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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연구/음악학
나주리: 20세기 초반기 회화에서의 ‘바흐 르네상스’ [Bach Renaissance in the Early 20th-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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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리

저자: 나주리

등록일자 : 초기자료


나주리: 20세기 초반기 회화에서의 ‘바흐 르네상스’

[Bach Renaissance in the Early 20th-Century Paintings]


낭만음악73, 2006 겨울, 123-149.

 

 

<요 약>

20세기 초반기에 회화의 본질, 절대적이고 순수하면서도 엄격한 예술로서의 회화가 지향되면서 음악, 특히 바흐의 음악은 불안정한 격변의 시기에 처한 화가들의 새로운 이론정립과 작품창작, 아이디어 구축을 위해 살아있는 역사적 전형으로 부각되었다. 그들은 바흐의 음악에서 흔들림 없는 구조성과 절대성, 추상성, 우주적인 유기체, 극도의 규칙성을 보았고, 이를 거듭 그들의 작품 안으로 끌어들었다. 나아가 그들의 사상과 사고는 결정적인 순간에 바흐를 통해 생산적인 결실을 맺었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회화형식 발견에 있어 결정적인 시기였던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에 깊은 음악적 이해를 갖추었던 선구자적 화가들의 작품들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고 화가들의 바흐 음악 수용 형태는 작곡가들의 그것과 같이 폭넓고 다양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화가들의 바흐 음악 수용 형태가 고찰되고 그 예술사적 배경이 규명된다.

 

색인어: 바흐, 바흐 르네상스, 추상미술, 음악과 회화, 음악의 시각화, 마케, 큐비즘, 쿠프카, 클레, 누보, 코코슈카

 

 

1. 들어가는 말

조형예술의 음악 · 음악이론 수용 역사는 서양문화사의 전 시대를 거쳐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음악은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우주의 조화를 상징하는 예술장르로서 특히 건축과 회화에서 창작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음악의 형식, 화성(비율), 리듬은 근본적인 창작 원리로서 이 두 예술분야에 직접적으로 도입되었다. 예술장르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러한 시도들의 저변에는 예술은 그 본질을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분파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체라는 사고가 깔려있다. 그러나 예술장르들의 융합과 탈경계에 대한 구상과 이론, 그에 따른 실행을 본격적으로 구체화시킨 것은 리햐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 개념이었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작품개념은 강한 생산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통합미학과 공감각에 대한 열광적인 관심을 야기했다. 이와 더불어 팡텡-라투르(Henri de Fantin-Latour 1836-1904), 세잔느(Paul Cézanne 1839-1906),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 베를레느(Paul Verlaine 1844-1896), 메테르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 등을 대표자로 하는 회화와 시()문학을 중심으로 예술장르들간의 교류가 하나의 중요한 지향점으로 부각되었고, 이는 계속해서 독일의 게오르게(George)()’청기사(Blauer Reiter)예술가들에 의해 수용, 확대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세기 초반기의 회화는 더 이상 외부의 가시적인 현실이 아닌, 내부의 감성과 예술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전통적인 대상 재현에서 벗어나 형태, , 색채의 독자성을 우위에 두는 추상으로 전이했다. 이 과정에서 화가들은 새로운 이론정립과 작품창작, 아이디어 구축을 위해 순수한 추상성’, ‘자율적인 유기체’, ‘표현과 구조의 조화를 대표하는 음악으로부터 많은 것을 유추해냈다. 동시에 이들은 -한 특정 유파에 속하는 화가들조차도- 시간성, 운동성, 리듬, 선율, 화성, 다이내믹 등의 다양한 음악 요소들을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론과 작품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화가들은 당시의 음악과 음악이론에 국한하지 않고, 바로크와 고전주의의 음악과 음악이론에도 주목하는 가운데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968-1750)의 음악에서 새로운 회화양식의 전형(典型)을 발견했다.

본 논문은 20세기에 들면서 추상회화의 생성과 정착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바흐의 음악과 작곡양식이 당시의 다양한 미술사조과 그 대표적 화가들에 의해 어떻게 수용, 재창출되었는지 고찰하는데 목적을 둔다. 이와 함께 본 논문에서는 이 시기의 조형예술가들이 바흐의 음악에 특히 주목하게 된 그 근본 원인과 예술사적 배경이 규명될 것이다.

 

 

2. 예술사적 배경

박켄로더(Wilhelm Heinrich Wackenroder 1773-1798), 티크(Johann Ludwig Tieck 1773-1853), 노발리스(Novalis 1772-1801), 슈바르트(Christian Friedrich Daniel Schubart 1739-1791), 쉘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1776-1822) 등의 미학관에 그 토대를 두는 1800년경의 초기 낭만주의 음악관은 음악, 특히 기악음악을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예술장르로 승격시켰다.1) 구체적인 묘사로부터 자유로운 본성과 무형성(無形性)을 특징으로 하는 (기악)음악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에게 가장 순수하고 절대적인 예술을 의미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의 근본선율’(Grundmelodie)2)로서 인간과 세상, 우주 안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만유의 근원적 소리’(Urlaute der Schöpfung)3)을 기반으로 일상적 삶과 이상적 세계, 영혼의 세계를 연결해주고, 우주의 비밀까지도 열어 보여줄 수 있는 예술이었다. 그리고 (기악)음악은 인간을 갱생시키고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로 이해됨으로서 곧 예술종교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초기 낭만주의자들은 (기악)음악이 그 본질적 특성상 다른 예술장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결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초기 낭만주의 미학관은 19세기의 예술관과 예술작품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30년대에는 문학(베를리오즈와 슈만)과 미술(리스트의 <순례의 해>[Annees de Pelerinage] 혼례”[Sposalizio]사색하는 사람”[Penseroso])의 요소를 도입, 융합시키는 음악이 새로운 현상으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작품에서는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나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작품에서처럼 음악 개념의 확대가 구현되었을 뿐, 음악과 미술작품 간의 형식적 동질성이나 특별한 작곡기법의 발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술, 특히 회화의 요소가 음악의 본질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회화에서 대상 재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19세기 말의 일이다. 이때 가령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의 음악에서는 악기들의 색채가 얼마나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사용되는지, 그리고 드뷔시가 특히 선호한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와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의 회화양식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음악에 반영되는지 감지된다.4) 또한 휘슬러의 작품들에서는 <백색 교향곡>(Symphony in white), <푸른색과 은색 야상곡>(Nocturne in blue and silver)과 같은 색채가 실질적인 주제가 되는 작품들이 다수 발견되는데, 드뷔시는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이 아니라 휘슬러에게서 야상곡이라는 작품제목을 따왔으며 색채 음악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1890년대에 작곡된 피아노를 위한 <야상곡><여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야상곡>[Nocturnes tryptique symphonique pour choeur de femme et orchestre]).

회화에 대한 감각과 관심을 가졌던 음악가들에 비해 음악을 심도 있게 이해하고 또 이에 특별한 애착을 느꼈던 화가들의 수는 19세기 초부터 두드러지게 많았다.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들라크르와(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iox 1798-1863),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 고갱(Paul Gauguin 1848-1903),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세잔느, 뭉크(Edvard Munch 1863-1944),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클링어(Max Klinger 1857-1920) 등이 그러한 화가들에 속하는데, 이들은 주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이나 슈만, 쇼팽,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 바그너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으며, 특히 바그너는 1861년의 <탄호이저>(Tannhäuser) 파리 초연 이후 예술장르들간의 상호 교류에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심점으로 부각되었다.5)

낭만주의 화가들이 이상적인 예술인 음악을 자신들의 작품에 수용하는데 있어 그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교향곡적인 작품구성이었다. 이는 교향곡이 다양한 음색층으로 이루어져있는 악기들의 조화로운 결합체로서 가장 포괄적인 음악장르일 뿐 아니라, -호프만에 따르면- 묘사적 요소가 배제되어 있고 풍부한 음역을 지닌 가장 낭만적인 음악형식이기 때문이었다.6) 교향곡적인 작품을 지향하는 이러한 경향은 1885년경 파리에서 교향곡적 회화’(peinture symphonique)라는 말이 대두될 정도로 낭만주의 회화에서 중요한 현상으로 부각되었다. 음악을 모든 예술장르들의 궁극적 기반으로 보았던 룽에(Philipp Otto Runge 1777-1810)는 첫 교향곡 화가로 손꼽힌다.7) 이후 약 반세기가 지났을 무렵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 1804-1871)가 베토벤의 음악을 모델로 한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교향곡 작품 <교향곡>(Die Symphonie, 1849-52)을 제작하였다.

 

(그림 1) 모리츠 폰 슈빈트의 <교향곡>, 166×9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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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의 악장들을 의미하는 네 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이 그림에서는 -슈빈트는 한 편지에서 이 그림의 이야기는 교향곡의 전형적인 부분들, 즉 교향곡[1악장], 안단테, 스케르초, 알레그로에 상응하는 네 개의 부분 안에서 진행된다”8)고 진술한 바 있다- 가정음악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인에게 한 남자가 호감을 느끼는 장면(1악장), 이들이 숲에서 만나는 장면(안단테 악장), 가면무도회에서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스케르초 악장), 신혼여행을 떠나는 장면(알레그로 악장)이 묘사되어있다. 이렇게 뚜렷하고 구체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슈빈트가 교향곡을 작품제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분명 그림의 내용이 아니라, 조화롭고 완성도 높은 형식이 그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형식인 교향곡과 이 그림이 어떤 면에서 합치되는지에 대해 슈빈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라베스크 안에 만연해 있는 자의와 무형식에 싫증이 나고, 한편으로는 여러 개의 그림들로 이루어진 작품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기에 나는 음악에서 가장 큰 발전을 이룩해낸 4악장 형식, 사중주와 소나타, 교향곡의 형식을 취했다.”9) 후기 낭만주의자인 슈빈트의 이 비더마이어적인 그림은 음악을 이상적인 예술, 작품 창작에 있어 주체가 되어야 하는 예술로 본 19세기 화가들의 미학관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회화의 음악화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을 정도로 음악이 회화에서 실질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회화의 본질, 절대적이고 순수한 예술로서의 회화가 지향되면서부터였다. 이러한 회화양식의 변화와 함께 콤포지션, 화성, 리듬, 폴리포니, 음향과 같은 음악의 중심적 개념과 요소들이 회화와 회화이론에 수용, 반영되었고, 음악은 이렇듯 회화가 대상재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에서 이상적인 비재현적 예술장르로서 회화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87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음악을 연상시키는 작품제목이 급격히 증가했고, 나아가 음악의 개념과 요소들은 이제 단순한 메타포의 기능을 넘어서 직접적으로 시각화되기에 이르렀다. 이 새로운 현상들은 다음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글에서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확인된다.

 

설사 예술적이라 하더라도 자연현상을 모방하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는 예술가, 자신의 내적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 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창조자는 이러한 목표들이 오늘날 가장 비물질적인 예술인 음악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고 쉽게 달성되는지 질투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들이 음악으로 눈길을 돌리고, 그들의 예술에서 음악과 동일한 표현수단들을 발견하려 애쓰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회화에서 리듬과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구조가 추구되는 것이고, 또 생생한 색조의 반복, 색채를 움직이게 하는 양식이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10)

 

이 칸딘스키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가시적인 사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색채를 통해 자신들의 내적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화가들에게 음악은 가장 순수하고 절대적인 예술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엄격하고 수학적인 규칙에 의거하는 예술을 의미했다. 따라서 추상성이 강조되면서도 구조와 질서가 유지되는 작품을 지향한 이들에게 베토벤이나 바그너의 음악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모델이 될 수 없었고, 대신 그들은 이보다 더 오래된 바흐의 음악에서 그 전형을 찾았다. 그러한 이유로 젊은 시절 바그너 추종자였던 칸딘스키는 훗날 바흐의 작품을 더 높이 평가했고11), 클레(Paul Klee 1879-1940)는 바흐를 조형예술을 위한 음악의 대()군주”12)라고 칭했다.

바흐의 음악은 추상회화의 경향이 대두되기 전에, 그리고 낭만주의자들의 바흐 재발견에 있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마태수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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