 학문을 위한 공익 단체의 후원 또는 단체의 설립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했다. 이 사실을 접한 멘델스존(Felix Mendelssuhn-Bartholdy)은 이를 오래전부터 계획해 온 라이프찌히 음악학교 설립의 중요한 기회로 여겼다. 그는 당시의 지방관청 관리이자 후에 장관이 된 요한 파울 폰 팔켄슈타인(Johann Paul von Falkenstein)에게 음악학교 설립의 필요성에 대한 서신을 보냈다.
"음악은 이제 도시에서 뺄 수 없는 높은 정신적 필수품이 되었다. 또한 이 나라에서 장래 음악을 견고히 해야 함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라이프찌히는 이를 위해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도시다. 라이프찌히 대학이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하며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예술적으로 뛰어난 수준을 보유하고 그밖에 활발한 연주활동 등이 이상적 조건이다."(Vogel/ Kipke 1888, P. 8)
블륌너의 유산을 음악학교 설립에 사용하기 위해 멘델스존은 국왕의 허락을 받아 냈다. 1842년 2월 국왕은 음악대학 정관을 승인했으며 그로부터 약 1년 뒤에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쉐 짜이퉁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곳 라이프찌히에 음악의 고등교육을 위한 훌륭한 대학이 곧 문을 열게 된다”. 교수진으로는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 칸토르 겸 음악감독 모리츠 하웁트만(Moritz Hauptmann), 악장 페르디난드 다비드(Ferdinand David), 로버트 슈만(Robert Schumann), 음악감독 아우구스트 폴렌츠(August Pohlenz), 오르가니스트 베커(Becker)가 발표됐다. 이 교수진은 라이프찌히 음악대학의 명성을 높이며 동시에 많은 수의 수준 높은 학생들이 지원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입학은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허용되었다. 가장 뛰어난 교수진에 의해 운영되며 뛰어난 재능 있는 학생을 장려하는 목적 하에 음악대학을 세우려는 의도가 뚜렷이 드러났다.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은 음악의 “고등교육”을 선언하였으며 이와 함께 독립된 정식 대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음악교육기관이 대학의 부속 기관으로 혹은 음악협회나 시에 소속된 음악학교였던 성격과 확연히 구별된다.
아놀드 쉐링(Arnold Schering)은 독일 음악교육기관의 발전을 1843년 전후로 서술하면서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의 설립을 역사의 큰 사건으로 보았으며 이와 함께 독일 음악교육기관의 첫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고 서술했다. 뛰어난 교수진에 의해 그 수준이 보장된 라이프찌히 음악대학은 음악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1843년에 개교하였다. 학교 정관의 첫 조항에 전반적인 학교의 목적이 명시되었다. “음악이론과 실기 공부의 장려”인 조항과 함께 이론이 실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멘델스존의 교육이념이 강조되었다. 그는 특히 음악이론, 화성학, 작곡과목을 강조하였다.
음악의 엘리트 교육을 목적으로 한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은 고액의 수업료를 요구하였기에 경제적 능력이 없는 학생은 이곳에서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학교의 창립과 더불어 46명의 지원자 가운데 22명이 입학시험을 거쳐 선발됐다. 학생 수는 해마다 늘어났고 6명으로 구성된 교수진은 다시 6명을 증원했으며 멘델스존은 1847년 4월 사망 할 때까지 학장직을 맡았다. 1843년 9월 이사회는 학교 안내서를 출간하여 수업기간, 방법과 종류 그리고 학과목 등에 관한 커리큘럼을 공포했다. 정규학제는 3년으로서 그 기간 내에 이론이 항시 우위를 차지하였다. 음악이론을 총망라하는 광범위한 교과목은(화성학, 발성법, 대위법, 푸가, 악식론, 작곡법, 분석, 악기론, 음향학, 음악사, 음악미학, 총보연주, 지휘법, 성악학생을 위한 이탈리아어) 다른 어느 음악학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실기수업은 성악, 합창, 악기연주로서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이 특히 장려되었는데 이는 슈만, 베커, 다비드 등이 전담 교수였기 때문이었고 그 밖의 오케스트라 악기수업은 게반트하우스(Gewandhaus) 오케스트라단원이 담당했다.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은 다른 음악학교와 달리 대학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를 도입하였고, 자율성을 학생들에게 많이 부여했다. 최대한의 자유시간을 이용해 악기연습에 전념할 것을 멘델스존은 강조하였으며 그는 스스로 최소한의 수업을 담당하고 자신의 작곡 활동에 몰두하였다. 대학생활의 자유로움이 보장되는 반면 학생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했는데 이는 예절, 도덕교육이 예술교육의 중요한 구성요소였음을 말해준다.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은 한 음악애호가 개인의 기부로서 시작되었으며 왕궁으로부터 공식 후원을 초기에는 받지 못했다. 그로 인해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은 정부에 소속되지 않았으며 지역 관청이나 교육청의 지시 또한 받지 않았다.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은 순수한 음악전문교육기관으로서 가능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인재양성에 교육목표의 우선순위를 두었다. 이론과목의 강조와 우위를 통해 당시 예술계에 부재한 정신적인 면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은 독일 음악교육기관의 초석이 되었다.(Arnold Schering 1918, pp. 61-78)
2.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 이후의 독일 음악교육계의 변화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이 이전까지의 음악교육기관과 비교하여 갖는 특수성은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콘세르바토리움의 창립경위부터 다른 음악교육기관과 구분된다. 처음부터 멘델스존이라는 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 전문음악가 교육을 위한 학교를 계획하였으며 그에 의하여 경제적, 행정적 조건이 해결되었다. 한 개인의 유산을 학교 기부금으로 사용하기 위한 멘델스존의 노력의 결과로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은 탄생하였다. 두 번째는 교육이념으로 내세운 엘리트중심 교육이다. 당시 음악계를 주도하던 뛰어난 음악가를 교수진으로 임용하였으며 입학시험제도를 실시하여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학생들만을 선발하였다. 이 엘리트 교육이념은 1년에 두 번 실시하는 정규시험을 통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다른 음악교육기관이 인본주의에 입각한 국민음악교육이념을 그 목적으로 하며 음악교육 기회의 균등화를 내세운 것과는 달리 고액의 수업료를 책정한 면에서도 그 특수성이 나타난다. 세 번째는 실기수업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이론수업을 통하여 지금까지 이론과 실기수업을 병행하던 다른 음악교육기관의 교육이념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마지막으로 3년의 정규학제를 갖춘 독립된 음악대학으로서 독일에서 첫 출발을 하였다. 이러한 음악교육에 있어서의 개혁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이후로 많은 음악교육기관이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을 모범으로 삼았다.
음악교육 내에서 일반인을 위한 교육과 직업음악가를 위한 교육의 구분이 초기에는 없었다. 음악장려정책에서도 이 두 분야의 구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각 음악학교에서는 보다 수준 높은 음악교육의 장려를 위해 단계별 교육제도를 실시하였다. 재능 있는 학생을 장려하는 영재교육은 몇몇의 특정한 극장이나 오케스트라부속학교에서 시행되었다. 직업음악가 교육은 음악교육기관의 정책보다는 각 개인의 의지에 좌우되었다. 음악교육의 방법은 학생 개인의 능력에 맞추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1843년까지 독일 공공 음악교육은 많은 시간과 경비를 요구하는 개인교습이 불가능했기에 음악애호가를 위한 교육에 한정되었다. 이에 반해 시대의 요구는 점점 음악전문가를 위한 교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 탄생된 곳이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이다. 수준 높은 전문음악교육은 공식 음악세계의 후진양성을 활성화했으며 음악수업의 전문화와 전문교사의 양성에도 기여하였다.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은 이러한 전문 음악교육의 좋은 예로서 모범이 되며 발전된 방향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1843년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의 설립 이후 수많은 음악학교와 음악교육기관, 오르가니스트 양성기관이 속출했다. 그 밖의 사설학교도 셀 수 없이 늘어났고 규모 또한 커졌다.11) 1900년대에는 음악교사의 수가 포화상태에 이르렀으며 이윽고 1920년대에 새로운 규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음악기관의 모범은 다양한 학과와 전문교사 그리고 대학 음악교육기관의 자격을 갖춘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이 모범이었다.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이 설립된 이후로 음악교육기관은 전문음악가, 교회음악가, 음악교사를 위한 전문 음악교육으로 세분화되어 발전하였다. 또한 일반 음악교육, 즉 음악애호가를 위한 음악교육을 담당하는 음악학교가 전문 음악교육기관과 구분되어 독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현재까지 사회 음악교육제도로서 이어져오고 있다.12)(Sowa 1973, pp. 213-216)
지금까지 독일 음악교육기관의 생성과 발달과정을 요약해 보면 1843년까지 음악교육기관의 시험단계로서 여러 방법의 시도가 있었으며 외국의 발전된 음악교육기관을 모방할 수 없으며 고유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1843년 이후의 음악교육은 전문인을 위한 음악교육과 음악애호가 교육으로 양분화 되었다. 그 전까지 사회의 이상인 국민음악교육과 음악애호가와 직업음악가 교육이 학교와 음악교육기관에서 성공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대학에서 별도로 수행된 음악실기교육이 새롭게 조정되었다. 엘리트 선발과 장려정책이 시행되었고 기초이론수업이 의무화되었다.
VI. 맺는 말
독일의 음악교육은 음악교육기관의 설립에 의해 현저한 질적 향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본문에서 밝혔듯이 음악교육기관을 통해서 4개항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첫 번째 성과로 인도주의에 따른 국민음악교육이 실행되었으며 두 번째로 음악애호가와 전문음악인을 위한 교육이 균형 있게 발전하였다. 세 번째로는 칸토르, 오르가니스트, 음악교사교육으로서 당시 학교음악교육을 당당한 이들에게 체계적인 음악교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는 학교음악교육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음악이 대학의 전공과목으로 부상한 점으로서 이를 계기로 음악은 학문적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소수의 제한된 계층에서만 이루어졌던 체계적이며 수준 높은 음악교육이 이로써 일반적인 교육과정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는 본문의 III 장까지에서 다루었던 전반적인 독일의 음악교육기관의 설립과 발전이 이룩한 성과이다.
더 나아가 라이프찌히 콘세르바토리움은 음악교육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음악교육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기존의 음악교육기관이 일반인, 즉 음악애호가를 위한 음악교육을 담당해 온 것에 비해 이곳은 처음부터 순수하게 음악전문가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출범하였다. 이와 더불어 독일 음악교육기관의 발전은 음악계, 교회음악, 학교음악의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 밖에 실기수업보다 이론수업의 비중을 높임으로서 다른 음악교육기관의 음악교육과 확연하게 구분되며 음악교육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본 논문은 독일 음악교육기관의 시초와 발전상황을 조망하면서 학교음악교육과 사회 음악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위해서는 체계적이며 세분화된 음악교육기관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함을 고찰하였다. 이로써 음악교육의 영역은 전문 음악교육 뿐 아니라 음악애호가 또는 비전문가 더 나아가 국민 모두에게 확산해야 하며 균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음악교육기관의 발전으로 학교 음악교육과 사회 음악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이룩한 독일의 음악교육현황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대학 음악교육기관과 학교음악교육의 보다 더 밀접한 연계성을 고찰하는 계기를 갖고자한다. 실기수업이 이론수업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음악대학의 커리큘럼에 독일 음악교육기관이 실시한 이론을 철저히 겸비한 교육정책을 비교할 수 있으며 학교음악교육 외의 사회음악교육에 제도적 장치가 필요함을 깨우쳐주고 있다.
각주
1) 본 논문에서 언급하는 음악교육기관은 일반학교의 음악교육이 아닌 음악가 교육, 음악교사 교육, 음악 기능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기관을 총칭한다. 음악대학으로 확정되기 이전의 시기에 관한 연구이며 또한 현재의 사회음악 교육제도인 음악학교와 구별하기 위하여 음악교육기관이라는 명칭으로 일관한다.
2) 콘세르바토리움의 어원은 라틴어의 conservare(보존하다)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16-18세기 이탈리아에서 “고아원”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곳에서 음악에 재능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음악교육도 받았다. 특히 이들은 점차 교회음악과 오페라를 위하여 교육되었다. 현재의 콘세르바토리움은 국립, 시립 또는 사립음악학교로서 전문인 양성을 위한 음악대학 또는 음악교육대학을 총칭한다. 이곳에서는 보다 수준 높은 전문음악가와 음악교사를 양성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
3) 페스탈로찌의 음악적 국민교육을 통한 음악교육 개혁안에서의 숙고된 새로운 교육이념은 네겔리 파이퍼에 의해서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음악교육에서 권위중심인 외적사고에 의한 수용(Rezeption)을 비판하였으며 음악교육이 역사적 기술에서 처음으로 음악수업이론에 교육학적 내용을 담았다. 음악 자체가 수업의 중심으로서 음악의 요소들인 리듬, 가락, 다이나믹이 지도되었다.(함희주 2002, p. 362)
4) 첼터는 독일 국가의 교육(Ausbildung der deutschen Nation) 에 관한 주제로 쓴 글을 통해 성악아카데미를 국립기관으로 세울 것을 요청하였으며 자신의 의도를 훔볼트에게 전함으로서 훔볼트는 음악적 교육을 감성교육에 도움을 주며 도덕과 종교적 교화에 기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음악은 그 고유한 성격인 “감성적 작용”을 공인받아 국가교육을 위한 도구로 적용되었다. 또한 1809년 베를린의 예술대학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훔볼트의 제안으로 첼터를 음악교수로 임용함으로서 국왕 직속으로 음악의 육성과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함희주 2002, pp. 357-358)
5) 음악교육의 새로운 방향에 맞추어 일반대학의 음악현실에도 변화가 요구되었다. 바흐시대에 존재했던 음악과 학문의 연계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는데 음악가와 칸토르(Kantor), 오르가니스트에게서 대학교육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악이 예전에는 교육 받은 자들에게 필수였으나 점점 애호가들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음악의 위상이 하락하였다. 그러나 19세기부터 대학에 시민계급의 권리가 영향을 끼치면서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Sowa 1973, p. 25)
6) 콜레기움 무지쿰은 17-18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음악애호가들의 연주단체로서 주로 대학생과 시민계급으로 형성되었으며 처음에는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자신들만을 위한 연주활동으로 시작하였다. 후에 교회와 궁정음악에도 봉사하였으며 공공 연주회도 개최하였다. 이 단체는 주로 독일과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스위스 지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Eberhard Thiel 1984, p. 116)
7)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쉐 짜이퉁(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은 이탈리아 콘세르바토리오의 발전과정을 1805, p. 209, 1806년 p. 502에 상세히 보도하였다.
8) 1822/23년도에 10명의 교사와 466명의 학생으로 음악학교가 구성되었으며 1847년에는 오케스트라 학생 수만 77명에 달하였다. 1813년부터 1843년까지 파사우 음악학교에서 음악수업을 받은 학생 수는 2000여명에 이른다. 연주회는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번 교회에서 미사곡을 연주하였으며 1년에 한번 개최되는 정기연주회에서는 여러 작곡가의 대미사곡과 하이든, 베토벤의 교향곡 등을 연주하였다.
9) 학교음악교육인 공교육 제도권 밖의 음악교육기관인 음악학교로서 어린이,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까지 교육대상으로 한 음악교육기관이며 임무로는 일반 악기연주 뿐만 아니라 음악영재 발굴 및 육성과 평생교육 등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다.(이성율 2005 p. 344)
10) 아샤펜부르크 음악학교는 대학의 음악교육기관은 아니지만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음악교육도 담당했다.
11) 1900년도에 베를린에만 28개의 콘세르바토리움, 18개의 음악기관, 11개의 음악학교, 2개의 음악아카데미 그리고 6곳의 음악교사양성소가 존재했다. 여기에 504명의 남자 사설교사, 244명의 여자 사설교사의 수까지 계산하면 인구 1000명당 1명의 음악교사가 배당되었다.
12) 독일 사회음악교육제도에 대한 참고: 조효임(1987), 이성율(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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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Entwicklungsprozess der institutionellen Musikerziehung und die musikpädagogische Bedeutung des Leipzig-Konservatoriums
Chang, Eun-Un
Am Anfang des 19. Jahrhunderts begannen in Deutschland die musikalischen Erziehungsinstitute zu entstehen. Die musikalischen Institute in Deutschland sind relativ später als in anderen europäischen Ländern entstanden. Aber sie charakterisieren sich in verschiedenen Bestandsformen und eigenständigen Zielsetzungen. Nachdem viele Musikinstitute sich eröffnet haben und der Gesangunterricht in der Schule gefördert wurde, machte die Musikerziehung in der Schule und in der Gesellschaft eindeutige Fortschritte.
Während sich Musikinstitute in vielen Städte eigenständig entwickelt haben, hat sich im Jahr 1843 das Konservatorium in Leipzig unter der Leitung von Felix Mendelssohn-Bartholdy eröffnet. Das Musikkonservatorium Leipzig unterscheidet sich von den bisherigen Musikinstitute in vielen Gesichtspunkten, die die Musikerziehung zur neuen Wege führte. Damit begann in Deutschland eine neue Epoche für die Musikerziehung. Durch dieses Konservatorium wurde die Teilung der allgemeinen und speziellen Musikerziehung geschärft und Musikinstitute werden sich für verschiedenen Fachabteilung wie Musikhochschule, musikpädagogische Hochschule, kirchenmusikalischen Hochschule spezialisiert. Daneben wurde die musiktheoretischen Fächer besonders Bedeutung betont und als Pflichtfächer aufgenommen.
Dieser Aufsatz hat sich das Verfahren herauskristallisiert, dass die Entwicklung der Musikerziehungsinstitute für die Musikerziehung eine wesentliche Voraussetzung ist.
Keywords: Musikerziehungsinstitut, Konservatorium, Gesangunterricht
Musikverein, Volksmusikerzieh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