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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켄슈타인, 오스발트 폰(Wolkenstein, Oswald von, 1377경-1445)
- 1377년경 티롤(Tirol)의 쇠네크 성(Schloß Schöneck)에서 출생. 남 티롤의 시인이며 최후의 민네징어 중 한 사람인 귀족가문 출신의 프리드리히 볼켄슈타인(Friedrich W.)과 카타리나 본 트로스트베르크(Catarina von Trostberg) 사이의 일곱 자녀 중 둘째 아들.
- 10살 때부터 모험적인 삶을 시작해 생의 대부분을 러시아, 페르시아, 그리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면서 보냄. 10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했다고 전해짐.
- 1401년 루프레히트(Ruprecht)왕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였다가 재정적 곤란에 빠짐. 이 때문에 형과 재산 문제로 다투었으며 이후에도 가족 간의 불화는 계속됨.
- 교회 및 세속 권력과 연계를 맺어 1406년에는 ‘코끼리 연맹’(Elefantenbund)의 창립 회원이 되어 정치 활동을 펼침.
- 1409년부터 브릭센(Brixen) 주교의 세속 대표자로 활동하였으나 1413년 사례 문제로 갈등을 겪음.
- 1415년부터 지기스문트(Sigismund)왕을 섬기기 시작.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Konstanz, 1414-1418)를 비롯한 다양한 외교적 사절단에서 그를 수행함.
- 1421-1427년 동안 다른 지주들과 심각한 의견충돌을 일으켰는데, 그때 난폭하고 불법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2번이나 체포되어 수감됨.
- 1430-1432년까지 다시 정치에 관여하여 바젤 공의회(Council of Basel)에 참석함. 그 후 자신의 영지로 은퇴하면서 음악과 시를 쓰는 일을 그만둠.
- 1445년 8월 2일 메라노(Merano)에서 사망.
볼켄슈타인의 노래들은 그의 생전에 악보와 함께 모음집 2권에 필사되었는데, 그것은 자신 직접 감독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양피지로 된 필사본들은 둘 다 서두에 시인의 초상화를 담고 있는데, 특히 필사본 B에 그려진 초상화는 피사넬로(Pisanello) 또는 그의 화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볼켄슈타인의 노래가 담긴 세 번째 모음집이 인스브루크(Innsbruck)에 남아 있는데, 종이 위에 필사된 이 모음집에는 악보 없이 가사만 적혀 있다. 그는 궁정 양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개인적 감정을 표현한 독일 노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것인지 불확실한 것까지 합쳐 볼켄슈타인의 시는 모두 130여 편이 남아 있으며, 57곡의 단선율 및 2-4성부로 된 37곡의 다성부 작품이 남아 있다. 그 단선율 중 11곡은 여러 번 중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두 곡은 각각 일곱 노래에 거듭 사용되었다. 그러나 다성 작품은 오직 두 곡만이 중복 사용되었다. 가사의 내용은 그 노래가 단성 또는 다성으로 작곡될 지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는데, 자전적 내용과 성스러운 이야기들, 명상적이고 교훈적인 주제들은 단성 노래가 되었으며, 사랑 노래와 희극적인 명랑한 주제의 노래들은 다성 노래가 되었다. 대다수의 노래들은 그의 다양한 연애 경험과 1417년 슈반가우(Schwangau)의 마르가레테(Margarete)와의 결혼에서 영감을 얻은 사랑 노래들로서 진정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노래들이다. 몇 곡은 동시대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으며, 다른 몇 곡은 1409년에서 1411년에 걸친 그의 예루살렘 방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런가하면 성스러운 가사에 곡을 붙인 것들도 있다.
볼켄슈타인의 37곡의 다성음악 중 16곡은 다른 필사본들에 실린 노래들과 일치한다. 그는 주로 프랑스 샹송들을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의 모델로 삼았는데, 란디니의 ≪Questa fanciulla≫는 이탈리아 원전에서 나온 유일한 곡이다. 이러한 볼켄슈타인의 다성 악곡들은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오래된 국제적 레퍼토리이며, 둘째는 카논들을 차용한 콘트라팍툼이다. 셋째는 지방적 전통을 따른 레퍼토리로, 이것들 중 어느 것이 볼켄슈타인 자신이 만든 것인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 지역에서 이미 만들어진 선율들을 활용하였던 것만은 분명한데, 독특한 기보법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넷째는 인스브루크 필사본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후기에 기보된 곡들이다. 볼켄슈타인은 비록 수효는 적지만 다양한 형태의 이들 다성악곡들을 아마도 중부 유럽에서 유통되던 모음집들로부터 알게 되었을 것이며, 나중에 알게 된 곡들은 그가 콘스탄츠와 바젤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하면서 접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는 달리 그의 단성 노래들은 그가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델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창적이다. 아마도 그는 시의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선율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볼켄슈타인의 양식은 전통적인 규칙보다는 선율적 특성을 강조하고 표현의 깊이를 앞세운 개성적인 것으로서, 그의 선배들을 얽매었던 독일 궁정노래 전통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민요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노래들의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담고 있는 두 필사본 덕택에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W. v. d. Vogelweide)와 괴테(J. W. Goethe) 사이의 독일어 시인 가운데 아마도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비록 그의 작품들이 중세 말 독일어 지역의 세속 음악문화를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들이기는 하지만, 볼켄슈타인 자신은 음악가로서보다는 시인, 가수, 정치가로서 더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Oswald von Wolkenstein: Geistliche und weltliche Lieder, ein- und mehrstimmig, ed. J. Schatz [text] and O. Koller [music], DTÖ sviii Jg. xi(1902).
Welker, L. “New Light on Oswald von Wolkenstein: Central European Traditions and Burgundian Polyphony”, Early Music History, vii(1987), pp. 187-226.
Strohm, R. “Song Composition in the Fourteenth and Fifteenth Centuries: Old and New Questions”. Jahrbuch der Oswald von Wolkenstein-Gesellschaft, ix( 1996-1997), pp. 523-550.
Strohm, R. The Rise of European Music 1380-1500, Cambridge, 1993.
등록일자: 2010.8.5
[이남재]
인명
볼켄슈타인, 오스발트 폰 [Wolkenstein, Oswald 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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