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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룩 [Gluck, Christoph Willib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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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7.2 에라스바흐 -  1787.11.15 비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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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작곡가. 오페라 개혁가. 아리아 중심의 오페라 세리아를 극적 성격의 오페라로 개혁하였다.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자연스러움·단순성·극적인 통합으로 상투적으로 굳어진 이태리·프랑스 오페라의 난제를 극복하였다.  

유년기와 청년기(약 1730 년 까지).
글룩은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그의 학교 교육에 관해서는 단지 추측에 의존한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 글룩은 라이히슈타트 (Reichstadt)로 갔을 것 이다.이곳에서 그리고 오버 크라이비츠(Ober-Kreibitz) 에서 아마  최초의 음악수업을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받았으며, 성악·  바이올린 또한  첼로와 오르간도 배운 것으로 추측된다. 글룩이 점차 음악에 큰 흥미를 보이자 아버지는 음악공부를 중단시키려 하였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대대로 내려온 가족전통에 따라 장남인 글룩을 산림관이 되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충돌이 자주 일어났고, 마침내 글룩(당시 16살 정도)은 집을 나갔다. 그는 노래와 입북(Maultrommel)으로,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후에 아버지가 음악공부를 허락하고, 또 학업을 지원하자 마침내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글룩은 후일 60살이 되었을 때 화가인 만리히Johann Christian Mannlich에게 이야기하였다. 만리히의 회고에 의해 전해진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증명하기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글룩이 롭코비츠(Lobkowitz) 후작을 섬기던 산림관리자 집안 아들이며, 시골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것이다. 부친의 가문에는 예술에 종사한 사람은 없으며, 그가 음악가의 길을 택한 것은 학교, 그리고 다른 알려지지 않는 영향으로부터이다.

궁정악사가 되기까지(약 1730 -1737초).
글룩에 관한 기록은 아주 후에 발견되는데, 프라하 대학 입학을 위한 준비과정(1731)에 비로소 그의 이름이 존재한다. 이후로 그의 대학공부에 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글룩이 언제 프라하를 떠나 비엔나로 갔는지 알려지지 않지만, 1737년(또는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비엔나에서 글룩은 21살에 그의 아버지가 섬겼던 롭코비치 후작  궁정악단의 악사가 되었고, 후에 롬바르디아 후작 멜치(Melzi)를 따라 밀라노로  갔다. 이곳에서 글룩이 작곡가 삼마르티니(G. B. Sammartini) 에게 배웠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간접적 자료들(트리오 소나타,『헤라큘레스와 헤베의 결혼』의 서곡, 『신들의 싸움』의 2막 서주 등)을 통해 그들이 4년 동안(1737-1741) 스승과 제자 관계였음이 짐작된다.

오페라 작곡가로 데뷔.
27살의 글룩은 밀라노에서 오페라 작곡가로 데뷔한다(1741). 이태리의 대본가 메타스타지오(Pietro Metastasio)가 쓴 글룩의 첫 번째 오페라『아르타세르세』(Artaserse) 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745년까지 글룩에게 오페라 작곡요청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데, 7개의 작품이 밀라노, 베니스, 크레모나, 토리노에서 상연되었다: 『클레오니체』, 『데모폰테』,  『티그라네스 』,  『소포니스바』,   『이페르메스트라』,  『포로』 , 『이폴리토』.

1745년 말(?) 글룩은 초청 받아 영국으로 건너갔고, 런던에서『거인의 패망』(La caduta de´giganti) 과『아르타메네』(Artamene)를 1746년 초연 하였다. 영국을 떠나기 전 4월 말, 글룩은 스스로 연주한 유리컵하모니카 연주회도 열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작품 <26개 유리컵 콘체르토> ( Concerto upon twenty-six drinking glasses)로 청중들을 놀라게 했다. 영국체류는 글룩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 중 하나가 헨델과의 만남이다.

예술가의 중심지 비엔나.
글룩이 영국을 떠나 먼저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이후로 글룩은 순회오페라단의 지휘자가 되어 6년간(1746-1752) 함부르크, 코펜하겐, 드레스덴, 프라하, 비엔나, 나폴리를 연주 여행하게 된다. 아마1746년 여름(늦어도1747년 초), 글룩은 함부르크에서 민곳티(Pietro Mingotti) 오페라 순회연주단과 합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 겨울(늦어도 1748년 초) 글룩은 비엔나로 돌아왔는데,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로부터 오페라 작곡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글룩은 여왕의 생일을 위한『다시 알아보게 된 세미라미데』(La Semiramide riconosciuta)를 작곡, 비엔나에서 초연(1748)한 후 다시 민곳티 오페라 순회 단에 합류하여 덴마크로 갔다. 함부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 코펜하겐에서도 글룩은 연주회 지휘자로서 또한 오페라 상연 감독으로서 성공적이었다. 더욱이 이곳에서 자신의 오페라『신들의 싸움』(La contesa de´ Numi, 1749)을 초연하였다.  
민곳티 가극단과 결별한 후 비엔나로 돌아온 글룩은 1750년 9월 비엔나의 부유한 상인의 딸 마리아 안나 베르긴(Maria Anna Bergin)과 결혼한다. 이 결혼으로 인해 글룩은 비엔나 궁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마리아의 큰 언니 남편이 당시 궁정 건축 감독관이었다. 결혼 후에도 글룩은 빈을 본거지로 하여 각지로 연주 여행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1751/52년 겨울 글룩은 로카텔리 순회오페라단에 합류하였고, 프라하에서『이씨필레』(Issipile,1752)를 초연하였다.  

1754년 가을, 힐드부르크하우젠 왕자는 자신의 궁성에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를 초청하여 며칠간 축제를 열었다. 글룩은 이 축제를 위하여 본노(Giuseppe Bonno)와 공동으로 독창과 합창으로 이루어진 칸타타 <궁정 축제를 위한 합창I, III > (Cori da cantarsi a Schlosshof, 합창 II 와 IV은 본노의 작곡)를 작곡하였다. 둘째 날 저녁, 왕자의 궁성극장에서 상연된『중국인』(Le Cinesi)은 글룩의 능력을 확실히 보여준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힐드부르크하우젠 축제의 성공으로 글룩은 비엔나에서 명성을 얻었고, 궁정관계자들, 특히 궁정극장 감독 두랏쪼 (Conte Giacomo Durazzo)백작의 관심을 끌었다. 비로소 글룩은 이듬해부터 (백작의 작품의뢰를 시작으로) 오페라 코미크 분야에 공식적인 발을 들여 놓는다. 글룩은 1758-1764년에 걸쳐 8곡의 오페라 코미크를 발표하고 있다: 『가짜 여자 노예』,『메를랭 섬』,『포위된  키타이롱』, 『4인의  악마』,『마법의 나무』,『정신 차린 주정뱅이』,『사기당한  회교의 재판관』, 『예기치  못한 해후』.
1756년 글룩은 그간의 성공적인 업적에 대해 교황청으로부터 황금박차훈장과 기사 칭호를 받았다. 

오페라의 개혁. 
100곡이 넘는 무대음악 중에서 49곡이 전해진다. 이중 다음 7개의 개혁오페라는 개혁가 글룩에게 비길 데 없이 중요하고, 또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하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 1762) ,『알체스테』(Alceste, 1767), 『파리데와 엘레나』(Paride ed Elena, 1770), 『올리드의 이피제니』(Iphigenie en Aulide, 1774),  『아르미드』(Armide, 1777), 『토리드의 이피제니』(Iphigenie en Tauride, 1779), 『에코와 나르시스』(Echo et Narcisse, 1779).
이태리 대본작가 칼짜비지(Raniero de´ Calzabigi)와의 만남은 글룩에게 큰 전기가 되었다. 칼짜비지는 1761년 발레무언극『동 쥬앙』(Don Juan, 1761)으로 글룩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글룩의 세 계혁오페라의 대본을 썼다. 사랑의 고통과 기쁨·  질투·  살인·  음모·  도덕적 훈계 등의 중세적 내용으로 된  유행하던 작품들에서 1762년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즉『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로 글룩은 칼짜비지 그리고 두랏쪼 백작과 함께 이태리 오페라 개혁을 시작하였다. 칼짜비지는 통례의 복잡한 줄거리, 전개를 방해하는 부차적인 장면, 조연 등을 폐지하였으며,  장식을 제거한 오르페오 신화를 본래 모습대로 다루었다. 음악 역시 단순해졌으며 핵심적인 것에 제한되었다. 다카포 아리아 대신 장절가곡과 론도, 피날레의 보드빌 등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의 요소들이 사용되었다. 
개혁오페라의 주된 목표에 관하여 글룩은『알체스테』와『파리데와 엘레나』의 서문에 언급하는데 이러한 개혁은 마침내  칼짜비지 대본에 의한 3개의 개혁오페라로 실현되었다. 즉 음악은 정신적 세계, 외적 사건을 표현하는데 소용되었고, 쳄발로와 첼로로 반주되던 세코 레치타티보 대신에 극적으로 구성된 반주 레치타티보가 사용되었다. 합창은 고대극에서와 같이 줄거리에 삽입되며, 오페라 앞에서 비연결적 기악작품이던 서곡들은 이제 줄거리와 관련되었고, 극의 성격을 관객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그 주제를 나타내게 되었다.
칼짜비지의 대본으로 되지 않은, 1760년대 글룩의 이태리 오페라들은 소위 개혁 작품들의 그늘에 가린다. 
1772년 글룩의 새 협력자가 된 사람은  비엔나 주재 프랑스 대사의 수행원 뒤 룰레(Le Blanc Du Roullet )였다. 그는 네 번째 개혁오페라『올리드의 이피제니』(1774)의 대본을 썼고, 또한『오르페오』와『알체스테』를 불어로 번역·  수정하였다.  빠리 극장에서 상연된, 극적 성격이 뚜렷한『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1774)와 『알체스테』(1776)는 규모가 큰 옛 오페라 세리아 형식을 폐지시켰다.
1777년 키노 (Philippe Quinault )의 대본에 의한『아르미드』로 글룩은 점차 빠리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어『토리드의 이피제니 』의 대 성공으로 그는 프랑스인들에게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 부각되었다. 글룩의 마지막 무대작품은 빠리에서 초연(1779)된『에코와 나르시스 』였다.

<글룩·  피치니 논쟁>
글룩은 그의 대본작가들 칼짜비지· 뒤 룰레· 키노· 길라드 (Nicolet François Guillard )· 바롱 드 취디(Baron de Tschudi )와 함께 전통 바로크오페라의 복잡한 줄거리와 과장된 연극조를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만들었다(글룩의 오페라 개혁은 자연스러운 극을  목표로 함). 이것은 동료·  예술가·  청중들의 전적인 찬성을  얻지 못했다. 이로써 이태리의 오페라 작곡가인 피치니 (Niccolo Piccinni) 추종자들 (마르몽텔, 달랑베르, 라 아르프)과  개혁가 글룩파(아르나우, 수아르) 사이에 빈번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태리 성악위주의 오페라 추종자들인 피치니파는, 글룩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 이념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특히 글룩은 선율 면에서 독창성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대성공을 거둔 『토리드의 이피제니』의 빠리 상연(1779)으로 글룩의 이상(극적오페라)이 실현된다. <글룩·  피치니 논쟁>은 주로 파리에서 1774 -1779년에 걸쳐 펼쳐진 논쟁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라기 보다는 그들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었다.

비엔나(1779 -1787). 
비엔나로 돌아온 글룩은 1780년 독일 오페라의 작곡을 계획했으나, 1781년 두 번째 뇌졸중은 66살 작곡가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오페라 개혁가 글룩은 이후 8년 동안 조용한 은퇴생활을 보내야 했다.

프랑스에서 글룩의 영향은 특히 작곡가들 (메윌[Méhul, Etienne-Nicola],케루비니[L. Cherubini])에게서 보여 지고,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는 낭송적으로 특징 지워진 새 독일 노래양식에서 나타난다. 글룩의 후기 작품 중 클롭슈톡(G. Klopstock)의 시에 붙인 가곡은 중요하다. 그 중에 7곡이<클롭슈톡의 송가와 노래>란 제목으로 비엔나에서 출판(1785/86) 되었다. 

주요작품 

가) 성악곡 

시편 및 그 외 전례음악: 
8성부 혼성 합창(?)을 위한 (다윗의 통회) 시편 50편『자비를 베풀어 주소서』(Miserere, 1744/45 경, 소실됨), 시편 8편『여호와 우리 주여』(Domine Dominus noster, 1753-57 경, 소실됨),혼성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편 130편 『깊은 수렁 속에서』(De profundis, 1785-87 경), 독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테트『알마 세데스』(Alma sedes, 1779 이전), 여러 부류의 종교적 아리아(오페라 아리아의 파로디 작품들). 

칸타타:
궁정 축제를 위한 합창 I, III (Cori da cantarsi a Schlosshof [가사: P. 메타스타지오], 1754,합창 II 와 IV는 본노[Giuseppe Bonno]가 작곡함)

가곡: 
종교적 노래(Geistliche Lieder, 소실됨, 1775 이전 작곡 ),
소프라노와 클라비어를 위한 <클롭슈톡의 송가와 노래> (Klopstocks Oden und Lieder),
소프라노와 클라비어를 위한 <죽음에게> (An den Tod ["O Anblick der Glanznacht"]). 

나) 무대음악(Bühnenwerk)

1. 오페라 (초연 연도) 
『아르타세르세』(Artaserse, 1741);『클레오니체』(Cleonice 또는 데메트리오[Demetrio], 1742),『데모폰테』(Demofoonte, 1742),『티그라네스 』(Il Tigrane, 1743),『 소포니스바』(La Sofonisba,1744),『이페르메스트라』(Ipermestra,1744),『 포로』(Poro,1744),『이폴리토』(Ippolito, 1745),『거인의 패망』(La caduta de´giganti, 1746),『 아르타메네』(Artamene, 1746),『헤라큘레스와 헤베의 결혼』(Le nozze d´Ercle e d´Ebe, 1747),『다시 알아보게 된 세미라미데』(La Semiramide riconosciuta, 1748),『신들의 싸움 』(La contesa de´ Numi, 1749);『가짜 여자 노예』(La fausse esclave, 1758),『메를랭 섬』(L´isle de Merlin, 1758);『포위된 키타이롱』(La Cythère assiégée, 1759),『4인의 악마 』(Le diable à quatre, 1759),『마법의 나무』(L´arbre enchanté, 1759);『테티드』(Tetide, 1760);『 정신 차린 주정뱅이』(L´ivrogne corrigé,1760);『사기당한 회교의 재판관』(Le cadi dupé, 1761);『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 1762),『클렐리아의 승리 』(Il trinfo di Clelia, 1763),『에치오』(Ezio II, 1763),『예기치 못한 해후』(La rencontre imprévue, 1764);『혼란에 빠진 파르낫소 산』(Il Parnaso confuso, 1765),『텔레마코스 또는 키르체의 섬』(Telemaco, ossia L´isola di Circe,1765),『왕관』(La corona, 1987);『프롤로그』(Prologo, 1767) 『알체스테』(Alceste, 1767),『 아폴로의 축제』(Le Feste d´Apollo, 1767),『파리데와 엘레나』(Paride ed Elena, 1770),『올리드의 이피제니』(Iphigénie en Aulide, 1774),『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phée et Euridice, 1774),『아르미드』(Armide, 1777),『 토리드의 이피제니』(Iphigénie en Tauride, 1779);『에코와 나르시스』(Echo et Narcisse, 1779).

2. 파스티치오(Pasticcio)
『가짜 여자노예』(La finta schiava, 1744),『아리안나』(Arianna, 1762), 
『이사벨과 게르트루드』(Isabelle et Gertrude, 1765). 

3. 발레 (안무: 안지올리니[G. Angiolini ]) 
『동 쥬앙』(Don Juan 또는 삐에르의 잔치[Le festin de Pierre], 1761);『세미라미스』(Sémiramis, 비엔나 1765);『알렛산드로』(Alessandro, 비엔나 1764),『이피제니』(Iphigénie,1765) 『아킬레』(Achille). 

다) 기악곡 

오케스트라곡: 신포니아 (9곡): C , D , D , D , D , E, F, F, G 장조. 
실내악: 트리오 소나타 (6곡): C 장조, G 단조, A 장조, Bb 장조, Eb 장조, F 장조 
트리오 소나타 E장조트리오 소나타 F 장조.

전집: GGA: Christoph Willibald Gluck, sämtliche Werke, begründet von R. Gerber, fortgeführt von G. Croll, hrsg. von der Akad. der Wissenschaften und der Lit. Mainz, Kassel u. a. 1951ff. 

참고문헌 
A. A. Abert: Christoph Willibald Gluck, 1959. 
A. Einstein: Gluck - Sein Leben - seine Werke, 1936 (revidierte Neuausgabe 1987). 
K. Hortschansky (Hrsg.): Christoph Willibald Gluck und die Opernreform, 1989. 

등록일자: 2005-12-19
장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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